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형철의 실크로드 기행] #17 불교 성지 커즈얼 석굴
천산산맥은 서역의 척추이며 기나긴 실크로드의 난간이다. 이 난간을 따라 서쪽으로 가다보면 쿠처(庫車)에 이른다. '대당서역기'에 굴지국(屈支國)으로 기록된 쿠처는 과거 쳐우츠(龜玆) 왕국이 찬란한 불교문화를 꽃피운 곳이다.
기원전 2세기에 건립한 쳐우츠(龜玆) 왕국은 시대에 따라 구자(鳩玆), 굴지(屈支), 고차(苦叉) 등으로 불리었다. 사서에 의하면 쳐우츠 왕국은 문자가 있었고, 사람들이 음악과 무용에 능했다고 한다. 그러나 쳐우츠 왕국은 실크로드의 중계무역권을 차지하기 위한 흉노와 한의 전쟁에 휘말릴 수밖에 없는 처지이기도 하였다. 이슬람교의 전파가 시작된 것은 10세기 이후이며, 1286년 몽고에 점령된 후 이슬람화가 가속화 되었다. 청나라가 이곳을 점령한 후 지명을 현재의 쿠처라고 하였다.
쿠처에는 신강의 다른 지역에서 볼 수 없는 과거 찬란했던 불교문화를 잘 보여주는 커즈얼 석굴 사원이 있다. 커즈얼(克孜爾, Kizil) 석굴은 타클라마칸의 숨겨진 보물, 예술의 보고로 불린다. 쿠처 시에서 서북쪽으로 약 65㎞ 지점인 쿠처와 천산산맥 사이에 넓게 자리 잡고 있는 차르타([웨이우얼어로 불모의 산) 산 중간에 있다. 앞에는 무자티 강이 흐르고 뒤에는 따꺼 산이 있어 경치가 아름답다. 이러한 자연조건에 위치하고 있는 커즈얼 석굴은 중국에서 시기적으로 가장 먼저 조성된 석굴로 3세기부터 건설되기 시작하여 6세기에 전성기를 맞고 7세기 이후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시기적으로는 중국의 한나라 때부터 당나라 때까지에 해당한다.
커즈얼 석굴 사원은 신강성 내 최대의 불교 유적지이며, 동서 길이 2㎞에 걸쳐 모두 236개의 석굴이 있는데 이 중 비교적 보존상태가 양호한 것은 135개이다. 4세기에는 이곳에만 승려 1만 명이 있었다고 하니 그 규모와 불교의 번성 정도를 짐작할 수 있다. ‘커즈얼’이란 웨이우얼어로 ‘붉다’라는 뜻이다. 이것은 민둥산이 햇볕을 받으면 투루판의 훠옌산처럼 붉게 타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름과는 반대로 ‘파란 석굴’이라 불리기도 한다. 그것은 벽화의 그림이 다른 지역에서는 볼 수 없는 파란 색 안료를 많이 사용하여 그렸기 때문이다. 이 파란색 물감의 원료는 ‘라피스라줄리(lapis-lazuli)’라고 하는 것인데 우리에게는 ‘청금석’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 청금석은 쿠처 지역에서는 생산되지 않는 것으로, 실크로드를 통해 서쪽에서 수입한 것이다. 청금석을 원료로 하여 만든 파란색 안료는 절대 변하지 않기 때문에 벽화의 다른 색은 산화작용에 의해 변했지만 파란색만은 아직도 매우 선명하다.
석굴에는 공통적으로 가운데 부처가 있고 부처를 중심으로 실내를 한 바퀴 돌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아치형 천장과 수직인 벽면에는 석가모니 출가 고사, 인연에 관한 고사, 불경의 내용 등이 그려져 있다. 하나의 그림은 A4용지 정도의 크기이고, 이런 작은 그림들이 연속하여 동굴의 바닥을 제외한 삼면에 그려져 있다.
커즈얼 석굴을 설명할 때 져우머루어스(鳩摩羅什, 원음에 가까운 이름은 쿠마라지바)를 빼놓을 수 없다. 인도에서 건너온 귀족인 아버지와 쿠처 왕의 여동생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왕위계승 싸움에 휘말리기 싫어하는 어머니의 뜻에 따라 7세에 출가하여 인도의 간다라, 카시미르 지역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 곳에서 불교를 공부하고 돌아와 커즈얼 석굴 사원에서 범어로 된 불경을 중국어로 번역하며 불교의 보급에 힘쓴다. 그가 번역한 불경은 반야심경, 법화경, 금강경 등을 비롯하여 384권에 이르지만, 현존하는 것은 313권이다. 그가 번역한 불경은 중국은 물론 우리나라와 일본에서도 주요 경전이 되었다. 그 유명한 ‘색즉시공, 공즉시색’도 그가 처음으로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번역이 얼마나 정확한가는 그가 남긴 유언에 ‘나의 불경 번역에는 오류가 없다. 그것은 내가 죽은 뒤 화장을 해도 나의 혀만은 타지 않음으로써 증명될 것이다.’라고 한 말에서 엿볼 수 있다. 동양의 불교 발전은 져우머루어스에서부터 출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커즈얼 석굴 입구에는 1994년 져우머루어스의 탄생 1,650주년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고뇌하고 있는 듯한 그의 모습이 조각된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다.
학계에서는 이 지역을 쳐우츠(龜玆) 문화권이라 명명하고 지속적인 연구를 하고 있다. 그리고 정부에서는 1961년 커즈얼 석굴 사원을 중점문물보호(重點文物保護)지역으로 지정하고, 전문 연구원을 파견하여 연구하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한 가지 아이러니컬한 것은 연구 업적이 서양에 비해 상당히 저조하다는 것이다. 중국에서는 1980년 이후에야 본격적으로 석굴벽화를 연구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커즈얼 천불동에 갔을 때 나는 앞방에 묵고 있던 이탈리아에서 유학 온, 북경대 역사과 박사과정 학생을 만난 적이 있다. 그는 6개월 간 그곳에 머물면서 매일 벽화의 크기를 정확히 재고, 특징을 메모하고, 벽화를 종이에 옮겨 그리고 있었다.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진지하고 열심히 연구하는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