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 진단이나 기억력 저하가 없는 뇌전증 환자에게서도 신경퇴행과 관련된 변화가 나타날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뇌전증 환자의 뇌에서 타우(tau) 관련 PET 신호가 건강한 사람보다 높게 나타났으며, 혈액 단백체를 기반으로 추정한 전신 노화와도 연관성을 보였다.

서울대병원 신경과 이상건·주건 교수와 핵의학과 최홍윤 교수 연구팀(제1저자 임상유전체의학과 홍상빈 임상강사, 중환자의학과 신용원 교수)은 치매 진단이나 주관적 기억 저하가 없는 뇌전증 환자 75명과 건강한 대조군 47명을 분석한 결과 이같이 나타났다고 밝혔다.

이번 연구 결과는 국제 학술지 ‘Brain’ 온라인판에 게재됐다.

타우는 정상적으로는 뇌세포 안에서 세포 골격을 지탱하지만, 비정상적으로 변형·축적되면 알츠하이머병 등 신경퇴행질환에서 나타나는 병리와 관련된다. 그동안 동물실험과 환자 뇌 조직 분석에서 뇌전증과 타우 변화의 연관성을 시사하는 결과가 나왔지만, 치매가 없는 뇌전증 환자의 생체 내에서 이러한 변화가 나타나는지는 충분히 규명되지 않았다.

연구팀은 2021년부터 2024년까지 서울대병원 뇌전증 클리닉을 방문한 환자를 모집해 타우·아밀로이드 관련 지표와 혈액 단백체 등을 분석했다. 전체 연구 대상 가운데 타우 PET 검사는 뇌전증 환자 32명과 대조군 24명이 받았고, 이 중 뇌전증 환자 20명과 대조군 7명은 아밀로이드 PET 검사도 받았다.

뇌전증 환자와 건강한 대조군의 뇌 타우 PET 영상 비교. 치매가 없는 뇌전증 환자군(위쪽)은 건강한 대조군(아래쪽)보다 대뇌 피질 전반에서 타우 관련 PET 신호가 높게 나타났다. /서울대병원 제공

분석 결과, 뇌전증 환자는 대뇌 피질 전반에서 타우 관련 PET 신호가 대조군보다 유의하게 높았다. 차이는 특히 전두엽에서 두드러졌으며, 연령과 성별, 교육 연수를 보정한 뒤에도 대부분 뇌 영역에서 유의성이 유지됐다. 반면 알츠하이머병의 또 다른 주요 병리인 아밀로이드 PET 신호는 두 그룹 간 유의한 차이가 없었다.

혈액 검사에서는 인산화 타우(p-tau217)가 정상 상한을 넘은 비율이 뇌전증 환자에게서 24%로 대조군의 5%보다 높았다. 다만 두 그룹의 평균 p-tau217 수치 자체에는 통계적으로 유의한 차이가 없었다.

타우 관련 PET 신호는 뇌전증의 일부 임상적 특성과도 연관성을 보였다. 뇌 여러 부위에서 비정상 전기 신호가 나타나는 다초점 뇌전증모양 방전은 타우 관련 신호 증가와 가장 강한 연관성을 보였으며, 다중 비교 보정 후에도 유의성이 유지됐다. 뇌파가 느려지거나 청소년기까지 발작이 지속된 환자에게서도 신호가 높은 경향이 나타났지만, 일부 연관성은 다중 비교 보정 후 유의성을 유지하지 못했다.

한쪽 뇌에서 발작이 시작되는 환자에게서는 발작 시작 부위와 같은 쪽에서 타우 관련 신호가 더 높은 경향이 나타났다. 뇌전증 원인별로는 뇌염 이후 발생한 뇌전증 환자에게서 평균 신호가 가장 높은 경향을 보여, 연구팀은 염증과의 연관 가능성도 제시했다.

연구팀은 혈액 단백체를 기반으로 장기별 생물학적 나이를 추정하는 알고리즘도 적용했다. 그 결과 뇌전증 환자는 대조군보다 뇌·신장·근육·췌장과 전신의 생물학적 나이가 높은 것으로 추정됐다. 뇌와 심장, 근육의 생물학적 나이 차이는 일부 뇌 영역의 타우 관련 PET 신호와 양의 연관성을 보였다.

또 타우 관련 신호와 연관된 혈액 단백질을 분석한 결과, 미토콘드리아 기능과 산화 스트레스, 면역 반응과 관련된 경로가 확인됐다. 연구팀은 뇌전증 환자의 타우 관련 변화가 에너지 대사와 산화 스트레스뿐 아니라 면역 반응과도 연결될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다만 이번 결과가 뇌전증이 알츠하이머병이나 치매로 이어진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번 연구에서 관찰된 PET 신호를 실제 타우 축적이나 신경퇴행의 직접적인 증거로 단정할 수도 없다. 연구에 사용된 타우 PET 추적자 플로르타우시피르는 알츠하이머병의 타우를 표적으로 개발됐으며, 다른 형태의 타우에는 결합력이 낮다. 또 반응성 신경교증 등 타우 이외의 변화가 PET 신호 증가에 일부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도 있다.

연구팀은 향후 타우 PET이나 혈액 지표가 뇌전증의 질병 부담과 뇌 퇴행성 변화를 평가하는 바이오마커로 활용될 가능성을 제시했다.

이상건 교수는 “치매 증상이 없는 뇌전증 환자에게서 타우 관련 PET 신호가 예상보다 뚜렷하게 나타난 점이 인상적이었다”며 “타우 PET이 향후 뇌전증 환자의 치매 위험과 뇌 퇴행성 변화를 평가하는 도구로 활용될 수 있을지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주건 교수는 “뇌전증이 단순한 발작 질환을 넘어 뇌 단백질 변화, 나아가 전신 노화와도 연결되어 있음을 실제 환자의 뇌 영상과 혈액 분석으로 확인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고 말했다.

이번 연구는 단일기관에서 수행된 횡단면 관찰연구로, 뇌전증과 타우 관련 변화 및 전신 노화 사이의 인과관계를 확인한 것은 아니다. PET 촬영 대상도 뇌전증 환자 32명과 대조군 24명으로 제한적이며, 연구 대상자에 대한 정밀 인지기능 평가도 이뤄지지 않았다. 연구진은 대규모 다기관 장기 추적 연구와 상세한 신경인지 평가를 통한 추가 검증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한편, 이번 연구는 한국연구재단과 범부처전주기의료기기연구개발사업의 지원을 받아 수행됐으며, 저자들은 논문에서 이해상충이 없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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