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국제시장', 잊어서는 안될 그 때 그 사건 ② 파독 광부와 간호사
6.25전쟁이 끝나 폐허가 된 우리나라는 1960년대 열악한 경제상황에 놓여 있었다. 당시 정권은 외화벌이를 위해 해외로 노동력을 파견하는 정책을 적극 추진하기 시작했다.
60년대, 외화벌이를 위한 고민
1960년대 들어서 박정희 군사정권은 수출지향정책을 펼쳤지만 실업난과 외화부족 현상을 피할 수 없었다. 국토 재건을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지만 우리나라에 돈을 빌려주는 나라가 있을 리 만무했다. 서독으로 대사를 파견한 대한민국은 서독으로부터 돈을 빌리는 데 성공한다. 단, 힘든 육체 노동을 대신할 노동자를 파견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당시 2차 세계대전 이후 놀라운 경제성장을 거듭하던 서독은 힘든 일을 하지 않으려는 독일인들이 많아 노동력이 부족했던 것이다.
500명 모집에 4만 6천여명 지원
1966년부터 대규모 간호사 파견도 본격적으로 이뤄져
1963년 처음 파독광부 500명을 모집했는데 당시 일자리가 너무 부족했던 지라 무려 4만 6천여명의 지원자가 몰렸다. 당시로서는 매우 큰 금액인 160달러가 매달 지급되었기에 많은 사람들이 독일로 가고 싶어했다. 광산에서 일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잘 접해보지 못했을 당시 국민들에게는 그저 많은 돈을 받고 일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정도였다.
간호사의 경우에는 파독광부를 결정하기 이전부터 민간 교류의 형식으로 독일로 파견되었고, 1966년부터는 독일 마인츠 대학의 교수였던 이수길 박사를 통해 대규모로 간호사가 파견되기 시작했다. 간호사들이 처음 했던 일은 시신을 닦는 일이었다. 나이 어린 간호사들이 오로지 돈을 벌기 위해서, 나라의 외화벌이를 위해서 말도 안 통하는 낯선 타지에서 모진 일을 했던 것이다.
독일에 자리잡은 파독 근로자들
돈을 벌어 고국의 가족들을 먹여 살릴 수 있다는 사실은 지하 1000m 깊은 땅속에서 하루 8시간 이상의 고된 노동을 이겨내게 했고, 시체를 닦거나 거동이 불편한 환자들의 대소변을 받는 일도 마다하지 않게 했다. 그러다 보니 독일인들의 그들에 대한 평가는 좋았고, 대다수 간호사는 계약 연장을 하면서 독일에서 살게 되었다. 광부들 역시 60% 가량은 독일에 남은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50여년이 지난 지금 그들의 희생 다시 재조명
2013년에는 정수코리아라는 업체의 회장이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을 대상으로 사기 행각을 벌이는 사건이 있었다. 파독 근로자 50주년 모국 방문행사를 열겠다고 속여 한국으로 오게 하면서 후원금을 가로챈 것이었다. 237명의 파독 근로자들은 기쁜 마음으로 고국을 방문했다가 황망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지만, 이들을 이대로 사기 당하게 할 수 없다는 여론과 함께 정부가 고국 관광을 지원하면서 오히려 파독 근로자들을 기억하게 하는 좋은 기회가 되기도 했다. 이후 대통령이 직접 독일로 직접 편지를 보내는 등 그들의 희생을 기억하는 움직임이 계속되고 있다.
비록 그들도 가족과 본인이 살기 위해 선택한 길이기도 했겠지만, 그들이 피땀 흘려 벌어들인 외화가 밑거름이 되어 지금의 대한민국을 만들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