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지난해부터 ‘재외동포 한인 정체성 콘텐츠 사업’의 책임자로 분주한 나날을 보냈다. 그 전부터 필자는 글로벌시장에 대한민국을 알리는 홍보 사업을 펼쳐왔고, 이 과정에서 재외동포는 중요한 현지 홍보 파트너로 늘 관심의 대상이었다. 이번 사업을 통해 필자는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살아가는 재외동포들을 깊이 있게 만날 수 있었다. 지금부터 그들의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바나나 증후군’을 아시나요?

재외동포 사회에서 통용되는 ‘바나나 증후군’이란 말이 있다. 겉은 노랗지만, 속은 하얀 바나나처럼, 재외동포 차세대들이 외모는 한국인이지만, 내면적으로는 현지 사회에 완벽히 적응해 모국 연대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현상을 말한다.

실제로 애틀랜타 중앙일보가 올해 초 실시한 한인 대상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의 53.6%가 정체성 갈등을 겪고 있었으며, 이 중 27%는 한국과 미국 두 문화를 융합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세계 각 지역의 재외동포들이 이민 1세대를 넘어 후속세대로 이양되고 있다. 1세대가 고령화되면서 한인 사회의 중심축이 2·3세대로 이동하고 있는 이 시점에서, 바나나 증후군은 더 이상 개별 사례가 아니라 보편적 현상이다.

해외에선 ‘한국인’ 한국에선 ‘외국인’

재외동포 2·3세대가 마주한 현실은 복잡하다. 거주국에서는 '한국인'으로, 한국에서는 '외국인'으로 여겨지는 이중적 상황 속에서 이들은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다. 한국어 구사 능력이 부족하고, 한국 문화와 역사에 대한 이해가 단편적이며, 모국과의 정서적 거리감이 커지면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명확한 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정체성 혼란은 개인의 문제를 넘어 공동체 전체의 결속력을 약화한다. 한국어를 잃어가는 차세대, 한국 문화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인한 세대 간 갈등, 현지 사회로의 급속한 동화 등은 해외 한인 사회의 지속가능성을 위협하고 있다.

더 나아가 이는 국가의 미래와도 직결된다. 재외동포는 한국의 소프트파워를 확산시키고, 경제적 교류를 촉진하며, 문화적 가교역할을 하는 중요한 자산이다. 하지만 정체성을 잃은 재외동포는 이러한 역할을 수행하기 어렵다. 따라서 한인 정체성 함양은 개인의 행복과 공동체의 결속, 그리고 국가의 미래 발전을 위한 핵심 과제라 할 수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정부는 재외동포청을 중심으로 체계적인 한인 정체성 함양 사업을 추진 중이다. 한글학교 역량 강화 사업 예산을 2023년 141억 원에서 2025년 186억 원으로, 차세대동포 모국 초청연수 사업은 동기 59억 원에서 89억 원으로 확대한 것은 이에 대한 정부의 강한 의지를 보여준다.

‘Before Camp’ ‘After Camp’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차세대동포 모국 초청연수’ 사업이다. 재외동포협력센터가 주관하는 이 사업은 광복 80주년을 맞아 참가자를 지난해 2,000명에서 올해 2,430명으로 확대했다. 만 15~25세 재외동포 청소년·청년들이 6월부터 8월까지 서울과 지방에서 대한민국의 역사·문화·사회·경제를 체험하는 이 프로그램은 한인 정체성 함양의 핵심 사업이다.

차세대동포 모국 초청연수 참가자들이 장기자랑을 선보이고 있다. /사진 제공=재외동포협력센터

호주 시드니 기쁨있는교회 조성용 목사와 그의 아들 조신규 씨(29세)의 사례는 모국 초청 연수의 효과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호주 이민 1세대 조 목사는 현지 사회에서 정체성 혼란을 겪는 아들을 바라보며 깊은 고민에 빠졌다.

“아들이 호주에서 한인으로 살며 많이 혼란스러워했다. 호주 사람도 아니고 한국 사람도 아닌 것 같다고 하며, 이런 고민을 나눌 친구도 없다고 했다”라는 조 목사의 말은 많은 재외동포 가정의 현실을 대변한다.

이에 조신규 씨는 “자신의 삶은 ‘Before Camp’와 ‘After Camp’로 명확히 구분된다”라고 말하며 당시를 회상했다. 그는 “초청연수에서 모국에 대해 더 깊이 있게 알게 됐고, 한국이 더 자랑스러워졌다. 그리고 나와 같은 처지에 있는 친구, 나랑 같은 고민을 하는 친구들을 만나 함께 대한민국의 일원으로 세계에서 여러 모습으로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위로가 되고 힘이 됐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이는 단순한 개인적 변화를 넘어 정체성 함양 사업의 본질적 가치를 보여준다. 한국에 대한 이해 증진, 자긍심 회복, 무엇보다 같은 처지의 동료들과의 연대감 형성은 재외동포 차세대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2025년 1차 차세대동포 모국 초청연수 개회식 참석자들이 태극기를 들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 제공=재외동포협력센터

한인 정체성 함양 사업의 미래

모국 초청연수를 시작한 1998년부터 2024까지 연수 참가자는 12,945명(재외동포협력센터 제공)이다. 전 세계 700만 재외동포를 고려할 때 현재의 규모는 여전히 부족하다. 더 많은 차세대동포가 이러한 기회를 누릴 수 있도록 예산 확대와 프로그램 다양화가 필요하다.

또한 모바일 시대에 맞는 콘텐츠 혁신도 요구된다. 재외동포를 위한 온라인 플랫폼 구축, 정체성 관련 교육 프로그램이 필요하다. 오프라인 초청사업은 규모가 늘어날수록 예산이 증가하는 특성이 있지만, 콘텐츠 사업은 비교적 적은 예산으로 시공간 제약을 넘어 수많은 재외동포에 영향을 미칠 수 있어 유용하다.

재외동포를 대상으로 한 ‘한인 정체성 함양’은 글로벌 시대에 대한민국의 경쟁력을 높이는 핵심 과제이자, 미래 세대를 위한 중요한 투자라 할 수 있다.

디지틀조선일보 글로벌미디어실 정세운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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