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류승룡, 베테랑 배우의 겸손 "이야기꾼의 나라에서 태어나 감사"
올 한 해 가장 성공한 K콘텐츠를 꼽자면 '무빙'을 빼놓을 수 없다. 디즈니코리아의 구원투수로 활약한 '무빙'은 원작자 강풀이 직접 쓴 촘촘한 대본과 조인성, 한효주, 류승룡 등 베테랑 배우, 그리고 연기파 신예들이 합세해 큰 사랑을 받았다.
'무빙'은 초능력자를 소재로, 다양한 인간 군상과 인간성을 그려내 감동을 선사했다. 그 어떤 히어로물에서도 담지 못한 애틋하고 절절한 가족애로 시청자를 웃고 울렸다.
류승룡은 그 한 축을 큼지막하게 맡았다. 그가 연기한 '장주원'은 다쳐도 금방 회복되는 초능력을 가진 인물이다. 과거 안기부 블랙 요원으로 활약하다 황지희(곽선영)를 만나 평범한 가장이 되기로 한 그는 아내와 사별한 후 딸 장희수(고윤정)를 홀로 키운다. 사랑의 힘으로 희생과 인내를 자처한 장주원은 '무빙'에서 가장 입체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극이 진행될수록 시청자는 장주원의 서사에 빨려 들어갔다. 류승룡은 다양한 감정선을 오가는 연기로 '역시'라는 평을 이끌었다. 한창 '무빙'의 인기를 느끼고 있다는 류승룡과 추석 전,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다작 배우인 그는 '무빙'이 공개된 후에도 차기작 촬영으로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공개일마다 챙겨보지는 못했지만 주변의 반응을 통해 인기를 실감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차기작을 촬영 중이라 본방 사수는 못했어요. 주위에서 점점 연락이 왔고, 인스타그램으로도 해외 분들에게 DM이 많이 오는데 저에게 '파파'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런 걸 보면서 '인기가 상상 이상으로 있구나', '작품이 잘 되고 있구나' 느낄 수 있었어요."
지희의 장례식신은 '무빙' 속 명장면으로 꼽힌다. 울지 않고는 배기지 못할 오열신이었기에 많은 시청자의 뇌리에 박혔다. 류승룡은 이 신을 찍으며 구토까지 했다. 그는 몸도 가누기 힘들 만큼 주원의 마음에 몰입했다고 말했다. 자칫 신파로 느껴질 수 있었지만, 주원의 서사를 찬찬히 따라온 시청자라면 그 마음에 공감할 수밖에 없을 터다. 류승룡 역시 이 신을 가장 기억에 남는 신이라고 언급했다. 이 신에 매료돼 '무빙' 출연을 결심했을 정도다.
"일단 보시는 분들이 신파에 대한 거부가 있을 수 있죠. '무빙' 하면서 유난히 오열하는 신이 많았어요. 제가 '7번 방의 선물', '7년의 밤', 심지어 '극한직업', '킹덤'에서도 오열 신이 있었거든요. 감정을 표현하다 보면 최대치에 올라갔을 때 표정이나 소리 같은 건 같은 게 비슷할 수밖에 없어요. 같은 사람이 하는 거니까요. 저는 개인적으로 같은 모습을 보여드리는 점이 힘들었어요. 그래서 '당분간 우는 건 안 해야겠다'하던 중에 '무빙'이 온 거죠."
"강풀 작가님이 처음으로 극본을 쓰셨는데, 원래 그림으로 그리던 분이라 그런지 텍스트를 굉장히 디테일하게 쓰시더라고요. 주신 대본을 끝까지 읽고 나니 '이건 우는 신이 너무 중요하게 배치돼 있다' 싶었어요. 제가 읽기에는 신파라 읽히지 않았거든요. 이 장면에 제 연기 인생을 걸어보고 싶은, 그런 욕심이 생겨서 흔쾌히 출연을 결정하게 됐죠."
'무빙'은 시대를 오가는 서사와 더불어 현실적인 CG와 액션신까지 호평을 받았다. 연기 경력이 다분한 류승룡에게도 '무빙' 현장은 새로움의 연속이었다. 그는 '무빙'이 잘 나올 수밖에 없었던 건 모두 스태프의 노고 덕분이라며 공을 돌렸다. 최종회 시사회를 마친 후 물개박수를 쳤다며 제작진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했다.
"저는 이번 현장을 하면서 스태프들이 히어로라고 생각했어요. 특히 주원이 프랭크랑 싸우는 신에서는 우리나라 스태프들만이 할 수 있는 현장성과 순발력, 그동안의 노하우들이 총망라됐거든요. 저는 그들이 초능력자 어벤져스 같아요.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시도하는 부분이 있었는데 콘티에 없고 준비도 안된 현장이었거든요. 감독님은 부정적인 이야기를 안 해요. '솔루션이 있냐 없냐. 시간이 얼마나 걸리냐'하는 걸 확인하고, 스태프들도 현실적으로 가능한 해답을 내주시죠. 이런 게 다 즉흥적으로 되다니 이건 우리나라밖에 안 된다고 생각해요."
"우리 스태프들이 '무빙'에서 정말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고, 일에 대한 애정도 대단했어요. 소중한 것을 지키려고 하는 그 마음과 열정들, 그것들이 모여 같이 협업했을 때 내는 그 시너지를 현장에서 느꼈고, 작품적으로도 이런 스토리가 잘 녹아져 있었기 때문에 더 잘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류승룡은 이번 작품을 통해 딸을 얻었다. 주원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 딸 희수 역의 고윤정이다. 류승룡은 부녀 호흡을 맞춘 고윤정과의 첫 만남에서 꽃까지 준비했다. 물론 아내 역의 곽선영에게도 선물했다. 그야말로 스위트한 남편이자 아빠였던 류승룡은 처음으로 연기 합을 맞춘 고윤정의 가능성을 극찬하기도 했다.
"저는 윤정 씨를 '밝은 단단함이 있는 배우'라고 표현하고 싶어요. 고윤정 씨가 희수를 해주었기 때문에 주원에게 지희를 대신할 수 있는 충분한 원동력이 된 것 같아요. (고윤정이) 워낙 성격 자체가 긍정적이고 털털하더라고요. 이미 너무나 준비가 된 배우였고, 윤정 배우를 물의 온도로 치면 원래 99도였는데 '무빙'을 만나면서 100도가 된 것 같아요. 협업하는 데 있어서 너무나 좋은 배우였고, 온도가 유지될 수 있는 배우예요. 앞으로가 정말 기대돼요"
그렇다면 현실 속 류승룡은 어떤 아빠일까. 두 아들을 키우고 있는 그는 자신을 '아낌없이 주는 나무'에 비유했다. 덕분에 한창 예민할 시기인 고3, 중3 아들과도 격의 없이 지내고 있다고 말했다.
"제가 아들 둘이 있는데, 애들한테 항상 나무 같은 존재가 되어주고 싶어요. 어릴 때는 뛰어넘고, 나중에는 그늘이 되어주고, 열매를 주고, 결국에는 그 나무를 잘라 집을 지을 수 있게요. 저뿐만이 아니라 모든 부모는 그렇지 않을까 싶어요. 예전부터 저는 그렇게 생각해왔고, 지금 아들들이 고3, 중3인데 아주 친구처럼 잘 지내고 있죠."
극단 활동을 통틀면 연기 경력만 30여 년이다. 2004년 스크린에 첫 데뷔를 한 이후에도 조단역을 맡으며 연기에 대한 끈을 놓지 않던 류승룡. 결국 한국을 대표하는 배우 중 한 명이 된 그는 예나 지금이나 주어진 환경에 감사하는 배우로 존재하고 있었다.
"연기한지 30년 정도 된 것 같아요. 너무나 감사하게도 이렇게 이야기꾼과 기획자가 많은 나라에서 태어난 게 복이죠. '무빙'뿐만 아니라 많은 한국 콘텐츠들이 각광받고 있고, 이런 환경에서 배우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거 정말 감사해요. 예전 같으면 나이 50 넘어서 할 일이 별로 없었을텐데, 계속 무궁무진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 것 같아요. 저도 새로운 것들을 탐구하고 도전하는 그런 배우가 되도록 할게요."
'무빙'을 마친 류승룡은 차기작도 줄줄이다. 촬영을 마친 영화 '비광', '정가네 목장'이 개봉을 기다리고 있고, 현재 영화 '아마존 활명수'는 촬영에 한창이다. '무빙'으로 디즈니+를 휩쓴 그는 내년엔 시리즈 '닭강정'을 통해 넷플릭스로 향한다. 한때 류승룡의 수식어었던 '더티 섹시'에 대한 야망은 없는지 물었다. 자신도 그 모습을 잊고 있었다고 미소 지은 류승룡은 다음 번에는 더티섹시를 고려해 보겠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더티 섹시 매력요? 잊고 있던 모습인데요.(웃음) 사실 배우로서 좀 걱정은 돼요. 액션도 이제 '무빙'보다 더 잘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거든요. 차기작 '닭강정'이나 지금 찍고 있는 '아마존 활명수'도 그렇고 제목만 봐도 웃긴 코미디에요. 당분간은 코미디를 보여드릴 것 같고, 이후에 다시 더티 섹시로 가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