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어른이 된 '다음 소희'를 기다리며
소희(김시은)는 특성화고등학교에 다닌다. 그 학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취업률. 취업률을 높이기 위해 담임은 현장실습으로 학생들을 내몬다. 소희는 학교에서 처음으로 대기업 관련 회사로 현장실습을 간 운 좋은 친구였다. "나도 이제 사무직 여직원"이라면서 소희는 설렜다. 그런데 막상 간 곳은 대기업이 직접 관리를 하는 하청업체 콜센터. 그곳에는 이미 높은 파티션 안에서 사람들은 "사랑합니다 고객님"이라며 저마다 통화 중이다. 그곳에서 소희도 다른 사람들처럼 파티션 안에 갇힌 삶을 이어간다. 그리고 점점 고립되어간다.
유진(배두나)은 오랜만에 경찰서로 복직했다. 복직해서 처음 맡은 사건은 저수지에서 숨진 채 발견된 한 소녀의 죽음. 그는 복직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몸풀기로 맡게 된 사건을 남들처럼 쉽게 마무리하지 못한다. 그 죽음 뒤에 있는 진실까지 묻히지 않도록 콜센터, 학교, 그리고 현장 실습을 관리하던 교육청까지 돌아보며 소희의 날들을 되짚는다. 춤추는 것을 사랑했던, 우리의 소희는 왜 죽은 걸까.
‘다음 소희’는 2017년 1월 전주에서 실제로 일어난 사건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 한 통신사의 협력회사 콜센터로 현장 실습을 나갔던 여고생이 3개월 만에 스스로 저수지에 몸을 던진 사건이다. 처음이 아니었다. 앞서 노동착취와 정상적인 임금이 지급되지 않았다는 메모를 남기며 한 직원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후, 같은 회사에서 목격된 두 번째 죽음이다. ‘다음 소희’에서는 이를 이 악물고 고스란히 영화에 옮긴다. 꾸미거나 보태지 않고 현실을 그대로 담아내려는 태도는 '다음 소희'의 가장 강렬한 울림이 된다.
'다음 소희'는 다른 영화와 다른 구조를 선택한다. 기존에 반전 등의 극적인 구조를 중요시한 영화들과 달리, '다음 소희'는 소희 다음 유진이라는 간결한 2막 같은 형식으로 사건을 바라본다. 어린 나이의 소희가 자신의 이야기를 쭉 풀어낸 뒤, 형사이자 어른인 유진이 쭉 그의 뒤를 밟아간다. 오히려 플래시백 등의 효과로 꾸며냈다면, 이를 보는 마음이 조금은 덜 불편했을까 싶을 정도로 영화는 천천히 그리고 담담하고 용기 있게 현실을 담는다. 그리고 그 끝에서 관객은 수많은 질문을 마주한다. 우리는 힘든 '소희'들을 보며 고개를 돌리지는 않았는지, '다음 소희'들이 나타나지 않도록 주시하고 있었는지, 작품 속 대사처럼 '힘든 일을 하면 존중받으면 좋을 텐데, 그런 일이나 한다고 더 무시'한 적은 없었는지 말이다.
현실은 정주리 감독이 실화를 기반으로 한 ‘다음 소희’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지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소희’를 보는 몰입감은 떨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아마도 소희와 유진이 된 배우 김시은과 배두나의 힘인지도 모르겠다. 과거 부조리한 상황에서 머리를 들이받을 정도로 당당했던, 춤을 사랑했던, 소희는 콜센터에 들어간 후, 점차 고립된 모습을 보인다. 말간 웃음부터 발끝에 닿은 햇살을 외면해버리는 그늘진 얼굴까지, 김시은은 첫 번째 파트를 맡아 빈틈없이 이끌고 간다.
김시은의 바통을 배두나가 이어받는다. 배두나는 두 번째 파트를 맡았다. 소희가 죽은 이유에 다가서는 파트다. 배두나는 허구의 인물인 유진을 꾸밈없이 날 것으로 표현해내며 가장 선두에 서서 관객의 마음을 이끌고 간다. 자신의 탓은 없다고, 그 아이가 이상했다고 말하는 직장, 학교, 그리고 교육청 앞에서 유진은 홀로 소리 지르며, 심지어 자기도 모르게 폭력까지 행사하며 맞선다. 그 모습은 그대로 관객의 마음이 된다. 정주리 감독은 그것 역시도 길게 편집하지 않고 깔끔하게 끊어내는 방식을 취해, 다음 서사를 향하는데 무리가 없도록 한다.
사실을 담아내는 연기, 꾸미지 않은 감정,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 섬세한 시나리오와 연출은 ‘다음 소희’를 1초의 지루함도 느끼지 않고 몰입해서 보게 한다. 소희의 이야기 다음, 이를 되짚어가는 유진의 흐름은 두 사람을 묘하게 겹쳐 보이게 한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아이였던 시절을 지나 다다르게 된 건데, 막상 어른이 된 이들은 마치 아이였던 시절이 없었다는 듯이 앞을 바라보며 산다. 눈앞에 보이는 실적을 위해, 조금 더 많은 연봉을 위해, 누군가에게 잘 보이기 위해, 무언가를 '위해서' 사는 것에 과연 '어린 소희'를 돌아볼 자리는 있었는지를 묻는다.
꾸미지 않은 시선이 아이러니하게도 '다음 소희'의 가장 강렬한 한 방이 되는 이유다. 묵직하고 먹먹한 메시지를 온몸과 마음으로 고스란히 받으면서도 체하지 않고, 지치지 않게, 바라보게 한다. 그리고 그 끝에서 관객은 자신만의 타오르는 화두를 마주하게 된다.
영화는 여러 역할을 한다. 어떤 영화는 꿈과 환상을 심어준다면, '다음 소희'는 지나쳤던 현실의 한 부분을 바로 보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고개를 조금만 돌려보면 바로 눈앞에 나타나는 것들, 당신의 가족, 아는 동생이 ’다음 소희‘가 되지 않도록, 그러기 위해서는 당신부터 현실들 바로 보아야 한다는 것을 ’다음 소희‘는 최선을 다해 이야기하고 있다. 힘든 시간을 잘 버텨낸 소희들이 무사히 성장해서, '다음 소희'들이 생기지 않도록 배려깊은 시선을 놓치지 않는 어른이 되기를 기도해본다. 상영시간 138분. 오는 2월 8일 개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