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이병헌 "25살에 겪은 공황장애…'비상선언'을 더 깊게 표현"
영화 '내부자들',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 등 작품마다 이병헌은 "최고의 연기"라는 호평을 들어왔다. 그 호평이 영화 '비상선언'에서도 이어질 예정이다.
'비상선언'은 사상 초유의 항공 테러로 무조건적 착륙을 선포한 비행기와 재난에 맞서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 올여름 유일한 재난 영화이기도 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재난 상황 속에 직면한 사람들을 통해 '재난'보다 '사람'에 더 포커스를 둔 작품이기도 하다.
그 속에서 이병헌은 재혁 역을 맡았다. 재혁은 아토피로 고생 중인 딸아이의 치료를 위해 비행 공포증을 딛고 하와이행 비행기에 몸을 실은 인물이다. 이병헌은 "처음 재혁 캐릭터를 한재림 감독님께 받았을 때, '아주 평범한 딸아이의 아빠이면 좋겠다'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라고 캐릭터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영화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재혁의 전사나 과거의 트라우마 등이 설명이 되는데요. 저는 어쩌면 재혁이라는 인물은 '비상선언'에서 가장 먼저 당황스러움과 공포감, 두려움 등을 표현하는 인물이라고 생각했어요. 비행기에 타는 자체가 이미 재혁에게는 큰 공포이고 불안이거든요. 그래서 작은 것 하나에도 놀라고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지' 생각하며 고개를 빼꼼 내미는 모습이 승객을 대변하는 것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공포를 표현하는 데 실제 경험이 도움이 되기도 했다. 이병헌은 "25살쯤 비행기에서 겪었던 공황장애"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제가 '아름다운 그녀'라는 드라마를 마치고, 25살쯤 미국행 비행기를 탔을 때 처음 공황장애를 느꼈어요. '나는 여기서 죽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너무 충격적이라서, 그 기억을 잊을 수가 없어요. 의사 선생님을 찾는 기내 방송까지 했고, '비행기 좀 세워달라'라고 호소하기도 했어요. 지금은 웃으며 말할 수 있지만, 그때는 정말 힘들고 잊을 수 없는 기억이었죠."
"그런 경험 때문에 재혁을 더 공감했다기보다, 이런 부분은 제가 잘 표현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지금 재혁이 어떤 공포를 느끼고 있는지, 호흡이 어떤지, 어떤 증상인지, 어떤 표정인지 등에 대해 많이 이야기를 나누며 연기했었고요. 그래서 비행기만 타도 두렵고 신경안정제가 필요한 상황인데요. 점점 극단적인 상황으로 점층 되기 때문에 계속 반복되는 공황의 증상이 오고, 약을 또 먹게 되고, 그런 모습이 보일 수밖에 없었고요. 공황장애에 대한 표현들은 이 영화에서 슬쩍슬쩍 보이지만, 그걸 아는 사람으로서 사실적으로 잘 표현하고 싶었어요."
영화 '싱글라이더', '백두산'에서도 아빠 연기를 했지만, '비상선언'에서는 딸을 위해 비행기에 타는 아빠인 만큼 부성애가 드러난다. 실제로 한 아들의 아빠이기도 한 이병헌은 "정말 아들 아빠랑 딸 아빠가 다르더라고요. 딸 아빠를 보면 계속 관찰한 것 같아요"라고 답변을 이어갔다.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어요. '백두산' 때 제 딸로 나온 배우와 '비상선언'에서 제 딸로 나온 배우가 자매예요. 제가 자매의 아빠 역을 다 하게 된 거예요. (웃음) 둘 다 참 좋은 배우들이에요. '이 나이에 어떻게 이런 표현을 할 수 있을까, 이렇게 쿨하게 연기할 수 있을까'라고 놀랄 정도로 좋은 배우가 될 친구들인 것 같아요."
"저도 실제로 한 아이의 아빠인데요. 아빠가 아니라면 부담감도 있었을 거고, 아이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어떻게 안아야 할지 등 여러 고민이 많았을 텐데요. 직접 경험했던 것이 굉장히 큰 확신과 자신감을 줍니다. 다만 저는 아들뿐이라서요. 딸을 가진 아빠가 어떻게 다른지는 주변 사람들을 계속 관찰했어요. 확실히 다른 것 같아요. 놀아주는 방법도 다르고요."
'비상선언'에서 이병헌은 송강호, 전도연, 임시완 등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배우들과 함께 호흡을 맞췄다. 그는 "천군만마를 얻은 것 같은 기분으로 촬영을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라며 강한 믿음과 확신을 밝혔다.
"어떤 작품을 할 때, 결과를 알 수가 없잖아요. 아무리 시나리오가 좋아도, 촬영 과정에서 더 좋아질 수도 있고, 반대의 경우도 있고요. 그런데 일단 함께 호흡하는 배우들이 이렇게 훌륭한 배우들이라면, 자신감이 생긴다고 할까요. 의지할 수 있고, 더 신나게 일할 수 있는 배경이 되는 것 같아요."
"임시완 배우는 영화 속 모습과 달리 정말 굉장히 귀여운 후배예요. 진석(임시완)같은 사람이 현실에 있다면, 정말 두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영화 시작부터 불길한 기운을 주는 캐릭터인데요. 그 기운을 온전히 받아내는 것이 재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임시완 배우가 진석에 맞는 표정과 눈빛으로 잘 해낸 덕분에 더 좋은 케미가 나오지 않았나 생각이 들어요. 개인적으로는 저에게 문자로도 질문을 많이 하고, 가끔 만나서 밥도 먹고 술도 한잔하는 후배입니다."
이병헌은 지난 6월 종영한 tvN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에서 동석 역으로 큰 호평을 이끌어냈다. 제주도의 한 마을을 중심으로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옴니버스 형식으로 담아낸 작품에서 이병헌은 김혜자와의 모자 호흡으로 큰 울림을 선사했다. 그는 "주변에서 '비상선언'이 '우리들의 블루스 같다'라고 말씀해주시는 분도 계시더라고요. 각자의 히스토리가 나온다는 면에서요"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는 사실 스파이나 히어로같이 흔히 접할 수 없는 캐릭터들이 있잖아요. 재벌이나, 킬러 등 상상만을 가지고 하는 캐릭터보다는 진짜 주변에 있을 것 같은, 땅에 발붙이고 살아가는 사람을 연기할 때, 더 확신을 가지고 임하는 것 같아요. 왜냐면, 제가 직접 경험한 걸 가지고 연기하니까요. 그때 더 많이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비상선언'은 눈에 보이지 않는 재난을 담아내며, 팬데믹을 겪고 있는 현재와 가장 맞닿은 눈높이로 관객에게 화두를 던진다. 이병헌 역시 "팬데믹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함께 지내온 시간이었는데요. 묘하게 맞닿은 느낌이 들어서요"라고 공감했다. '비상선언' VIP 시사회에 참석한 이병헌의 아내이자 배우 이민정 역시 깊이 공감하는 반응을 보였다.
"이민정 씨가 현재 촬영 중이거든요. 그래서 올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상황이었는데요. 제가 '그래도 왔으면 좋겠다'라고 했었어요. 다행히 왔더라고요. 그런데 정작 VIP 시사회 현장에서 제가 너무 바빠서 연락할 시간도 없었어요. 나중에 끝나고 보니 이민정 씨가 '내일 촬영인데 눈이 퉁퉁 부어서 어떻게 하냐?'라고 투정 비슷한 문자를 보내왔더라고요."
그리고 '비상선언'이 관객들에게 어떤 작품으로 남을지에 대한 바람을 덧붙였다.
"어떤 게 정답인지는 모르겠어요. 저도 '상대방의 입장이 돼 생각해보자'라고 되뇌곤 하는데요. 팬데믹을 겪으며 느끼는 바도 있지만, '비상선언'에는 여러 인간군상이 나오고, '나라면 어떻게 판단하고 결정했을까'라고 자기를 대입시켜 질문하게 되는 상황이 여러 군데 있는 영화라고 생각해요. 다른 때보다 더 팬데믹을 겪은 후에 보는 건 더 생각이 깊어지고 많아질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