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바다' 닮은 홍수현 "'빨간풍선', 이 어려운 걸 제가 해냈어요"
"'빨간풍선'은 저한테 '어려운 걸 해냈다'는 생각이 들게 한 작품이에요. 어려운 걸 해냈다는 성취감이 있어서 기억에 남을 것 같아요. 난도를 꼽자면, 저에게는 보통 보다 한 단계 위. 5단계 중에 4 정도였다고 할 수 있겠어요. 난도는 높았지만 저에게는 나름대로 잘 맞은 연기였던 것 같아요."
올해로 데뷔 23년 차 배우 홍수현이 막장 드라마의 중심에 섰다. 문영남 작가의 신작 '빨간풍선'에서 20년 지기 절친과 남편의 외도로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는 역할을 소화, 역대급 연기력으로 호평을 이끌었다.
작품의 매력은 문영남 작가 특유의 말맛에 파격적인 소재, 그리고 이것들을 소화해낸 배우들의 열연에 있었다. 덕분에 TV CHOSUN 주말드라마 '빨간풍선'은 매회 시청률 상승 곡선을 타더니, 최종회엔 전국 가구 기준 시청률 11.6%(닐슨코리아)를 기록하며 성료했다. 이는 '결혼작사 이혼작곡' 시즌2에 이어 TV CHOSUN 드라마 2위 성적이다.
작품 종영 전 서울 강남구의 한 카페에서 홍수현을 만났다. '한바다' 역을 소화한 홍수현은 "애초에 시작할 때부터 '시청률 대박 난다' 반응이 있어서 시청률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며 최종회 시청률을 11, 12% 정도라 예측했다. 이는 적중했다.
제작발표회 당시 캐릭터성에 끌렸다고 말한 홍수현. 그는 작품을 처음 받아들었을 땐 캐릭터 설명 몇 줄뿐이었다고 말했다. 캐릭터 서사를 깊게 생각할 것도 없이 '한바다'에 끌렸다. 게다가 여태 해보지 못한 연기였다. 홍수현은 망설이지 않았다.
"모든 배우들이 그럴 것 같은데, 처음에 제안받았을 때는 캐릭터 설명 몇 줄을 보고 선택하게 됐어요. 저 역시 내용이 이렇게 될지 예상을 전혀 못했으나 후반부에 가서 '내가 그래도 은강이에게 응징을 할 수는 있겠다' 싶은 생각은 했죠. 대본이 너무 재밌어서 막장이라는 키워드는 저에게 사라졌어요. '그냥 매운맛 드라마다'라는 생각으로 임했어요."
'빨간풍선'은 가족극을 표방하지만 그 안에 담긴 이야기는 가정환경, 불륜, 상대적 박탈감, 배신 등 다양하다. 그중에서도 '한바다'의 역할은 포용이다. 닥치는 상황을 부정하지 않고 인정하는 대인배다. 모자람 없는 가정에서 자라다 빚더미에 올랐고, 그 와중에 친구와 남편의 외도를 알게 된다. 삶의 모든 게 무너진 상황 속에서도 바다는 꿋꿋이 버텨낸다. 커다란 집이 반지하 월세방이 되더라도 바다는 무너지지 않는다. 오히려 더 단단해진다. 홍수현은 그런 바다가 자신과 닮아있다고 했다.
"사실 이야기며 캐릭터며 와닿는 부분이 많이 없었어요. 바다라는 캐릭터도 이태리 유학 출신 디자이너라 이력이 화려하잖아요. 결국은 아버지가 빚을 남기고 돌아가시고, 엄마도 아프고 정말 고생하는 캐릭터에요. 그럼에도 바다라는 캐릭터가 매력적이었어요. 속은 그런 아픔과 힘듦을 간직했잖아요. 연기적으로 제가 표현할 게 많겠다 싶었어요. 단순히 잘 자란 부잣집 딸이었지만 절친에게 남편을 빼앗기고 그런 감정선을 표현하면서요."
"바다는 순수한 점이 저랑 좀 닮았어요. 저는 그래도 눈치가 빠른 편인데 바다는 그렇진 않은 것 같아요.(웃음) 바다는 어려운 상황도 해내려는 인물인데 제가 그랬어도 꿋꿋이 이겨내려고 했을 것 같아요. 바다의 단점도 있죠. 생각 없이 말을 내뱉을 때가 있잖아요. 그런데 그건 바다가 나쁜 의도로 하는 게 아니고 정말로 순수한 마음에서 그렇게 말하는 거거든요. 바다가 너무 순수해서 은강이에게 상처가 됐을 것 같기도 해요."
한바다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조은강'(서지혜)을 곁에 두며 살뜰히 챙긴다. 가정환경이 어려운 친구에게 호의를 베풀기도 한다. 그 대가로 은강은 바다와 바다의 집안을 케어한다. 그렇게 은강은 바다 옆에서 상대적 박탈감이라는 풍선을 키워간다. 그렇다고 친구 남편을 빼앗고, 친구의 미래가 달린 디자인을 빼돌리는 일이 합리화될 순 없다. 홍수현 역시 공감했다.
"바다가 은강이에게 하는 행동이 좋다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은강이가 남의 것을 탐하는 부분은 선을 넘었다고 생각해요. 극 중에서도 은강이가 자꾸 자기 하소연만 하니까 바다가 은강이 집안 이야기를 하면서 팩폭(팩트폭행)을 하기도 하거든요. 어려운 집안에서 힘든 건 알고 있지만 거기서 뛰어넘어야지 남을 망가뜨리는 건 옳지 않은 거죠."
"상대적 박탈감요? 저도 느껴봤을 수도 있겠지만, 저는 그 문제를 저에게서 찾지 남에게 그걸 전가하거나 하는 사람은 아닌 것 같아요. 환경이 안 좋아도 '내가 딛고 일어나야지' 하는 마인드라 남들이랑 비교하고 싶지도 않고, 비교되고 싶지도 않거든요. 은강이는 주변에서 그 책임을 찾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본인이 극복해야지 어떡해요."
홍수현의 연기력이 폭발한 건 15부 초반부다. 은강과 남편 '고차원'(이상우)의 관계를 애써 모른 척해왔지만, 결국 모든 것이 수면 위로 드러나면서부터다. 이 장면은 '불륜 참교육'이라며 SNS 상에서도 큰 화제를 모았다. 이 부분 대사만 A4용지 6장이 넘었고, 문영남 작가는 토씨 하나 틀리지 않길 바랐기에 더 철저히 준비해야 했다.
"좋게 봐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저도 사실 엄청 열심히 준비하긴 했는데 반응이 더 뜨거웠어요. 14부까지 연기할 때는 답답한 부분이 많았는데, 15부 첫 부분부터 혼자 쏘는 장면이었어요. 아예 혼자였다면 외롭기도 했을 텐데 주변에 다른 배우분들이 '잘한다' 응원을 해주시잖아요. 마치 시청자분들이 응원해 주시는 것 같아서 잘 해낼 수 있었어요."
"대사를 외우는 건 많이 어렵진 않았는데, 이걸 감정이랑 같이 하려니까 되다 말다 하더라고요. 혼자 연습할 때도 감정에 제일 집중했어요. 어떤 감정일까 상상을 하면서요. 절친과 남편의 불륜, 사실 폭발할 수밖에 없는 감정이지만 그 쏟아지는 감정을 절제해야지 하는 생각으로 했어요."
'빨간풍선'은 홍수현이 결혼한 후 처음으로 선보이는 가족극이었다. 부부 생활에 대한 이야기도 주를 이룬 바, 결혼 전과 후 연기적으로 달라진 부분이 있는지 물었다. 신혼 2년 차를 함께 보내고 있는 남편의 반응도 궁금했다.
"결혼 경험이 연기에 큰 도움을 주는 건 사실이지만, 저는 미혼 때도 기혼자 역할을 많이 했었거든요. 내가 결혼해서 이 캐릭터가 더 와닿았다 하는 부분은 없었어요."
"남편요? '빨간풍선' 엄청 좋아해요.(웃음) 엄청 재밌게 보더라고요. 저는 반응을 찾아보는 편이 아닌데 남편이 '주변 반응이 어떻대'하면서 말해줘서 알게 됐어요."
홍수현은 바다처럼 발랄한 매력이 있는 사람이다. 연기 23년 차 다운 노련한 모습으로 스스로를 칭찬할 줄도 알았다. 여태 쉼 없이 다작해온 배우이지만, 아직도 못 해본 역할이 많다고 했다. 자신의 강점을 내세울 수 있는 캐릭터에 욕심을 냈다. 여전히 해보고 싶은 게 많은 소녀 같은 눈빛으로 말했다.
"제 MBTI요? 맞춰보세요.(웃음) 저 ENFJ예요. 설명 보면 완전 저더라고요. 공감 잘 하고 계획적이고요. 그래서 제가 의외로 전문직을 안 해본 것 같아서, 천재 역할 같은 것도 해보고 싶어요. 제 자랑 같지만, 여성스럽거나 재벌 딸 역할 이런 건 많이 해봤으니까 정말 똑똑한 캐릭터도 해보고 싶어요."
"이번에는 사랑을 빼앗긴 역할을 했으니까 이젠 사랑받는 역할도 하고 싶어요. '경찰수업' 때 유도 교수 역할을 했는데 그때도 유도 신을 대역 없이 했거든요. 운동도 자신이 있어요. 더 늙기 전에 또 해보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