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죽인 살인자가 나쁜 사람이 아니냐는 질문에는 반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 사람이 목숨을 던져 다른 사람의 생명을 살린 사람이라는 전제가 붙는다면 혼란이 시작된다. 아마도 우리는 그 사람이 왜 살인을 했는지를 궁금해하게 될 것이다. 만일 이 사람이 살인자라고만 보도된다면 우리는 비난을 퍼부을 것이고, 생명을 살린 사람이라는 것만 보도된다면 영웅 대접을 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전부를 보지 못하고 보이는 것만을 본다. 드라마 ‘피노키오’ 속 이야기이다.
거짓말을 하면 딸꾹질을 한다는 가상의 ‘피노키오 증후군’을 가진 사람이 기자가 된다면 이라는 발상에서 시작된 이 드라마는 그 취지부터가 ‘기자란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전제로 한다. 드라마의 내용 중에서도 “거짓말을 못 하는 사람이 어떻게 기자가 되겠느냐, 대한민국에 피노키오가 기자가 되는 경우는 없었다”는 대사가 공공연히 등장한다. 그리고 피노키오에 대한 사람들의 신뢰와 기자에 대한 신뢰는 어느 순간 동일시된다.
신문, 방송에 나온 말들을 모두 믿었던 시기가 있었다. 신문, 활자로 찍힌 것에서 느끼는 신뢰도는 높았다. 그리고 TV 방송, 눈으로 보이는 화면의 파급력은 그 이상이었다. 영상도 짜깁기되고 편집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던 시대의 이야기이다. 인터넷이 등장한 이후, 방송된 사건 이면의 이야기들이 공유되는 시대가 되었다. 사람들은 언론에 나온 이야기들을 전적으로 믿지 않고 다시 검색하고 다른 관점의 경험들을 쏟아낸다. 음모론을 펼치는 사람도 늘어났다. 불신의 시대, 그건 단순히 언론에 대한 불신만은 아니겠지만 그만큼 우리가 많이 속아왔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모든 사물은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르게 볼 수 있다는 의미다. 쩝쩝거리며 음식을 먹는 사람이 있다고 치자. 주변 인물들은 ‘게걸스럽다’며 불쾌해 할 수도 있지만, 그의 어머니는 복스럽게 먹어서 좋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복스럽게 먹어 좋다’는 관점보다는 ‘게걸스러워서 불쾌하다’는 관점이 더 이야깃거리가 된다. 그리고 부정적인 면을 부각하는 것이 이야깃거리를 만들어 내야 하는 언론의 속성이기도 하다. 이 드라마는 그런 속성을 드라마 속 주인공이 경험하는 사건들에 빗대어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언론의 무책임함에 경각심을 던지고 있다.
이것은 오로지 드라마 속 이야기만은 아니다. 한 예로 최근에 벌어진 에네스 사생활 논란이 있다. 맹렬하게 비난하던 시청자들도 2주가 채 지나지 않아 벌써 까맣게 잊은 사건이다. 그 사건으로 가장 큰 상처를 입은 사람은 배신감을 느낀 시청자가 아니라 깨진 신뢰를 회복하며 함께 인생을 살아야 하는 그 배우자와 가족들이었다. 그럼에도 네티즌들의 비난에 동승하여 사생활을 까발리고 흥미거리로 전락시키는 언론들의 가벼운 행태. 오죽하면 그의 아내가 제발 멈춰달라며 하소연하는 글을 인터넷에 올리기까지 했을까. 그나마도 하소연할 창구가 있다는 것이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피노키오’는 인간의 양면성에 대한 철학적인 접근과 ‘진실의 왜곡’에 대한 숙제를 던져준다. 물론 지상파 드라마가 가진 고질병 ‘기-승-전-연애’가 그 주제를 선명하게 드러내는데 방해물이 되긴 하지만. 특히나 언론 기관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보면서 뜨끔할 만한 드라마 ‘피노키오’. 왜곡된 진실과 그 진실을 찾아가는 과정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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