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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픈' 역사를 반영하는 한국의 술, 폭탄주

기사입력 2018.09.11 14:00
  • 얼마 전 모 예능 방송에서는 폭탄주에 대한 언급이 나왔다. 중견 배우 임 모 씨가 자신만의 폭탄주 레시피가 있다며 일 년 중 400일을 음주를 한다고 밝혔다. 실질적으로 폭탄주는 각기 다른 술을 섞어 만드는 것으로, 주로 맛을 음미하기보다는 빨리 취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소주와 맥주를 섞은 소맥이 폭탄주의 대표적인 술 중에 하나이다. 그렇다면 어떠한 배경으로 이러한 술이 탄생되게 되었을까?

    전통주 문헌 속에서 등장하는 폭탄주 ‘혼돈주’
    술과 술을 섞은 것이라면 가장 먼저 등장하는 폭탄주는 바로 혼돈주이다. 1837년 전라도를 중심으로 술 레시피가 기록되어 있는 양주방에 등장하는 술이다. 만드는 방법은 막걸리에 증류식 소주를 타는 것. 하지만 지금처럼 많이 마시면서 빨리 취하는 폭탄주 문화와는 조금 거리가 있었다. 막걸리의 앙금이 가라앉은 다음에 맑게 떠오른 소주를 마시는 것인데 의외로 시간이 걸린다. 빨리 마셔서 빨리 취하는 술과 달리 적어도 기다림의 미학이 있는 술이었다.

  • 일제 강점기 시절의 안동소주/출처 명인안동소주
    ▲ 일제 강점기 시절의 안동소주/출처 명인안동소주

    맥주의 성장, 그리고 ‘비탁’의 등장
    일제 강점기 시절에는 특이한 술이 하나 등장한다. 바로 ‘비탁’이라는 술이다. 1930년대, 일본의 유명 맥주 두 기업은 한국 영등포에 각각의 맥주 공장을 설립한다. 두 기업은 한국에도 잘 알려진 기린 맥주와 삿포로 맥주로, 오비 맥주와 조선 맥주의 전신이다. 이때의 맥주 가격은 일반 노동자 3,4일치 임금으로, 굉장히 비싼 가격이었다. 따라서 쉽게 마실 수 있는 술이 아니었다. 그렇다 보니 이 맥주의 양을 늘리기 위해 소비자들 사이에서 하나의 믹싱주가 개발이 된다. 바로 맥주에 탁주를 섞은 것이다. 이름이 비탁인 이유는 일본의 맥주 명칭이 비르((ビール))로, 1960년도까지 맥주 대신에 삐루라고 불리곤 했기 때문이다. 비탁은 대통령도 좋아한다는 소문에 힘입어 1970년도까지 상당히 명맥을 유지한다. 1960년대부터 70년대까지도 맥주는 최고의 추석선물이라고 각광을 받을 만큼 고급 술이었고 막걸리는 점유율 70%가 넘는 최대 소비 시장이었다. 참고로 60년대 맥주 TV 광고를 보면, 승마, 조정, 테니스 등을 배경으로 한 것이 많았다.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주세만 해도 160%로 지금(72%)의 두 배 이상이었다.

    본격적인 폭탄주의 등장은 1980년대부터
    서양의 역사에서 보면 본격적인 폭탄주 레시피는 바로 위스키와 맥주이다. 영국의 산업혁명 시절, 퇴근한 노동자들이 싼값에 빨리 취하기 위해 마시던 것이다. 의외로 한국에서의 이 조합은 법조계과 군에서 탄생을 했다. 바로 빨리 취하기 위해 맥주 잔에 위스키를 넣어 마셨다는 것이다. 이에 이것을 순하게 하기 위해 맥주를 넣었다는 것이다. 결국 한국의 진짜 폭탄주의 시작은 상명하복과 군대문화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소맥의 첫 이름은 통폐합주
    한국의 대표적인 폭탄주 소맥은 언제부터 생겼을까? 일반적으로 IMF 이후라고 보는 견해가 많다. 위스키, 맥주라는 고급 조합을 구성하기가 어려워 위스키 대신 소주를 넣었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하지만 의외로 소맥은 위스키와 맥주의 조합보다 빨리 탄생했다. 1980년대 정부에 의해 강제적으로 언론통폐합이 될 때 생겨났다. 해고된 언론인들이 통폐합이라는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빗대어 소주와 맥주를 섞어서 마신 것이 시작이었다. 당시에 이 술의 이름은 소맥이 아닌 통폐합주라 불렸고, 결국 마셔서 없애버리겠다는 웃픈 현실을 나타낸 술이기도 하다.
    참고로 술을 섞고 수저 등으로 내리치는 이유는 도수가 서로 다른 두 술이 섞일 경우 도수가 높은 쪽이 아래에 깔리기 때문에 수직으로 충격을 주면 아래에 깔린 술이 충격에 의해 위로 올라가며 섞이는 효과가 있긴 하다. 다만 깨지는 경우가 있어서 가볍게 섞어 주는 것이 맞다.
    참고로 일본에서도 소맥과 비슷한 주류가 있다. 바로 보리 음료인 호피에 소주를 섞어 마시는 것이다. 25% 정도의 소주를 5배 정도로 희석하면 5% 전후의 맥주 유사 술이 탄생한 것이다.

    외국에서는 보일러 메이커, 밤(Bomb) 등으로 불려
    외국에서는 이렇게 술과 술을 섞거나 이온음료를 섞은 술을 ‘밤(Bomb)’ 또는 ‘보일러 메이커’라고 부른다. 모두 쉽게 취하고 폭탄이 터질 듯하게 금방 취한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실은 잘 섞이라고 손으로 내려치던 소리가 폭탄(Bomb) 같아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주장도 있다.

    시대상을 반영하는 술 문화
    술은 당시 시대 상을 반영한다. 맥주가 등장하기 시작한 시대의 비탁, 언론 통폐합시기에 저항하는 의미의 통폐합주, 산업혁명 시기의 영국의 보일러 메이커 등 시대에 따라 변하며, 사람들이 추구했던 것이 무엇인지 유추할 수 있게 만든다. 확실한 것은 폭탄주란 이름의 술은 어느 하나 밝은 것이 없다. 그저 현실을 도피하거나 상사에 명에 따르기 위해 빨리 마셨고, 빨리 취하기 위한 레시피였다. 그래서 이 술에는 농민의 땀도 땅의 기운도 지역의 문화도 느끼기 어렵다. 폭탄주에 술의 영혼이 없게 느껴지는 것은 바로 이러한 부분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 '웃픈' 역사를 반영하는 한국의 술, 폭탄주
    명욱 전통주 갤러리 부관장, 주류문화칼럼니스트
    일본 릿쿄(立教)대학교 사회학과 졸업. 일본 나스닥 재팬 상장기업에서 아시아 투자담당을 맡았었다. 10년전 막걸리 400종류를 마셔보고 데이터베이스로 만들어서 포탈사이트에 제공하면서 본격적인 주류칼럼니스트로 활동한다. 가수겸 배우 김창완 씨와 SBS라디오 '아름다운 이 아침, 김창완입니다'에서 전통주 코너를 2년 이상 진행했으며, 본격 술 팟캐스트 '말술남녀'에도 고정 패널로 출연하고 있다. 최근에는 O tvN의 어쩌다어른에서 술의 역사 강연을 진행했다. 명욱의 동네술 이야기 블로그도 운영중이며, 저서로는 젊은 베르테르의 술품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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