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차 의료의 재설계, 디지털이 마중물이다 ②

반지형 혈압계로 24시간 혈압을 측정하고, 팔에 붙인 센서로 실시간 혈당을 확인하는 시대다. 병원 밖에서 생성되는 의료 데이터의 양은 빠르게 늘고 있다. 그러나 이 데이터가 진료로 이어지는 경우는 드물다. 데이터를 모으는 것과 관리하는 것은 다르기 때문이다. 환자가 일주일 치 혈압 데이터를 들고 진료실에 들어서도, 이를 진료 흐름 안에서 실제로 활용할 수 있는 구조를 갖춘 의원은 많지 않다.

이미지=AI 생성

일차 의료 현장에서 지금 필요한 것은 기술이 아니라, 데이터를 진료 흐름 안으로 끌어들이는 운영 인프라다. 주치의 기능이 작동하지 못하는 이유 역시 이 연결 구조의 부재에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데이터는 어떻게 ‘진료’로 이어지나

데이터가 실제 진료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세 가지 조건이 전제된다.

첫째는 연속 수집이다. 현재 일차 의료는 방문 시점 중심으로 설계돼 있어, 환자의 일상 변화를 지속적으로 반영하기 어렵다. 진료실 방문 시점의 단면 측정이 아니라, 일상에서 생성되는 데이터가 지속적으로 축적되는 구조가 필요하다.

둘째는 진료 흐름과의 연동이다. 현재는 데이터가 존재하더라도 진료 과정과 분리된 채 활용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수집된 데이터가 의료진이 실제로 사용하는 전자의무기록(EMR) 시스템 안으로 들어와야 한다. 데이터가 별도 앱이나 플랫폼에만 머물러 있으면 의료진이 진료 중 이를 따로 확인하기 어렵다.

셋째는 환자 분류와 알림이다. 데이터가 많아질수록, 이를 선별하고 우선순위를 정하는 구조가 없으면 오히려 활용이 어려워진다. 수십, 수백 명의 환자 데이터를 의료진이 일일이 검토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데이터는 의료진이 행동할 수 있는 형태로 정리될 때만 진료로 이어질 수 있다. 위험 수치 환자가 자동으로 분류되고, 관리가 필요한 시점에 알림이 전달되는 구조가 필요하다.

이 세 가지가 갖춰졌을 때 비로소 디지털 헬스 기술은 단순한 측정 도구를 넘어 일차 의료의 운영 인프라로 작동할 수 있다.

현장은 이미 움직이고 있다

데이터를 실제 진료 흐름과 연결하는 시도는 현장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를 실제 진료에 적용하는 의원이 점점 늘고 있으며, 그 방식도 다양하게 발전하고 있다.

A내과에서는 만성질환 관리 플랫폼을 활용해 우선 확인이 필요한 환자를 선별한다. 환자가 모바일 앱을 통해 입력한 혈압·혈당·복약 여부 데이터가 실시간으로 의료진과 공유되며, 수치가 일정 기준을 넘으면 해당 환자가 자동으로 분류돼 의료진의 우선 확인 대상이 된다. 수백 명의 환자를 획일적인 방식으로 관리하는 대신, 즉시 확인이 필요한 환자를 가려내 한정된 진료 시간을 데이터 기반으로 배분하고 있다.

B의원은 반지형 혈압계로 수집한 혈압 데이터를 진료에 활용하고 있다. 해당 기기는 환자의 혈압을 24시간 연속으로 측정하고 시간대별 변화 패턴을 기록해, 야간 혈압 상승이나 가면고혈압과 같은 양상을 일상 데이터로 확인할 수 있다. 이는 기존 진료만으로는 포착하기 어려운 정보를 보완한다.

C의원은 만성질환 관리 플랫폼을 보건복지부의 일차의료 만성질환관리사업과 연동해 운영한다. 환자가 앱을 통해 입력한 혈압·혈당·복약 데이터가 진료 기록 및 행정 처리와 함께 자동으로 처리돼, 의료진이 별도로 데이터를 정리하거나 옮기는 부담이 줄었다. 진료실에서는 의사와 환자가 같은 화면을 보며 누적된 데이터를 함께 확인하고, 수치 변화를 근거로 진료 방향을 설명하는 방식으로 운영 중이다.

제도 변화가 바꾸는 일차 의료

지금까지 데이터를 진료와 연결하려는 시도는 제한적이었다. 진료 구조와 보상 체계가 뒷받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의료진이 환자 데이터를 모니터링하고 관리하는 행위에 대한 수가가 없었고, EMR 연동도 원활하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제도 변화와 함께 현장의 흐름도 달라지고 있다. 반지형 혈압계가 건강보험 급여 적용을 받으면서 도입 문턱이 낮아졌고, 만성질환 관리 플랫폼도 일차의료 만성질환관리사업 수가와 연동되면서 환자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관리 구조가 실제 진료 현장에서 작동하기 시작했다.

운영 인프라가 갖춰진 의원에서는 환자의 상태를 ‘방문 시점’이 아니라 ‘경과 과정’으로 파악하는 방식으로 진료가 변화하고 있다. 환자는 데이터를 통해 자신의 상태를 의료진과 함께 확인할 수 있는 구조가 형성되고 있다. 이와 함께 ‘방문 시점 중심 진료’에서 ‘연속 관리 중심 진료’로의 전환이 시작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환자의 일상 데이터를 진료와 연결하는 기반이 마련될 때 가능하며, 주치의 역할 역시 이 기반 위에서 비로소 작동한다.

다음 편에서는 이 구조를 실제로 적용하고 있는 일차 의료기관의 사례를 통해 심층적으로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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