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의료기기 도입 현황과 확산을 위한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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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팬데믹 이후 많은 병원이 ‘스마트병원’으로의 전환을 선언했다. 감염병 대응을 계기로 비대면 진료, 원격 모니터링, 데이터 기반 의사결정의 필요성이 부각되면서 디지털 전환은 더 이상 선택이 아닌 과제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영상 판독 보조 소프트웨어, 연속 모니터링 기반 웨어러블, 임상 의사결정지원 시스템(CDSS) 등 다양한 디지털 의료기기 개발 논의가 본격화했고, 의료 현장에서도 도입이 시작됐다.
그러나 의료 현장 전반에서 이러한 변화를 똑같이 체감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디지털 의료기기 도입이 주로 대형 병원과 연구·실증 중심으로 진행되면서, 1차 의료기관과 일반 의료 이용자의 체감은 여전히 제한적인 상황이다.
의료 전문 매체 메디게이트가 전국 의사 1,043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조사(2025년 6~7월)에 따르면, 의료기관의 AI 솔루션 도입률은 19.3%에 그쳤다. 전체 의료기관 가운데 5곳 중 1곳만이 디지털 기반 의료기기를 실제로 활용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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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에 먼저 안착한 디지털 의료기기의 공통점
도입된 기술의 유형을 보면 병원의 선택 기준이 보다 분명해진다. AI를 도입한 병원 중 영상 판독 보조 소프트웨어를 활용하는 비율은 73.9%로 가장 높았고, CDSS는 27.2%에 그쳤다. 어떤 기술이 먼저 자리 잡았는지, 그리고 무엇이 아직 문턱에 머물러 있는지가 드러난다.
식약처 허가 동향 역시 이를 뒷받침한다. AI 의료기기 허가 건수는 2022년 47건에서 2023년 64건, 2024년에는 108건으로 급증했다. 2023년 9월 기준 누적 허가 186건 중 약 74%가 영상의학 분야에 집중됐다. 허가 구조 자체가 영상 판독 중심으로 형성돼 온 셈이다.
영상 판독 보조 소프트웨어의 공통점은 명확하다. 기존 검사·판독 과정에 ‘참고 정보’를 추가하는 방식으로 작동하며, 진료 흐름이나 책임 구조를 크게 바꾸지 않는다. 의료진의 최종 판단을 대체하지 않고 보조하는 형태다.
연속 모니터링이나 생체신호 분석 기기 역시 비교적 빠르게 도입된 영역이다. 중환자실이나 만성질환 관리 과정에서 환자 상태를 지속적으로 관찰하는 데 활용되고 있다. 다만 이들 기술도 주로 ‘이상 신호 감지’에 머물며, 실제 임상 개입으로 이어지는 방식은 병원마다 차이를 보인다.
반면 CDSS나 재입원·악화 예측 모델처럼 의료진의 판단 시점과 개입 여부를 직접 요구하는 기술은 도입 문턱이 높다. 이는 기술의 정확도보다, 진료 흐름과 책임 구조에 미치는 영향이 더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운영 체계가 따라가지 못하는 기술 확산
디지털 의료기기 확산의 병목은 기술 자체보다 병원 운영 구조에 있다. 한국보건산업진흥원이 정리한 의료 AI 병원 적용 사례에서도 전자의무기록(EMR) 연계 부족과 결과 확인·조치 주체의 불명확성이 주요 장벽으로 제기됐다.
디지털 의료기기가 생성하는 알림과 분석 결과가 늘어나면서, 의료진이 추가로 판단해야 할 지점이 오히려 증가하는 역설도 나타난다. 기술이 결정을 줄이기보다 새로운 판단 부담을 만드는 구조로 작동하는 경우다.
기술이 제시한 결과를 누가 확인하고, 어떤 기준으로 기록하며, 문제가 발생했을 때 책임을 누가 질 것인지에 대한 병원 차원의 합의가 없는 상황 역시 확산을 가로막는다. 이 기준이 정리되지 않으면 디지털 의료기기는 ‘참고용 도구’ 이상의 역할을 하기 어렵다.
대형 병원 중심 도입, 격차는 여전
디지털 의료기기 도입은 병원 규모에 따라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메디게이트 조사에서 상급종합병원의 AI 도입률은 25.4%, 종합병원은 24.1%로 전체 평균을 웃돌았다. 반면 의원급 의료기관은 평균을 크게 밑돌았다.
이 격차는 기술 인식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 조건에서 비롯된다. 대형 병원은 서버와 전담 인력, 시스템 통합 역량을 갖추고 있지만, 중소병원과 1차 의료기관은 초기 비용 부담과 EMR 연동 문제를 동시에 감당해야 한다. 실증 사업 이후 실제 진료 현장으로 확산하는 경로가 제한적인 점도 격차를 고착시키는 요인이다.
자동화가 아닌 의사결정 구조의 변화
디지털 의료기기 도입이 곧 진료 자동화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위험도 예측이나 이상 신호 탐지는 가능해졌지만, 약물 처방이나 추가 검사, 외래 추적 여부는 여전히 의료진의 판단 영역에 남아 있다.
오히려 디지털 의료기기는 의료진에게 ‘언제 개입할 것인가’를 새롭게 판단하게 만든다. 기술이 의료진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의사결정이 이뤄지는 구조를 재편하는 셈이다.
병원이 디지털 의료기기에서 기대하는 것도 여기에 있다. 더 많은 기능이나 복잡한 알고리즘이 아니라, 불필요한 판단 부담을 줄이고 근거 중심의 결정을 가능하게 하는 구조다. 이를 위해서는 EMR과의 자연스러운 연동, 결과 확인과 개입 주체의 명확화, 진료 흐름을 과도하게 흔들지 않는 설계가 전제돼야 한다.
확산의 관건은 기술 아닌 시스템
디지털 의료기기는 이미 병원에 들어왔다. 허가 건수는 빠르게 늘고 있고, 일부 병원에서는 활용 경험도 축적되고 있다. 그러나 전체 의료기관의 5분의 1만이 디지털 의료기기를 활용하고 있고, 그마저도 영상 판독 보조에 집중돼 있다는 현실은 분명하다.
확산의 관건은 새로운 기술의 등장이 아니라, 의료 시스템이 이를 어디에 배치하고 어떻게 운영할 준비가 돼 있는가에 있다. 영상 판독 보조 AI는 기술 자체보다 병원 시스템에 부담 없이 편입될 수 있었던 구조 덕분에 빠르게 확산했다. 반면 CDSS는 기술 문제가 아니라, 운영 방식과 책임 구조가 정비되지 않은 구조적 한계가 확산을 가로막고 있다.
에이지테크의 다음 단계는 새로운 기기의 등장이 아니라, 의료 의사결정 구조와 병원 운영 방식의 재설계에 가깝다. 디지털 의료기기는 의료진을 대체하지 않는다. 대신 의료가 결정을 내리는 방식을 바꾼다. 이 변화가 의료 전달체계 전반으로 확산할 수 있을지는, 결국 의료 시스템의 운영 방식과 제도적 준비에 달려 있다.
※ 본 기사는 디지틀조선일보 창립 30주년 특집 ‘에이지테크 시리즈’의 일환으로 작성되었습니다.
- 김정아 기자 jungya@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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