프레스티지 샴페인 하우스에 날개를 단 전문 경영인 'Maggie Henriquez'
‘진정한 친구를 위해 샴페인을, 거짓된 친구에게는 진정한 고통을(Champagne for my real friends; real pain for my sham friends)!’ 20세기 미술사를 빛낸 영국계 아일랜드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은 상당한 샴페인 애호가였는데, 주문을 할 때면 재치 있는 라임(rhyme, 음조가 비슷한 글자)이 돋보이는 이 문장을 애용했다고 한다. 그가 늘 찾던 샴페인 브랜드는 ‘천상의 와인’에 비유되기도 할 만큼 명성이 자자한 크루그(Krug).
프랑스 랭스(Reims)를 보금자리로 삼아 1백70년 넘는 역사를 꾸려온 이 유서 깊은 샴페인은 프랜시스 베이컨처럼 많은 애호가가 아끼는 이들과 함께 소중한 시간을 보낼 때면 망설임 없이 선택하는 흠모의 대상이다. 크루그를 열렬하게 사랑하는 이들을 뜻하는 ‘크루기스트(Krugist)’라는 단어가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도 오를 정도로 ‘팬심’이 대단하다. 불세출의 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를 비롯해 오페라계의 디바 마리아 칼라스, 팝의 여왕 마돈나, 영화배우 제라르 디파르디외 등 유명 인사 중에도 크루기스트가 많지만, 사실 이 브랜드는 애써 크고 화려한 마케팅을 펼치지는 않는다.
‘알 만한’ 이들 사이에서는 워낙 수요와 충성도가 높은 데다 유수 샴페인 브랜드들에 비해 생산량도 확연히 적기 때문이었을 것이다(생산량을 기준으로 하자면 전 세계 샴페인 시장에서 크루그의 점유율은 0.15%에 못 미친다).
‘한번 빠지면 출구가 없다’고 일컬어지는 크루그만의 매력은 도대체 뭘까? 물론 놀랍도록 풍부하고 활기찬 동시에 섬세하고 균형 잡힌 풍미, 그리고 그에 따른 궁극의 즐거움이라고 다소 뻔한(?) 답을 내놓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처럼 빼어난 매력을 떠받치는 기저에는 크루그만의 영감 넘치는 스토리와 신념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점을 알아둘 필요가 있을 듯하다. 게다가 그 철학과 비전을 둘러싼 스토리가 사뭇 흥미진진하다. 1843년 크루그 하우스를 탄생시킨 조셉 크루그(Joseph Krug)의 모험적인 도전기도 그렇지만, 자칫 노후될 수도 있던 브랜드에 생기를 불어넣고 창조적 혁신을 일궈낸 현 사령탑 매기 엔리케즈(Maggie Henriquez)의 리브랜딩 성공담은 본질에 충실하면서도 새로운 호흡으로 진화해 나간다는 게 어떤 것인지 제대로 보여준다.
위기 상황에서 등장한 구원투수, 쓴맛을 보다
크루그는 명실공히 프레스티지 샴페인으로 사랑을 받아왔지만 매기 엔리케즈가 이 유서 깊은 브랜드의 수장으로 합류했을 때는 그다지 좋은 상황이 아니었다. 긴 검은 머리에 선한 눈매, 밝고 따스한 미소…. 외모와 인상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그는 유럽이 아니라 베네수엘라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남미 출신의 경영자다. 멕시코, 아르헨티나 등에서 식음료와 와인비즈니스를 성공적으로 이끈 경험을 바탕으로 2009년 와인의 본고장인 프랑스로 진출했고, LVMH 그룹이 그보다 10년 전인 1999년 인수한 이 전설적인 샴페인 브랜드를 이끌게 됐지만, 당시 크루그는 가파른 마이너스 성장 곡선을 그리면서 고전하고 있었다. 외환 위기도 악영향을 끼쳤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보수적이고 낡은 브랜드 이미지에 있었다. 전통이 고루함을 의미하지는 않지만 크루그는 브랜드 정체성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소비자와 소통하지 못했기에 특유의 매력은 빛이 바랬다.
정든 지역을 떠나 유럽으로 간 그가 크루그 최고경영자(CEO)로 취임한 지 1년 동안, 자신에게 주어진 구원투수 역할을 잘해 내려고 고군분투했지만, 단기간에 진전을 이뤄내기는 만만치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는 “평생 그런 최악의 성과를 내본 적이 없었다”라고 말할 정도로 심하게 헤맸다. 실제로 첫 해 성적은 고과에서 ‘D’를 받을 정도로 형편없었다. “와인과 식품업계 경력이 있긴 했지만 전 대중적인 소비재 영역의 전문가였어요. 제가 알고 있는 걸 적용하려 했지만 효과가 없었죠. 낭패감이 큰 건 사실이었지만 배움도 컸어요. ‘럭셔리’는 전혀 다른 이해와 접근 방식, 그리고 소통 방식이 필요한 영역이라는 점을 뼈저리게 깨닫게 됐죠.” 그는 다시 발동을 걸었다. 문제의 근원을 제대로 파악하고 대처하면 위기는 때로 기회의 원천이될 수 있다는 진리를 이미 체득한 터라 두려워하지 않았다.
창업자의 일기장에서 받은 영감, 극적인 전환을 일궈내다
오랜 역사와 남다른 품격을 갖춘 브랜드가 으레 그렇듯이 진정한 럭셔리의 정수는 창업자가 지닌 철학에 있다. 매기 엔리케즈는 크루그 고유의 정체성을 저돌적으로 탐색하다가 브랜드 창시자인 조셉 크루그가 남긴 일기장에 ‘꽂히게’ 됐다. 그의 철학과 비전이 오롯이 담긴 이 검붉은 체리빛 노트는 6대째 내려오면서도 나무 상자 안에 갇혀 있다가 세상 밖으로 나온 것이다. 이때가 2010년 봄. 매기는 비전으로 가득한 이 일기장을 읽다가 전율이 일 정도의 깨달음과 영감을 얻었다.
조셉 크루그는 독특하게 원대한 비전을 품고 있었는데, 그것은 최고의 테루아(terroir, 지리, 기후, 포도 재배법 등 와인용 포도를 재배하기 위한 전반적인 환경)에 서 ‘창조’되는 최상급 샴페인을 뜻하는 프레스티지 퀴베(Prestige Cuve′e)만 고집하되 작황이 좋은 연도만이 아니라 ‘해마다’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대개 ‘프레스티지 퀴베’ 라고 하면 특정 연도산 포도로만 빚어낸 ‘빈티지(vintage) 샴페인’을 연상하기 마련이다. 기준은 제조사마다 다소 달라질 수 있지만, 아무래도 ‘좋은 해’를 고르자면 매년 생산할 수 없기에 최상급 빈티지 샴페인의 공급은 제한될 수밖에 없고, 귀한 만큼 몸값이 높은 경우가 많다. 이에 반해 각기 다른 해에 만든 와인으로 블렌딩해 매년 똑같은 맛으로 만드는 ‘논빈티지(non-vintage) 샴페인’은 전체 시장의 80% 비중을 차지하는 흔하디흔한 제품이다. 그런데 조셉 크루그는 ‘왜 최상급 샴페인을 얻으려면 수년을 기다려야만 할까? 해마다 프레스티지 퀴베급 샴페인을 내놓는 건 불가능할까?’라는 의문을 품었고, 그 생각을 일기장에 담았다.
매년 생산되는 논빈티지 샴페인이기는 하지만 결코 흔치 않은 최상급 샴페인이라는 독특한 면모를 지닌 ‘크루그 그랑 퀴베(Krug Grande Cuve′e)’는 그렇게 탄생했다. 10여 가지 빈티지에서 나온 1백20여 가지 베이스 와인을 블렌딩한 다음 6년 이상 숙성시키는 ‘작품’으로, 한 병을 완성하는 데 무려 20년이 넘는 시간이 걸린다고.
“보통 논빈티지 샴페인이라고 하면 그저 신제품이 이전의 제품을 대체하는 식으로 만들어지고 유통된다고 여겨지죠. 하지만 매년 기후에 상관없이 한결같이 품질이 뛰어난, 우리가 ‘관대하다’고 표현하는최상의 샴페인을 탄생시키는 크루그는 전혀 그렇지 않아요. 한 해만으로는 ‘베스트’를 구성할 모든 풍미와 향을 모을 수 없기에 ‘계획적으로(by design) 만들어진 논빈티지’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그전까지 다른 논빈티지와 별다를 게 없는 방식으로 소통을 해왔던 거죠.”
이런 배경에서 이제 크루그는 그랑 퀴베에 매년 ‘재창조(re-created)되는 멀티 빈티지(multi-vintage)’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물론 크루그 하우스에는 빈티지 샴페인도 있다. 흥미로운 한 해의 스토리와 특징적인 캐릭터를 담아낸, ‘환경에 따라’ 창조되는 프레스티지 샴페인 ‘크루그 빈티지(Krug Vintage)’다. 예컨대 환상적인 날씨 속에서 태어난 ‘크루그 2002’는 ‘자연에 대한 찬가’, 몹시도 무더웠던 기후 속에서 꽃피운 ‘크루그 2003’은 ‘생기 넘치는 빛’이라는 수식어를 각각 달고 있다. 이렇듯 매년 재창조되는 최상의 멀티 빈티지 샴페인과 특정 해의 스토리를 표현한 빈티지 샴페인의 구성 역시 일기장에 수 놓인 창업자의 비전이었다. “좋은 샴페인 하우스는 품질이 동일한 두 종류의 삼페인만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크루그 그랑 퀴베는 ‘넘버 1(n°1)’, 크루그 빈티지는 ‘넘버 2(n°2)’라고 불린다.
단단한 정체성 위에 쌓아가는 크고 작은 혁신의 행보
세상에 둘도 없는 근사한 샴페인에 대한 창업자의 집착을 바탕으로 한 개척 정신. 매기 엔리케즈는 다른 어느 브랜드도 모방할 수 없는 크루그만의 본질을 꿰뚫은 뒤에는 그 유일무이한 가치를 소비자가 더 잘 이해하고 즐길 수 있는 방식을 개발하는 데 집중했다. 한마디로 스토리텔링 방식을 혁신한 셈이다.
대표적인 성과가 2011년 9월 도입한 ‘크루그 ID’. 이때부터 모든 크루그 샴페인 보틀의 뒷면에 있는 레이블에는 6자리 숫자로 된 ID가 부여되고, 이를 모바일 앱이나 웹사이트(krug.com)를 통해 입력하면 해당 샴페인의 이모저모를 파악할 수 있다. 예컨대 크루그 그랑 퀴베 ID313052의 경우에는 블렌딩된 와인 종류가 1백20개, 그중 가장 어린 와인은 2003년산, 오래 숙성된 와인은 1988년산, 2015년 <와인 스펙테이터>에서 95점을 받았다는 정보, 셀러마스터 소개 등 간단한 스토리를 접할 수 있다. 그리고 스크린 아래로 더 내려가면 해당 샴페인을 홀짝이면서 감상할 만한 ‘음악 리스트’가 뜬다. 마일스 데이비스 같은 재즈 명장부터 차이콥스키나 베토벤 같은 클래식 거장까지 다양하다. 바로 매기 엔리케즈 체제에서 2014년부터 시작한 ‘뮤직 페어링(music pairing)’ 프로젝트의 결과물이다. 샴페인 특유의 기포 덕분에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 ‘소리’라는 매개체를 통해 기존의 테이스팅 체험을 넘어서는 새로운 차원의 감성적 경험을 선사하고자 하는 시도다.
“2012년부터 ‘소리를 활용한 체험’을 모색하다가 2013년 홍콩 행사에서 유명 음악인을 초청해 당시 서빙했던 샴페인과 어울리는 음악을 추천하도록 했는데, ‘아, 이 페어링은 꼭 시도해야 해’라고 결심하면서 이듬해 정식으로 도입했죠. 청각과 미각의 상관관계에 대해서는 옥스퍼드대에서 신경과학 계통의 연구 결과로도 발표한 바 있기에 더 고무됐답니다.”
작년부터는 크루그 그랑 퀴베와 잘 어울리는 한 가지 재료를 주제로 전 세계에서 크루그 홍보대사로 활동하는 유명 셰프들과 푸드 페어링 협업(크루그 & Single Ingredient Pairing)을 펼치고 있다. 지난해의 재료는 감자, 올해의 재료는 달걀이다. “크루그는 사실 푸드 페어링이라는 영역을 제일 먼저 개척한 브랜드이기도 해요.
1970년대 5대손인 앙리 크루그와 레미 크루그가 당시로서는 새로웠던 ‘샴페인 디너’라는 콘셉트를 제안했거든요.” 가을 햇살이 내리쬐는 오후에 서울 청담동의 한 레스토랑에서 은은한 음악을 배경으로 달걀요리와의 샴페인 페어링을 직접 진행하면서 곁들인 매기의 자랑 섞인 설명이다.
소프트 리더십이 돋보이는 부활의 아이콘
이제 7년이 흘렀을 뿐인데 매기 엔리케즈는 잠시 흐트러졌던 크루그라는 정교한 퍼즐을 빠르게 다시 맞춰나가는 ‘부활의 달인’ 같다. 2010년부터 성장세로 돌아섰을 뿐만 아니라 재직 기간(2009~2015년) 중 연평균 성장률이 11%다. 게다가 단지 수치만 그럴 듯한 게 아니라 그 모양새가 디지털 흐름과 호흡을 같이하는 세련된 모던함을 품고 있다.
그는 일부러 밀레니얼 세대를 타깃으로 한 노림수가 아니라 샴페인 애호가들이 크루그를 보다 즐겁게 경험할 수 있는 스토리텔링을 고민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나온 전략이었다고 말한다. “크루그는 ‘파워’ 브랜드가 아니라 ‘사랑스러운’ 브랜드예요. 힘을 선택하기보다는 ‘선택의 힘’을 좋아하는 이들을 위한 브랜드죠.”
흥미로운 사실은 그가 전략으로 무장한 경영학도가 아니라 원래는 시스템 엔지니어링을 전공한 공학도로 출발했다는 점이다(하버드대로 유학을 가기도 했다). 그는 베네수엘라에서 주류(wine & spirits) 회사를 운영한 부친 아래 다섯 자매와 ‘청일점’인 막내 남동생으로 이뤄진 화목한 가정의 넷째로 자라났다고. 온유하면서도 활기찬, 이상적인 소프트 리더십을 발휘하는 모습을 보노라면 좀처럼 믿기 힘들지만, 그는 어린 시절 수줍고, 심지어는 반사회적인 아이였다고 한다. 한때는 수녀가 되려고도 했다고. “전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제 부모님은 저를 절대로 ‘재단’하거나 어떤 ‘딱지’를 붙이거나 하지 않으셨어요. 덕분에 정신적으로 성장할 수 있게 됐죠. 나중에는 댄서도 꿈꿨고요. 그처럼 자유롭게 나래를 펼칠 수 있게 해준 가정 환경 덕분일까요.
저희 자매들과 제 남동생은 건축가, 외교관, 수학자, 다큐멘터리 PD 등 저마다 자유롭게 다른 일을 해요.” 공통분모가 있다면 전부 다 정열적인 ‘일꾼(hard worker)’이자 글로벌 감각이 넘치는 코즈모폴리턴이라는 점이라고. 두 아들의 엄마로도 누구보다 바쁘게, 그렇지만 행복하게 살아왔다는 매기 엔리케즈. 그는 현재 크루그의 사령탑으로 맹렬히 활동하면서도 26년에 걸쳐 와인업계에 종사한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박사 논문을 쓰고 있다. 그 주제는 ‘위기를 기회로 탈바꿈한 경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