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비록을 통해 보는 역사] ④ 조선 침략을 감행한 일본의 두 무장, 고니시 VS. 가토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는 2명의 가신,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가 있었다. 고니시와 가토는 서로 앙숙 관계였는데,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 둘의 관계를 파악하고 이를 전쟁에 활용하였다. 즉, 두 사람을 서로 경쟁하게 하여 빠르게 조선 침략을 성공시키려 하였던 것이다.
고니시 유키나가 VS. 가토 기요마사
상인 출신의 무장이자 정치가였던 고니시는 당시 조선 무역을 독점하다시피 하던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의 장인이었다. 조선과 친분이 있었던 사위의 입장 등으로 인해 처음에는 조선 침략을 막고자 하였으나 실패하였고, 이에 앙숙 관계였던 가토 기요마사에게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제 1 선봉으로 임진왜란에 참여하게 된다. 부산진성, 다대포진성, 동래성을 차례로 함락하고, 수도인 한양을 점령하여 가장 큰 공을 세웠다.
가토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6촌 친척 조카였다. 임진왜란에는 고니시에 이은 2진으로 전쟁에 참여하였으며, 전쟁 초반 조선의 왕자인 임해군과 순화군을 생포하는 등 공을 세웠다. 1596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에 따라 일본으로 귀환한 뒤, 정유재란 때는 1군 사령관으로 재차 조선을 침략했다.
처음 둘의 관계가 틀어진 것은 종교적인 문제
권력을 다투는 관계인 둘의 사이가 당연히 좋을 수 없었겠지만, 두 사람의 사이가 처음 틀어지기 시작한 것은 종교적 문제에서 시작됐다. 고니시는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고 가토는 불교 신자였는데, 가토가 그의 영지에 있던 가톨릭 신자를 탄압하자 이를 피해 고니시의 영지로 도망쳐 온 카톨릭 교도들을 고니시가 보호해 주면서 둘의 사이가 소원해지기 시작했다.
둘의 관계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끝난 이후 일본으로 돌아가서도 나아지지 않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가토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편에 섰고, 고니시는 그의 반대편에 서게 되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진영의 승리로 끝나면서 고니시는 참수되었고, 고니시의 영지는 모두 가토가 가로채면서 고니시의 사후에도 계속해서 둘의 앙숙 관계는 지속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순신의 등장으로 더욱 극의 긴장감을 높이고 있는 KBS 사극 '징비록'에서 두 무장의 신경전은 또 다른 재미를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