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드리밍, 구교환
“저는 단편영화를 만들었을 때, 성공은 아니더라도, 그게 즐거웠어요. 영화를 만드는 자체가 좋았어요. 아마 모르시는 작품일 거예요. 마음껏 실패했으니까요.”
삶 속에서 ‘간절하게 질주했던’ 규남 같은 순간에 대해 배우 구교환이 말했다. 하지만 그는 '탈주'에서 ‘현상’ 역으로 합류했다. 영화 ‘탈주’는 꿈에 대한 영화다. 규남(이제훈)은 자신의 내일을 스스로 선택하고 싶다는 생각 하나로 북한에서 남한으로 질주한다. 그리고 이를 막아선 북한 장교가 ‘현상’이다. 규남이 너무나 간절한 달리기로 ‘꿈’을 표현했다면, 현상은 꾸었던 꿈을 접어두고 그냥 ‘현실’을 살아가는 그 모습 그 자체가 되었다. 북한이라는 명확한 장소가 등장하지만, ‘탈주’는 그보다 영화는 ‘꿈’과 ‘현실’을 몽환적으로 이야기한다. 그 둘을 선택하는 것이 관객이라는 듯 말이다.
그 중심에서 ‘현실’이 된 것이 구교환이다. 사실 구교환은 ‘꿈의 제인’이나 이옥섭 감독과 함께 연출한 단편 영화 ‘플라이 투 더 스카이’ 등의 작품에서 이미 ‘꿈’을 이야기해 왔다. 어찌 보면, 그도 꿈을 꾸며 살아왔고, 꿈을 살짝 접어두기도 하며 현재까지 걸어왔다. 그런 그는 이날 인터뷰 현장에 명품 브랜드의 옷으로 화려하게 치장하고, 꿈결처럼 자리했다. 더 왜소해진 것 같다는 말에 “저는 유산소 마니아. 그냥 달리는 걸 좋아해요. 쇠 드는 건 좀 힘들고요. 제가 요즘 타바타 운동을 좀 하는데요. 제가 이렇게 쓸데없는 이야기를 합니다”라고 답변을 이어가며 번뜩 인터뷰가 시작됐다.
Q. 영화 ‘탈주’ 시나리오를 보고, 합류를 결정한 이유가 궁금하다.
“심플한데요. 첫 번째는 이종필 감독님과 이제훈 배우님. 두 번째는 현상이의 얼굴이 시작할 때의 얼굴과 끝에서의 얼굴이 다르다. 왜 이 인물의 얼굴이 바뀌는지 궁금했어요. 그리고 이 얼굴을 한 번 도전해 보고 싶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가면을 벗는다는 개념으로 생각하면 될 것 같아요. 끝에서의 얼굴이 사실 현상의 진짜 얼굴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그런 의미에서 보면, 마냥 비극이 아닌 해피엔딩일 수 있겠다 싶어요. 처음 얼굴은 엄청나게 타이트하잖아요. 그런데 끝에서는 셔츠도 좀 풀어져 있고. 제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그런 표정을 지어야겠다고 생각한 건 아니고요. 그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나온 얼굴인 것 같아요.”
Q. ‘관상’의 수양대군(이정재)의 등장 장면 같은 강렬함이었다.
“영화 안에서 ‘규남에게 강력한 장애물을 만들어주는구나’라는 연출적 의도였던 것 같아요. 그런데 그다음 장면에서 반전은 아니더라도 ‘규남아’라고 부르면서 (현상이) 확 다른 분위기로 바뀌잖아요. 그게 이종필 감독님의 연출 의도였겠죠. 규남과 현상의 관계를 보여주는 노출이었다고 생각했어요. 강력하게 등장한 만큼, ‘규남아’라고 부르며 처음 마주했을 때를 위한 빌드업이라고요. 그렇기에 규남과 함께 나누는 장면이라고 생각합니다."
Q. 현상의 캐릭터와 동력을 스스로 어떻게 생각하고 찾아갔나.
“현상의 꿈도 사실 규남만큼 강력했죠. 현상의 꿈은 사실 굉장히 심플해요. 피아노를 치고 싶어 합니다. 피아노만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하지만 여러 이유로 그걸 하지 못하게 된 상황이죠. 그리고 자기가 그 상황을 돌파할 수는 없다고 현실적인 판단을 내렸고, 본인이 계속 자신에게 주입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동료에게 ‘지금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해라’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아요. 사실 자기에게 하는 말이었던 거죠. 규남에게 ‘지상낙원일 것 같아?’라고 하는 말도 그렇고요. 현상의 대사에 많은 힌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상이 포마드로 잘 넘긴 헤어스타일을 하고 계속 핸드크림과 립밤을 바르잖아요. 그게 불안에서 나온 행동일 수도 있겠다 싶었어요.”
Q. 그렇다면, 현상이 규남을 쫓는 동력을 ‘질투’라고 생각했을까.
“질투도 있고, 부럽기도 했겠죠. 그런데 결국에는 이런 생각에 도착했어요. ‘규남이는 결국 현상이가 꾸는 꿈이었구나’라고요. 그리고 송강 배우가 연기한 선우민은 규남이 과거에 두고 온 꿈이고요. 선우민(송강) 자체도 유령 같은 존재라고 생각했거든요. 러시아에 두고 온 유령 같은 존재가 나타나서 현상을 부끄럽게 하는 거죠. 물리적으로 닿을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고, 유령 같은 존재가 건드리고 있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이종필 감독님과 대화 속에서 ‘팅커벨’이라는 표현도 나온 거고요. 그렇다고 현상이 피터팬은 아닌데요. 아마 선우민은 피아노 연주에서 많은 영감을 준 인물이었을 것 같아요.”
Q. 과거 ‘청룡영화상’에서 이제훈이 공개적으로 러브콜을 보낸 이후, 성사된 만남이지 않나. 호흡은 어땠나.
“현상과 규남은 사실 어린 시절부터 전사가 있는 사이잖아요. 저도 사실 (이)제훈 씨 출연작 목록을 지켜보며 오래 봐왔거든요. 그래서인지 첫 장면을 찍을 때도 낯설지가 않았어요. 제가 ‘파수꾼’부터 최근 ‘수사반장’까지 얼마나 (이)제훈 씨의 얼굴을 많이 봤겠어요. 호감이 많아서 빌드업이 되게 쉬웠어요. 대사를 주고받을 때도 어색한 게 없었어요. 정말 현상이 물티슈 장난을 치게 하고 싶은 얼굴을 규남이 가지고 있고. 그래서 처음부터 앙상블이 좋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닐 수도 있지만, 제가 기억하는 제 첫 장면이 자동차 안에서 찍는 장면이었거든요. 관계를 다 보여줘야 하는 장면인데 정말 술술 넘어간 것 같아요.”
Q. ‘유령 같은 존재’를 보여준 배우 송강과의 묘한 무드도 인상 깊었다.
“송강 배우와 저는 직장 동료잖아요. 소속사 나무엑터스 행사 때도 만났고요. 우리 회사가 생각보다 화목하거든요. 행사도 많이 하고, 밥도 많이 먹고요. 그때 멀리서 보면 신기했어요. 어른스럽기도 하고, 소년 같기도 하고요. 제가 송강 배우를 바라보는 시선을 작품에 그대로 옮겼어요. 왜냐면 되게 궁금하고, 송강 배우를 보면 기분이 좋아지거든요. 그런 에너지를 주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제대하면 저랑 한 작품 더 했으면 좋겠어요. 그때는 더 길게.”
Q. 현상과 규남은 각기 다른 지점을 보여준다. 스스로 현상을 어떻게 바라봤나.
“저도 현상 같은 시간을 통과했어요. 저는 모든 사람들이 현상 같은 시간을 통과했을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굉장히 보편적인 감정이라고 생각해요. ‘각자 경험 속에서 현상 같은 일이 있지 않았나요?’ 그래서 보편적으로 다가갔어요. 물론 현상의 상황은 좀 더 살벌하죠. 그런데 우리 역시 무언가에 갇혀있을 때도 있었고, 시스템 안에 갇혀있을 때도 있었고요. 그것에서 벗어나는 게 정말 두려울 때도 있었거든요. 저는 현상과 다른 인물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근데 이건 사실 모두 그렇지 않나요?”
Q. 질주하는 ‘규남’ 같은 순간은 없었나.
“영화를 만들기 시작하는 순간이요. 처음 단편영화를 만들었을 때. 그때 규남 정도의 성공은 아니더라도, 그냥 그게 즐거웠어요. 영화를 만드는 것 자체가 좋았어요.”
Q. ‘제13회 미쟝센 단편영화제’에서 희극지왕 최우수 작품상을 받은 ‘왜 독립영화 감독들은 DVD를 주지 않는가?’를 만들 때 이야기인가?
“아니요. 모르시는 영화일 거예요. 마음껏 실패했으니까.”
Q. ‘꿈의 제인’, ‘반도’, 그리고 이번 작품 ‘탈주’도 그랬고, 도전을 이어갈 때 호평을 얻었다. 하지만 그 호평을 자신의 것으로 생각하기보다 현장의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다.
“제가 연기하고 있지만, 그 장면은 절대 저 혼자 만든 장면이 아니에요. 그런 정서에 맞는 앵글이 있고, 같은 앵글이라도 더 강력하게 보이는 앵글이 있거든요. 영화에서는 그 인물의 성격을 보여주기 위해 조명을 조절하기도 해요. 저는 정말 영화는 팀플레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그걸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해요. 거기에서 저는 그냥 제 일을 하는 거고, 조명팀은 조명의 일을, 촬영팀은 촬영의 일을 하고요. 그 모든 것이 합쳐져 싱크로율이 딱 맞는 순간 ‘탈주’ 속 현상의 에너지가 발산되는 것 같아요. 영화에는 초능력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아요. 준비한 만큼 나오는 일인 것 같아요. 하지만 반대로 우연 같은 일은 일어나기도 해요. 그냥 예를 드는 건데, 갑자기 구름이 해를 가리고 광량이 바뀌면서 무드가 만들어질 수 있죠. 하지만 이런 것들도 프로덕션 준비가 잘 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영화는 약속을 잘 지켜야 하는 작업이거든요.”
Q. 이제는 대중 영화, 시리즈 등 관객, 시청자와 쌓아 올린 필모그래피도 많아졌다. 그 속에서 달리 생각하는 지점이 생겼나.
“책임감은 예전부터 있었습니다. 저는 ‘메기’도 100만 돌파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었고요. 사실 독립영화와 대중 영화를 분리하지 않아요. 어떤 작업이든 지금의 에너지로 하고 있었어요. 그리고 그때의 작업들이 모여서 지금의 저도 똑같아요. ‘메기’를 찍을 때의 마음, 심지어 제 첫 단편영화를 찍을 때의 마음과 에너지의 강도는 똑같아요.”
Q. 올해 많은 이들이 기다려온 감독 구교환의 작품이 촬영에 돌입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지금까지 했던 작업의 연장선이에요. 기대하지 말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알고 계신 작업들의 연장 혹은 또 다른 작업인 거예요. 하지만 정말 열심히 만들 테니까, 나오면 선물처럼 관심 가져 주세요. 저는 만드는 것도 재미있어요. 특히, 편집하는 걸 좋아해요. 제가 편집에 큰 재능이 있답니다. 같이 호흡하는 것도 좋아하는데, 툴 다룰 때 그냥 혼자 컴퓨터 앞에서 하는 것도 재미있어요. 그게 균형이 잘 맞을 것 같아요.”
구교환은 연기할 때나 연출을 할 때나,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에 변함이 없다. 바로 “관객”이다. “관객이 재미있어 할 것”이라고 힘주어 말하는 그의 행보에 어떻게 시선이 가지 않을 수 있을까. 선물처럼 다가올 ‘꿈을 꾸고 있는 구교환’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