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두 텐푸국제공항/서미영 기자

비행기가 착륙하는 순간부터 청두는 자신이 어떤 도시인지 숨기지 않는다. 청두 텐푸국제공항 곳곳에 판다 조형물과 판다 캐릭터가 자리를 잡고 여행객을 맞이한다. 수하물을 찾는 컨베이어 벨트 옆에도, 면세구역 출구에도, 공항 로비 한복판에도. 인천에서 비행기로 4시간, 도착한 곳이 어딘지를 공항이 직접 나서서 알려주는 셈이다.

예로부터 '천부지국(天府之国)', 즉 풍요의 땅이라 불려온 쓰촨성의 성도 청두는 유네스코가 지정한 아시아 최초의 미식 도시이자 중국 야생 판다의 72%가 서식하는 판다의 수도다. 삼국지 촉한의 수도로 수천 년의 역사를 품었으면서도 타이쿠 리와 춘시루로 대표되는 현대 소비 문화의 최전선이기도 하다. 화끈한 마라와 여유로운 찻집 문화가 공존하고, 고대 사원과 명품 부티크가 골목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는 도시. 4박 5일 쓰촨 여정의 베이스캠프로 삼은 곳은 더 세인트 레지스 청두(The St. Regis Chengdu)였다.

100년 유산의 럭셔리 환대 ‘세인트 레지스 청두’
세인트 레지스는 메리어트 본보이 포트폴리오 안에서도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최상위 럭셔리 브랜드다. 1904년 뉴욕 5번가에 보자르 양식의 호텔을 처음 연 존 제이콥 애스터 4세가 세운 이 브랜드는, 개인 맞춤 서비스와 버틀러 서비스를 브랜드의 핵심으로 100년 넘게 이어왔다. 전 세계 60개 이상의 지점을 운영 중인 세인트 레지스가 청두에 자리를 잡은 것은 2014년으로, 세인트 레지스 뉴욕이 문을 연 지 정확히 110주년 되는 해였다.

더 세인트 레지스 청두 전경

호텔은 톈푸 광장과 춘시루 쇼핑 거리에서 도보로 이동 가능한 청두 도심에 자리한다. 1층부터 29층까지 전층이 호텔 전용 공간으로, 아파트나 오피스가 섞이지 않은 독립 건물이라는 점도 눈에 띈다. 호텔 전체를 관통하는 디자인 언어는 20세기 초 뉴욕의 빌딩 숲을 연상시키는 '아르데코(Art Deco)' 양식이다. 화려한 클래식 감성에 대칭 구조와 선명한 직선미를 더한 것이 특징으로, 주로 대리석과 매끄러운 스틸 소재가 쓰인다. 실제로 로비에 들어서면 대칭으로 시원하게 뻗은 기하학 문양과 빛을 받아 반짝이는 금속재, 묵직한 대리석이 한데 어우러져 압도적인 품격을 자아낸다.

호텔 객실 화장실 유리에 붙어 있는 판다 스티커/서미영 기자

웰컴 푸드에 담긴 판다 디저트/서미영 기자

그런데 이 격식 있는 공간 사이사이에서 불쑥불쑥 판다가 등장한다. 객실 화장실 유리에 붙어 있는 판다 스티커, 웰컴 푸드에 담긴 판다 모양 디저트, 로비 곳곳의 판다 장식물. 뉴욕풍의 무거운 직선미와 판다의 귀여움이 충돌하지 않고 오히려 서로를 돋보이게 하는 조합이, 이 호텔이 청두라는 도시와 얼마나 잘 맞닿아 있는지를 보여준다.

호텔 27층의 프라이빗 다이닝 레스토랑 윤푸(Yun Fu)

첫날 저녁은 호텔 27층의 프라이빗 다이닝 레스토랑 윤푸(Yun Fu)에서 보냈다. 윤푸는 4개의 독립된 프라이빗 다이닝룸으로만 구성된 공간으로, 각 룸은 12~18명을 수용하며 청두 스카이라인이 통창 너머로 펼쳐진다. 각 룸마다 유럽 영감의 디자인에 르네상스 시대 파스텔 톤을 중국적 문양과 결합한 인테리어가 달라, 네 개의 룸이 저마다 다른 개성을 가지고 있다. 테이블 역시 사전 요청에 따라 중국식 원형 테이블이나 서양식 긴 테이블로 바꿀 수 있다.

호텔 27층의 프라이빗 다이닝 레스토랑 윤푸(Yun Fu)의 쓰촨 스타일의 해산물 훠궈

윤푸에서 가장 주목할 점은 메뉴 전체가 투숙객의 취향에 따라 완전히 맞춤 구성된다는 것이다. 쓰촨, 광둥, 말레이시아 요리부터 프랑스, 포르투갈, 멕시칸까지 원하는 요리 스타일을 최소 24시간 전 사전 예약 시 조율할 수 있다. 이날 저녁 테이블에 오른 것은 쓰촨 스타일의 해산물 훠궈였다. 27층 통창 너머로 청두 야경이 내려다보이는 자리에서, 마라의 얼얼한 향과 함께 밤이 깊어갔다.

세인트 레지스의 '이브닝 리추얼' 샴페인 세이버링을 선보이고 있다./서미영 기자

식사가 무르익을 즈음 버틀러가 샴페인 병을 들고 나타났다. 칼을 세워 병목을 따라 단번에 올려치자 코르크와 병 윗부분이 함께 날아갔다. 이것이 세인트 레지스의 '이브닝 리추얼', 샴페인 세이버링(Champagne Sabering)이다. 사브라주(Sabrage)라고도 불리는 이 기술은 나폴레옹 기병대가 전투 승리를 축하하며 말 위에서 군도로 샴페인 병을 땄던 데서 유래한다. 1904년 존 제이콥 애스터 4세가 세인트 레지스 뉴욕을 개관하며 이 전통을 호텔의 저녁 의식으로 도입한 이후, 지금은 전 세계 모든 세인트 레지스에서 매일 저녁 이 의식이 이어진다.

샴페인 병 내부의 5~6기압 압력이 칼의 충격과 만나는 지점, 즉 병목 이음새와 입구 테두리가 교차하는 가장 취약한 부분이 순식간에 분리되는 원리다. 날카로운 칼날이 아니라 충격 자체가 핵심이기 때문에 세이버링용 칼은 날을 세우지 않는다. 한 세기 넘게 이어온 의식이 27층 야경 앞에서 펼쳐지는 장면은, 저녁의 시작을 알리는 하나의 퍼포먼스였다.

올데이 다이닝 레스토랑 소셜(Social)/서미영 기자

4층 올데이 다이닝 레스토랑 소셜(Social)은 바닥부터 천장까지 이어지는 통창으로 자연 채광이 가득 들어오는 밝고 캐주얼한 공간이다. 7개의 오픈 키친과 10개의 메인 푸드 스테이션을 갖추고 있으며 해산물, 스시, 콜드 애피타이저, 피자, 중식, 디저트까지 다채로운 음식을 맛볼 수 있다.

올데이 다이닝 레스토랑 소셜에서는 다양한 조식 메뉴를 선보이고 있다./서미영 기자

유네스코 미식 도시 청두답게, 아침 상차림에도 쓰촨성 고유의 식재료를 활용한 요리들이 빠지지 않았다. 마라의 얼얼함을 아침부터 깨우는 쓰촨 국수, 향신료가 배어든 반찬류, 청두식 아침 누들까지.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메뉴와 지역 고유의 풍미가 한 테이블에 나란히 놓인 구성이었다. 호텔 다이닝의 안락함과 미식 도시 청두의 아침이 자연스럽게 섞여 있었다.

세인트 레지스의 시그니처 칵테일 '블러디 메리'/서미영 기자

호텔 바에서 진행되는 촨 메리(Chuan Mary) 칵테일 만들기는 투숙객이 신청하면 참여할 수 있는 액티비티 중 하나다. 주인공은 세인트 레지스의 시그니처 칵테일이자 청두 지점만의 버전인 ‘촨 메리’였다.

블러디 메리는 세인트 레지스에서 탄생한 칵테일이다. 1934년 세인트 레지스 뉴욕의 바텐더 페르낭 프티오(Fernand Petiot)가 처음 만들었고, 그 이후 각 지점은 현지 풍미를 더한 고유 버전을 선보인다. '촨(Chuan)'은 쓰촨의 약칭으로, 클래식 블러디 메리에 쓰촨 산초 오일(화자오유)과 절임 고추를 더해 재해석한 칵테일이다. 신선한 방울토마토 주스, 프리미엄 보드카 30ml, 쓰촨 페퍼 파우더, 그린 타바스코 소스 3방울, 쓰촨 스위트 간장 3방울이 들어간다.

호텔 바에서 진행되는 촨 메리(Chuan Mary) 칵테일 만들기 액티비티/서미영 기자

수업은 바텐더가 블러디 메리의 탄생 역사부터 차근차근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각 재료를 직접 계량하고 넣으며 본격적인 실습으로 이어졌고, 마지막에는 직접 만든 촨 메리와 오리지널 블러디 메리를 나란히 놓고 비교 시음했다. 쓰촨 산초의 얼얼한 향이 더해진 촨 메리는 입안에서 마라의 기억을 불러오는 맛이었다. 칵테일을 마시는 데 그치지 않고 직접 만들어보는 이 프로그램은, 세인트 레지스가 다이닝과 바 경험에도 일관되게 적용하는 맞춤형 환대 철학의 연장선이었다.

청두 현지인들의 삶을 경험해 볼 수 있는 ‘인민공원’
청두 도심에 자리한 인민공원은 1911년 조성된 공원으로, 화려한 랜드마크 하나 없이 사람들이 모여 시간을 보내는 곳이다. 공원 중심에는 100년 역사의 허밍차관(鹤鸣茶社, Heming Teahouse)이 자리한다. 뚜껑·잔·받침대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 가이완(蓋碗) 찻잔으로 차를 주문하면, 뚜껑을 반쯤 열어두는 것만으로 직원이 알아서 뜨거운 물을 리필해준다.

청두 인민공원에 위치한 허밍차관의 명물인 다예 퍼포먼스/서미영 기자

허밍차관의 명물은 1미터가 넘는 긴 주둥이 주전자로 차를 따르는 다예 퍼포먼스다. 장인이 인상적인 각도에서 가느다란 물줄기를 정확히 찻잔에 꽂아 넣는데, 단 한 방울도 흘리지 않는다. 차를 따르는 행위 자체가 하나의 공연이 되는 순간이다.

허밍차관에서 귀청소하는 사람들/서미영 기자

허밍차관의 또 다른 볼거리는 귀청소하는 사람들이다. 이마에 헤드램프를 달고 작은 금속 도구와 깃털 솔을 든 채 손님 곁에 앉은 이들이다. 중국의 귀청소 문화인 '차이얼(采耳, cǎi ěr)'은 한나라 시대 귀족층의 의식에서 시작해 당나라 때 일반인에게 확산됐고, 명나라 시대에 청두 찻집 문화와 결합하며 이 도시의 대표적인 생활 문화로 자리잡았다. 차 한 잔을 홀짝이며 귀청소를 받는 현지인들의 표정이 이색적으로 보이면서도 더없이 평온해 보였다.

인민공원 안쪽에 위치한 '상친각(相亲角)' 공개 맞선 코너/서미영 기자

공원 안쪽을 걷다 보면 청두에서 유명한 '상친각(相亲角)' 공개 맞선 코너와 마주친다. 스마트폰 없이 즐기는 오프라인 버전의 틴더라고 하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나무 기둥과 철사에는 미혼 남녀의 개인 프로필 종이가 빼곡히 걸려 있다. 성별과 조건에 따라 분류된 프로필에는 나이·키·학력·직업·소득·부동산 소유 여부와 원하는 상대의 조건이 상세히 적혀 있고 하단에는 전화번호와 이메일이 기재돼 있다. 마음에 드는 프로필을 발견하면 적힌 연락처로 직접 연락하는 방식이다. 데이팅 앱이 넘쳐나는 시대에도 이 아날로그 만남의 장이 여전히 사람들로 북적이는 풍경이, 어딘가 청두답고 느긋하다.

쓰촨 레스토랑 마왕즈/서미영 기자

저녁은 미쉐린 1스타 쓰촨 레스토랑 마왕즈(Ma Wang Zi, 馬旺子)에서 마무리했다. 1923년 웨이산의 작은 노점에서 시작해 4대에 걸쳐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어온 쓰촨 요리의 노포로, 미쉐린 1스타를 획득하며 그 명성을 공고히 했다. 1인당 80~120위안 수준으로 미쉐린 레스토랑치고 가성비가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 곳으로, 문이 열리기 전부터 긴 대기 줄이 생기는 것으로 유명하다.

쓰촨 레스토랑 마왕즈의 시그니처 메뉴 '마파두부'/서미영 기자

마라 특유의 향이 공간을 채우는 가운데 마파두부의 섬세하고 부드러운 질감, 수이주뉴로우(水煮牛肉, 매운 고추기름에 삶은 소고기 요리)의 진한 매운 향, 마늘 소스를 곁들인 돼지고기 냉채가 차례로 테이블에 올랐다. 노점에서 출발해 미쉐린 스타까지, 한 세기를 관통한 시간이 한 접시에 고스란히 담겨 있는 듯했다.

IFS(국제금융센터) 건물 외벽을 기어오르는 거대한 판다 조형물/서미영 기자

청두 시내 모습/서미영 기자

식사를 마치고 타이쿠 리 주변을 천천히 걸었다. 1,400년 역사의 대자사(大慈寺)를 중심으로 저층 전통 건축 양식을 살려 조성된 타이쿠 리의 야경이 화려했다. 그리고 그 맞은편, IFS(국제금융센터) 건물 외벽을 기어오르는 거대한 판다 조형물과 마주쳤다. 춘시루 거리에서 올려다보면 판다의 뒷모습이 보이고, 건물 7층 옥상에 오르면 정면을 만날 수 있는 이 조형물은 청두를 찾는 여행자들의 필수 포토스폿이 됐다.

공항 입구에서 여행자를 반기던 판다는 호텔 객실 유리창 위에도, 여정의 마지막 밤을 장식한 현대식 빌딩 외벽에도 있었다. 청두는 처음부터 끝까지 판다로 시작해 판다로 완성되는 도시다. 더 세인트 레지스 청두는 이 유쾌한 로컬의 에너지를 호텔이라는 가장 사적인 공간으로 품위 있게 끌어들였다. 뉴욕에서 건너온 100년 버틀러 서비스의 엄격한 격식 위에 귀여운 판다가 자연스럽게 얹히고, 대리석과 금속이 주는 차분한 직선미 사이로 화끈한 마라 향이 스며드는 곳. 격식과 위트, 전통과 로컬이 정교하게 교차하는 이 이색적인 공존이야말로 청두를 기억하는 가장 완벽한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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