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장애인·가이드 러너 한 팀 이뤄 결승선 향해
가족·연인·시민 함께한 통합 스포츠 축제
하프코스 첫 도입…배려와 공감으로 채운 상암의 하루

“오른쪽으로 조금 방향이 바뀝니다.”
“지금 페이스 아주 좋습니다. 스무 발자국만 더 뛰고 잠시 걸어갈까요?”

13일 오전 서울 마포구 상암월드컵공원 평화광장 일대. 시각장애인 러너와 가이드 러너는 손목에 연결된 작은 가이드 끈 하나에 의지한 채 같은 보폭으로 결승선을 향해 달렸다.

가이드 러너가 코스의 방향과 노면 상태를 설명하면 시각장애인 러너는 그 목소리를 이정표 삼아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갔다. 서로의 손목을 잇는 작은 끈은 단순한 안전 장비를 넘어 함께 달리는 신뢰와 동행의 상징처럼 보였다.

이날 평화광장 곳곳에서는 서로의 눈이 되고 버팀목이 되어주는 풍경이 이어졌다.

장애와 비장애의 경계를 허물고 소통과 화합의 가치를 나누는 통합 스포츠 축제인 제12회 시각장애인과 함께하는 어울림 마라톤 대회가 이날 성황리에 열렸다. 서울시각장애인스포츠연맹이 주최한 이번 대회에는 시각장애인 참가자와 가이드 러너, 일반 시민 등 약 2000여 명이 참여해 평화광장 일대를 따뜻한 축제 분위기로 물들였다.

제12회 시각장애인과 함께하는 어울림 마라톤 대회 개회식에서 관계자가 환영사를 하고 있다. /김경희 기자

올해로 12회째를 맞은 어울림 마라톤은 기록 경쟁보다 동행과 배려에 의미를 두는 대회다. 주최 측은 개회사를 통해 “어울림 마라톤은 경쟁을 넘어 서로가 함께 호흡하고 이해하며 응원하는 화합의 장”이라며 참가자들을 격려했다.

행사장에는 다양한 세대가 함께했다. 어린 자녀의 손을 잡고 나온 가족부터 친구, 연인, 직장 동료들까지 저마다의 방식으로 대회를 즐겼다. 특히 가족 단위 참가자들의 모습이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이들은 함께 걷고 달리며 결승선에서는 서로를 끌어안고 완주의 기쁨을 나눴다.

이번 대회의 가장 큰 특징은 시각장애인과 가이드 러너가 한 팀을 이뤄 달린다는 점이다. 가이드 러너는 시각장애인 참가자의 이동과 주행을 돕는 동반 주자로, 출발부터 결승선까지 발걸음을 함께한다. 참가자들은 대회 전 사전 교육과 트레이닝 과정을 통해 안전한 주행 방법과 소통 방식 등을 익히며 동행을 준비했다.

참가자들이 출발 전 출발선에서 기념촬영을 하며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김경희 기자

코스 곳곳에서는 가이드 러너들의 역할이 빛났다. 이들은 단순히 길을 안내하는 데 그치지 않고 파트너의 체력 상태를 살피며 속도를 조절하고, 방향과 남은 거리, 노면 상태 등을 수시로 설명했다.

특히 일부 숙련된 가이드 러너들은 체력이 떨어진 파트너에게 “스무 발자국만 더 뛰고 잠시 걸어가자”고 격려하며 페이스를 조절했다. 호흡법과 달리는 자세를 알려주고, 끊임없이 대화를 이어가며 완주를 도왔다. 순위보다 서로의 호흡을 맞추며 결승선을 향해 나아가는 모습은 이 대회의 가치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이날 현장에는 다양한 가이드 러너들이 함께했다. 시각장애인 러닝 지원 단체인 VMK 소속 러너를 비롯해 기업 참가자, 자원봉사자, 가족이 직접 가이드 역할을 맡은 경우도 눈에 띄었다. 가이드 러너들은 단순히 길을 안내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파트너의 체력과 호흡을 살피며 보폭을 맞추고, 방향과 거리, 주변 상황을 전달하며 결승선까지 동행했다. 각자의 참여 계기와 경험은 달랐지만, 모두가 한 사람의 안전한 완주를 돕는 든든한 동반자였다.

코스 주변을 가득 채운 응원의 목소리도 대회의 의미를 더했다. 먼저 완주한 참가자들은 뒤이어 들어오는 러너들에게 박수를 보냈고, 시민들은 이름을 부르며 힘을 북돋웠다. 치열한 순위 경쟁보다 서로의 완주를 응원하는 분위기가 행사장 전체를 감쌌다.

시각장애인 참가자와 가이드 러너들이 손목의 가이드 끈으로 연결된 채 함께 코스를 달리고 있다./김경희 기자

대회에 참가한 한 시각장애인 러너는 “평소에는 외부 활동에 참여할 기회가 많지 않은데 이렇게 많은 사람과 함께 달릴 수 있어 감사하다”며 “함께 달린다는 사실 자체가 큰 힘이 된다”고 말했다.

처음 가이드 러너로 참여한 참가자는 “사전 교육을 받을 때는 긴장도 많이 했지만 직접 뛰어보니 누군가를 돕는다는 의미를 넘어 서로 의지하며 함께 완주하는 과정이라는 점이 인상 깊었다”고 소감을 전했다.

올해 대회는 기존 5㎞와 10㎞ 코스에 더해 하프코스(21.0975㎞)를 처음으로 신설했다. 참가자들은 자신의 체력과 목표에 따라 하프코스, 10㎞, 5㎞ 달리기, 5㎞ 걷기 등에 참여했다. 오랜 기간 호흡을 맞춰온 시각장애인 러너와 가이드 러너들은 하프와 10㎞ 코스에서 도전에 나섰고, 5㎞ 코스에는 가족과 연인, 친구들이 함께하며 축제 분위기를 더했다. 빠른 기록을 목표로 한 참가자와 완주 자체에 의미를 둔 참가자가 한 공간에서 어우러지는 모습은 “모두를 위한 스포츠”라는 대회의 취지를 보여줬다.

대회의 선한 취지에 공감한 연예인과 후원사들의 참여도 이어졌다. 배우 이연은 “손을 잇고 함께 호흡하는 진정한 교감의 자리에 함께할 수 있어 뜻깊다”며 “아주 특별한 동행”이라고 말했다.

참가자들이 상암월드컵공원 일대를 달리며 완주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김경희 기자

10㎞ 코스를 완주한 가수 션은 무대에 올라 대표곡 ‘말해줘’ 등을 부르며 참가자들과 호흡했다. 그는 “이번 대회에 함께할 수 있어 뜻깊었다”며 “어울림이라는 이름이 가장 잘 어울리는 대회인 것 같다. 내년에도 더 많은 분들이 함께해 주셨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 밖에도 여러 연예인과 사회 각계 인사들이 현장을 찾아 참가자들을 응원했다.

공동 주관사이자 후원사로 참여한 데상트코리아의 김우리 실장은 “시각장애인 참가자들이 스포츠를 즐기는 기쁨을 마음껏 누리고, 가이드 러너와 참가자들 역시 동행의 즐거움을 경험하는 대회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포털다음을 비롯해 주한독일상공회의소, 핸켈코리아, 베링거인겔하임, TÜV SÜD 코리아, 에버니코리아 등 후원사들도 행사 운영을 지원했다. 행사장에는 식음료와 체험 부스가 마련돼 참가자들의 발길을 모았다.

본도시락이 후원한 도시락 부스에는 완주 후 따뜻한 한 끼를 나누려는 참가자들이 줄을 이었다. 가맹점주들이 새벽부터 준비한 김치볶음밥은 완주의 기쁨을 더했다.

가수 션이 축하 공연을 펼치고 있으며 참가자들이 공연을 즐기고 있다./김경희 기자

이번 대회 참가비 수익금은 서울시각장애인스포츠연맹에 기부돼 시각장애인을 위한 운동 인프라 확충과 스포츠 활동 지원, 생활체육 활성화 사업 등에 사용될 예정이다. 참가자들은 완주와 함께 자연스럽게 나눔에도 동참하며 대회의 의미를 더했다.

올해로 12회째를 맞은 어울림 마라톤은 단순한 스포츠 행사를 넘어 장애와 비장애, 세대와 세대를 잇는 공동체 축제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날 상암월드컵공원을 채운 참가자들의 발걸음은 기록보다 중요한 가치가 무엇인지를 보여줬다.

서로의 눈이 되어 길을 안내하고, 서로의 버팀목이 되어 결승선을 향해 나아간 사람들. 기록보다 소중했던 것은 함께 발맞춰 달린 시간이었다. 이날 어울림 마라톤은 “동행”과 “어울림”이 우리 사회에 던지는 의미를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준 자리였다.

홈으로 이동 상단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