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민, 웃고 울고 날았다...‘라이프 오브 파이’ [공연뷰]
이 이야기를 믿을 수 있을까? 분명 무대 위에 17세 소년과 호랑이가 있었다. ‘라이프 오브 파이’는 시각, 청각 등 모든 감각을 확장하며, 관객을 이야기의 중심으로 향하게 한다.
‘라이프 오브 파이’는 병원에서 시작한다. 파이는 가족과 함께 캐나다로 향하던 도중, 바다 한가운데서 침몰한 화물선의 유일한 생존자인 17세 소년이다. 그는 이를 조사하러 온 오카모토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얼룩말, 오랑우탄, 하이에나, 그리고 벵골 호랑이와 함께 태평양 한가운데 구명보트에 남게 된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말이다.
‘라이프 오브 파이’는 살아있는 것을 통해 사라진 것을 이야기하고, 그 속에서 종교와 믿음 등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삶과 죽음은 바다 위에서 항상 등을 맞대고 있다. 살아있기 위해서는 먹어야 하고, 먹는다는 것은 또한 어떤 생명을 죽이는 일인지도 모른다. 세 가지 종교를 믿는 파이는 그의 이름인 파이(π)처럼 그 이야기를 통해 끝없는 질문을 던진다. 아마도 보는 이에게 각기 다르게 다가설 질문이다.
‘라이프 오브 파이’가 살아있는 이야기가 되는 데에는 무대에 등장하는 동물들로 인해 비롯된다. 나비, 물고기, 거북이, 오랑우탄, 얼룩말, 하이에나, 그리고 호랑이에 이르기까지, 정교하게 설계된 퍼펫은 그 움직임을 만들어내는 사람, 퍼펫티어의 손에서 생명을 얻는다. 퍼펫티어들은 귀의 움직임부터 꼬리의 움직임까지 모든 움직임을 생생하게 만들어낸다. 파이가 이야기할 때, 그 이야기를 사실로 만들어주는 것은 살짝 움찔하는 호랑이의 귀일지도 모르겠다.
사람이 만들어내는 움직임을 보고 있지만, 점차 퍼펫티어들은 사라지고 동물만이 남는 마법 같은 경험을 이끌어낸다. 섬세함으로 보여주는 역동성, 위력을 시각화하는 무게감 등 동물의 날 것 그대로가 생생하게 닿는다. 호랑이 ‘리차드 파커’가 포효하는 장면에서 움찔하게 된 것은 ‘살아있음’을 실감하는 절묘한 순간이다. 그 어떤 말도 '라이프 오브 파이' 무대 위 동물들의 움직임을 설명하기란 부족하게 느껴진다.
무대 위 감각은 시각에만 머물지 않는다. 파이가 노를 젓는 동작이 진짜 바다 위처럼 느껴지는 건, 물결이 이는 '소리' 때문이다. 배가 앞으로 나가는 미세한 마찰음, 바닷소리, 동물 소리, 시장 소리 등은 장면을 조각처럼 감싸며 감각을 확장한다. 퍼펫과 조명, 그리고 음향은 ‘살아 움직이는 바다’ 그 자체가 된다.
그 중심에 파이 역의 박정민이 있었다. 박정민은 파이 이야기를 들려주는 화자이자 동시에 이야기 속 주인공이다. 파이가 되어 오롯이 쏟아낸 감정은 그를 17세 소년 파이의 이야기로 이끌고 간다. 기존의 연극과 달리, ‘라이프 오브 파이’는 불 켜진 상태에서 마치 영화에서 디졸브(화면이 겹치며 전환되는 것) 되는 것처럼 유기적으로 장면이 전환된다. 병원에서 동물원으로, 동물원에서 화물선으로, 그리고 광활한 바다 위로 이동한다. 심지어 시간이 멈춰버린 듯한 순간까지 무대 위에서 만든다. 모든 도전 같은 순간들을 모두 믿게 만들어버린 건, 무대 위에서 마음껏 웃고, 울고, 날았던 박정민 덕분이다. 박정민은 자신의 몸을 온전히 퍼펫티어에게 내맡겨 몸이 들어 올려지는 순간까지도 '파이' 그 자체로 존재한다. 어쩌면 배우라는 업에서 잠깐의 휴식기를 가진 후, 복귀하는 순간을 무대 위에서 맞은 박정민은 배우로 살아있음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를, 펄펄 끓는 온도로 입증한다.
‘라이프 오브 파이’는 2001년 원작 소설과 2012년 이안 감독의 영화로 이미 전 세계가 경험한 이야기다. ‘라이프 오브 파이’를 무대 위에서 만난다는 것에 물음표가 이어졌던 이유이기도 하다. 17세 소년이 호랑이와 바라본 그 광활한 바다의, 자연의, 삶의 아름다움을 어떻게 무대 위에서 구현할 수 있을까? 그 질문은 곧 감탄이 된다. ‘살아있음’을 직접 감각하게 하는 데에는 무대 이상이 없다. “죽음은 삶을 부러워해요. 삶은 정말 아름다우니까요”라는 파이의 말은 무대에서 표현된 광활한 바다 위 수없이 반짝이는 별들 앞에서 물음표를 무력하게 만든다.
‘라이프 오브 파이’의 최초의 라이선스 프로덕션이자 한국 초연은 오리지널 크리에이티브 팀의 연출을 그대로 따라가는 레플리카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무대·디자인·연출의 틀을 유지한 채 박정민, 박강현 등 한국 배우들이 새 생명을 불어넣는다. 여기에 ‘하데스타운’, ‘레드북’ 등으로 주목받는 박소영이 국내 협력 연출, ‘천개의 파랑’ 등의 작품에서 퍼펫티어를 맡은 정명필이 국내 협력 무브먼트 & 퍼펫 디렉터, ‘명동로망스’, ‘렛미플라이’ 등에 참여한 조민형 작가가 번역 및 윤색을 맡아 완성도를 더했다.
오리지널 각본가 로리타 챠크라비티 OBE(Lolita Chakrabarti OBE)는 "이 작품은 난파된 한 인간이 생존을 위해 거대한 시련에 맞서는 이야기"라며 "사랑과 상실, 투쟁과 두려움, 고통과 미지, 그리고 생존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우리가 나이에 상관없이, 누구나 파이의 투쟁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고 믿는다"라고 작품으로 한국 관객을 만나게 된 소감을 전했다.
포털 사이트에는 ‘뮤지컬’이라고 명시되어 있지만, ‘라이프 오브 파이’는 퍼펫티어와 함께하는, 파이 역시 동물의 한 부분이 되는 퍼포먼스 극에 가깝다. 노래보다 무대 위 모든 섬세한 움직임 하나하나에 마지막 순간까지 숨죽이고 집중하게 한다. 그리고 그 끝에는 파이가 들려주는 두 가지 이야기를 통해 자신을 비춰보게 된다. 이는 오는 2026년 3월 2일까지 GS 아트센터에서 공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