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에도 궁합이 있다] 귤과 수탉
한 해의 마지막 달인 12월, 본격적인 겨울로 접어들면 과일이 귀하다. 이때 새콤달콤한 귤이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어릴 때 아버지가 조그만 귤 두 개를 가져오셨는데, 껍질을 벗긴 후 식구 수대로 두세 쪽씩 나눠 먹었다. 그렇게 귀했던 귤이 지금처럼 흔하게 된 것에 감사할 따름이다.
귤은 이미 삼국시대부터 제주(당시 탐라)에서 재배되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특산품으로 궁궐에 진상되었는데, 당시 제주도민에게는 효자가 아니라 오히려 애환의 상징이었다.
《성종실록》에 “제주 사람으로서 감귤나무를 가지고 있으면 수령이 그 결실의 유무를 막론하고 매우 괴로운 징렴(徵斂)을 해대니, 이로 인하여 백성들이 편히 살 수가 없어 오히려 나무를 베고 뿌리까지 잘라버리는 일이 있다고 한다”는 기록이 있다. (성종 20년 2월)
전통 그림에 귤을 소재로 한 그림이 있다. 그림에서의 귤은 어떤 의미일까?
그림 <대길도(大吉圖)>의 주인공은 무엇일까? 한라봉 같기도 하고…, 요즘 귤을 개량한 품종이 하도 많아서 그 이름들을 기억하기도 어렵지만 그림의 주인공은 귤이다. 그 이유는 그림의 제목이 대길(大吉, dàjí)이니 그림의 주인공은 길(吉, jí)과 중국어 발음이 비슷한 큰 귤(大橘, dà jú)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림의 속뜻은 크게 길하기를 바라는, 즉 “행운이 가득하세요!”이다. 이런 까닭에 귤나무가 복을 불러온다는 속설이 생겼고, 많은 사람들이 묘목을 사서 집에서 키우기도 한다.
<계도(鷄圖)>의 주인공은 누가 봐도 수탉이다. 닭 계(鷄, jī)와 길할 길(吉, jí)의 우리말 발음은 다르지만, 중국어 발음이 비슷하다. 그래서 늠름하고 커다란 수탉(公鷄)을 한 마리 그린 그림은 큰 + 수탉 = 대(大) + 수탉(公鷄) = 대길(大吉)이라는 뜻이 된다. 길할 길(吉) 자를 수탉으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꼭 수탉을 그려야만 하고 암탉을 그리면 왜 안 되는지 의문이 들 수도 있다. 그림의 속뜻 ‘대길(大吉)’에 주목해야 한다. 크게 길해지려면 큰 닭을 그려야 하고, 암탉보다는 수탉이 크기 때문에 그림의 뜻을 확실하게 표현하기 위해 수탉을 그린 것이다. 이때 수탉이 입을 다물고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수탉이 입을 벌리고 크게 소리치는 그림은 <공명도(功名圖)>라고 하는데, <대길도>와는 뜻이 다르다. (2024년 6월 5일, <수탉과 명예> 참조)
현실에서는 암탉이 알도 낳고 병아리도 키우고, 수탉보다는 암탉이 갑이지만 전통 그림 속에서만큼은 수탉이 짱이다.
귤 또는 수탉을 그린 그림은 모두 항상 길(吉)한 일만 있기를 바라는 마음의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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