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머물었던 비파나네 집 건너편에 있는 힌두교 사원. 네팔은 힌두교 신자가 87%에 달하는 만큼 마을 곳곳에서 작은 힌두교 사원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딸랑딸랑딸랑~”

네팔에서의 이튿날, 새벽 6시쯤 되었을까. 아직 해도 다 뜨지 않은 어스름한 시각에 쉴 새 없이 울리는 종소리에 잠을 깼다. 비파나는 언제 일어났는지 겉옷을 챙겨 입고 밖에 나갈 채비를 하고 있다. 집 앞 힌두교 사원에 간단다. 잠이 덜 깬 나는 대충 털조끼를 걸쳐 입고 따라나선다. 빨간, 노란 티카(Tika : 힌두교 신자들이 이마에 칠하는 점) 가루가 담긴 은색 쟁반을 든 비파나는 시바와 가네쉬 석상 앞에서 몸을 낮추더니 종을 딸랑딸랑 울린다. 아, 저 소리는…. 내 새벽잠을 깨운 종소리의 정체가 드러나는 순간이다. 비파나는 가네쉬 석상에 쟁반 위 빨간, 노란 티카 가루를 뿌린 다음 물을 붓는다. 석상 주변에 빨간 물이 흐른다.
이제 다 끝났나 싶어 사원을 떠나는데 비파나가 웬 나무 두 그루에도 아까 했던 것과 같은 의식을 행한다. 이 나무도 신이냐 물으니 그렇다고 한다. 어제는 집에서 키우는 개도 신이라며 띠하르 축제(Tihar : 네팔에서 두 번째로 큰 축제로 힌두교의 부와 행운의 여신 락슈미(Lakshmi)를 숭배) 기간 티카를 발라줬다더니 나무까지…. 석상도 개도 심지어 나무도 신이 되는 이곳. 힌두신이 3억8천에 달한다는 ‘신들의 나라’ 네팔에 와있음을 새삼스레 깨닫는다. 근데 왜 하고많은 나무들 중에 이 나무일까. 비파나는 이 나무가 ‘특별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글쎄 내가 보기엔 그 나무가 그 나무인데…. 무엇이 특별한지는 짧은 영어+네팔어+보디랭귀지를 총동원 해도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어쨌든 매일 아침 이런 의식을 행한다고 했다. 즉, 마을에 머무는 4일 동안 나의 모닝콜은 다름 아닌 힌두교 신자들이 울리는 종소리였다.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일일 한국문화 선생님이 되다

Narayan Jan Secondary School의 모습(오른쪽 건물), 학교 중앙에서부터 밖으로 뻗어있는 커다란 나무가 인상적이다.

날이 밝자 6년 전 5개월간 한국어와 컴퓨터, 미술을 가르쳤던 Narayan Jan Secondary School로 발걸음을 옮겼다. 내가 가르쳤던 학생들은 현재 모두 졸업을 했고 10학년에 몇몇만 남아있다고 한다. 오랜만의 방문이지만 나를 기억하는 아이들이 상기된 얼굴로 인사를 건넨다. 나도 때마침 홈스테이를 했던 비슈누 선생님이 교실 앞에 계시길래 인사를 건넸다. 그런데….
“한국에서 온 산띠입니다. 한국에 대해 궁금한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선생님은 내게 교실로 들어오라고 하더니, 대뜸 아이들에게 한국에 대해 궁금한 것이 있으면 질문을 하라는 것이 아닌가. 아예 이번 영어수업 시간을 나에게 맡길 태세였다. 갑작스런 수업 초대에 이뤄진 한국 문화수업, 이런 게 진정한 열린 수업인 걸까. 엉겁결에 자기소개로 입을 연 나는 학생들의 질문에 따라 내가 왜 네팔에 왔는지, 한국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부터 한국의 전통의상과 문화에 대해서까지 대답을 하게 됐다. 칠판에 한복을 정성스레 그리고 한국어 철자까지 써놓고 나니, 흡사 한국문화 전도사(?)가 된 기분이다. 그런데 한 학생이 한국의 국가가 무어냐 묻는다. 한 소절 불러달라는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엉겁결에 한국문화 수업을 하게 된 9학년 반에서 학생들과 함께. 왼쪽의 벽화는 한국에서 온 단기봉사단이 그린 것이다.

그렇다. 결국 불렀다. 스무명 남짓 네팔 학생들 앞에서 애국가를 부르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갑작스럽게 부르는 바람에 후렴구조차 생각이 안나 앞부분만 겨우 불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연습이라도 해갈 걸….

비슈누 선생님은 한술 더 떠 방금 부른 애국가의 의미를 설명해 달라고 한다. 아, 어찌할까 이 짧은 영어 실력을, 영어 실력을 차치하더라도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을 어떻게 영어로 표현한단 말인가. 나는 그저 앞 구절 의미는 쏙 뺀 채 ‘신이 우리나라를 보호하신다’라는 정도로 해석을 해주었다. 그런 짧은 의미라고. 뭐 틀린 말은 아니지 않은가.

걸상과 칠판 등 시설이 교체된 3학년 학생 교실. 더 이상 하얀 분필 가루를 마실 일도, 나무 의자 가시에 찔릴 염려도 없다.

뜨거웠던(?) 9학년 수업을 마치고 학교를 둘러보았다. 건물은 변함없지만 책걸상과 칠판 등 시설이 여럿 바뀌어 있었다. 특히 분필로 수업을 했던 칠판은 마커로 수업을 할 수 있는 보드로 바뀌어 있었다.
더 이상 하얀 분필가루에 숨을 참을 필요도, 휴지로 칠판을 뻑뻑 문댈 필요도 없었다. 나중에 비슈누 선생님께 들으니 벽 페인트칠은 한국 NGO의 단기봉사단이 해주었고, 책걸상과 칠판은 한국 NGO와 삼성이 공동으로 추진하는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지원을 받았다고 한다. 카트만두 시내에서 한 시간 떨어져 있는 이 마을에서 한국의 흔적을 발견하게 될 줄이야.
‘흙색’이 된 흑색 신발, 깔끔을 떨 필요가 없네

집집마다 딸려 있는 텃밭. 마을 곳곳엔 닭, 오리는 물론 염소까지 자유롭게 다닌다.

마을에 온지 3일, 사람은 적응하는 동물이라 했던가. 첫날 곳곳의 염소똥과 닭똥을 보며 요리조리 피해 다니고, 거리를 빈틈없이 차지한 소똥 앞에선 건너뛰기도 서슴지 않았는데, 지금은 땅을 신경 쓰지 않고 걷고 있다. 한국의 지하철에선 얼룩 있는 의자라면 서서 가는 한이 있더라도 앉지 않던 내가, 어젠 만차 버스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밟았을 계단 위에도 자리를 잡았더랬다. 내 흑색 신발은 어느새 흙색. 더 이상 깔끔을 떨 필요가 없어졌다.
여러 가축들, 흙과 어울려 사는 네팔인들의 삶에 그것들이 남긴 흔적은 더러운 것이 아니다. 가축들의 똥을 피하지 않고, 맨발로 밭에 나가 채소를 따오는 모습에 의아해하기도 했지만 말이다. 흙에서 난 쌀과 채소로, 가축들로부터 얻은 고기로 배를 채우며 삶을 엮었을 그들의 삶에 이것들이 어떤 존재인가를 생각하니 더러울 것이 없었다. 익숙해지는 걸까, 쿨해지는 걸까. 더러움의 정의는 무얼까. 옷에 진 조그만 얼룩에도 유난을 떨며 비누칠을 하던 한국에서의 삶. 꼭 그럴 필요가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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