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헤어질 결심' 박해일 "탕웨이 눈빛만 봐도 알아…대화 없어도 OK"
박찬욱 감독이 펼친 로맨스 속에 박해일이 놓였다. 파도같이 일렁이는 사랑의 감정 속에서도 그 움직임을 감추고 숨기는 어른들의 사랑. 박해일은 그런 사랑을 특유의 차분함과 결이 다른 섬세함으로 그려냈다. 우연히 마주한 살인 용의자에게 한순간에 끌리는 눈빛, 첫 만남부터 '같은 종족'임을 알아채는 육감, 그 모든 것을 녹여냈다.
영화 '헤어질 결심'은 박찬욱 감독이 '아가씨' 이후 6년 만에 내놓는 작품이다. 한국에 뿌리를 둔 중국인 여자와, 그 여자에게 걷잡을 수 없이 끌리는 남자의 사랑 이야기를 담았다. 극 중 박해일은 경찰로서 프라이드를 갖고 사는 '장해준' 역을 맡았다. 아내와 주말부부로 살면서도, 경찰이자 남편으로서의 '도리'를 해내는 착실한 인물이다. 그런 그의 세상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의문의 추락사를 당한 한 남자의 아내 '송서래'가 나타나면서부터다.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박해일은 '해준'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한, 그 중간의 모습이었다. 오랜만의 인터뷰가 즐거운 듯 연신 이야기를 내뱉는 박해일의 모습에선 아이같은 천진난만함이 보이기도 했고, 작품 이야기를 할 땐 '해준'이 된 듯 순간의 눈빛이 변했다.
크랭크업 한 지 1년여가 지난 시점에 드디어 개봉을 앞두게 된 소감을 묻자, 박해일은 "반가운 마음뿐이다. 재기한 느낌도 든다"며 감회를 드러냈다. 특히나 작품이 박찬욱 감독과의 첫 만남이자, 중국 배우 탕웨이와의 호흡으로 기대를 모은 바, 흥행에 대한 부담감은 없는지 궁금했다.
"흥행요? 허허. 관객분들이 (팬데믹이 완화되고) 한국 영화를 다시 보게 되셨잖아요. 같은 일을 하는 사람으로서 팬데믹 전과 지금의 상황 차이가 느껴지기도 해요. 지금은 관객분들에게 한국 영화가 우르르 쏟아지게 되는 시기인 것 같아요. (개봉에 관한 문제는) 제 의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일단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서 만나자는 생각이에요. 매 순간 부담은 있죠. 지금까지도 그래왔고요."
'헤어질 결심'은 처음부터 '어른들의 사랑'을 표방하고 나섰다. 박찬욱이 그리는 사랑 이야기인데다 수사극의 테두리에서 그리는 로맨스가 영화 팬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작품은 연신 의뭉스러운 분위기를 끌고 간다. 마치 수사물 속 진실을 찾아내는 스토리처럼, 해준(박해일)을 향한 서래(탕웨이)의 사랑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헷갈리게 만든다. 박해일은 그렇게 사랑을 숨기고 삭히는 두 인물의 방식을 어떻게 이해했을까.
"어른들이기 때문에 그렇게 사랑을 하는 방식이라는 건 아니죠. 저 또한 표현을 할 때 배우가 아닌 입장에서는 직접적인 감정을 드러내기도 하고, 어떤 때는 에둘러 간접적으로 감정을 숨기기도 하고, 알아차리게끔 던지기도 해요. 이 작품은 수사극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멜로가 잘 녹아들어 간, 사이의 작품이잖아요. 박찬욱 감독님의 색깔이 정말 어느 시점에서 화학 작용을 잘 일으킨 작품 같아요. 그런 방식으로 갈 수밖에 없었던 영화고, 제가 연기한 형사가 탕웨이 씨가 연기한 송서래를 대할 때 진심도 있지만 의심을 가져야 하는 입장이다 보니까 그런 구성 때문에 (숨기는) 그런 게 주된 톤으로 가지 않았나 싶어요."
박해일은 이번 작품을 통해 박찬욱 감독과의 현장을 경험할 수 있었다.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감독인만큼 박 감독에게 기대했던 바도 있었을 터다. 박해일은 "박찬욱 감독님은 제 예상과 달랐다"며 박 감독과의 현장을 회상했다.
"우선 예상을 했는데 빗나간 부분은 감독님이 전작에서 해오셨던 영화의 질감들이 관객에게 직접적으로 다가와서 감정에 스크래치를 내는 방식이 주된 거였다면, 이번에는 관객분들이 조용조용히 인물들이 연기하고 있는 주변에 몰래 다가오게 하는 느낌이었어요. 캐릭터가 무슨 감정인지, 어떤 눈빛을 봐야 하는지 그런 부분에서 관객을 끌어오게끔 촬영하신 것 같아서 제 예상과 달랐어요. 박찬욱 감독님의 다른 결이 느껴졌다고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특히나 이번에는 감독님께서 배우들을 캐스팅하고 나서 시나리오를 완성하는 방식을 택하셨기 때문에 배우의 성질을 더 잘 담아주신 것 같아요. 감독님이 배우의 성질을 흡수해 주시고 조금 더 활용해 주시고 한 것 같아서 저는 정말 고마울 수밖에 없었던 작업이었어요. 감독님께서도 제가 하는 연기를 많이 지지해 주셔서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고 하는 기회가 됐어요."
박해일에게 '헤어질 결심'은 여러모로 '처음'이 되는 작품이었다. 박찬욱 감독과의 만남뿐만 아니라 외국 배우를 상대역으로 맞닥뜨린 첫 작품이었다. 한국어가 서툰 탕웨이와의 현장이 어려울 법했지만, 두 사람은 상대역으로서 서로를 알아가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렇게 해준과 서래의 서사를 온전히 펼쳐낼 수 있었다.
"제가 다른 문화권의 배우와 연기한 게 처음이더라고요. 일단은 그 배우와 이 영화 안에서 어떻게 소통할 것인가가 고민이었는데, 탕웨이 씨 자체가 상대의 말에 잘 귀 기울여 주는 배우고, 탕웨이 씨가 감독님과 함께 이야기를 하며 캐릭터를 구축하는 걸 (제가) 옆에서 지켜봤는데, 그런 부분에서 첫 단추부터 제가 얻은 게 많았아요. 한 마디로 귀동냥을 한 거였죠.(웃음)"
"또 하나는 촬영을 하면서 언어적으로 소통의 문제가 될 수 있잖아요. 통역사분이 옆에 계시지만 감정을 다 할 수는 없는 상황이니까 그럴 때 제가 택한 방법은 촬영 중간에 시간이 남으면 함께 산책을 하자고 한 거예요. 그렇게 중간중간 몇 번 같이 산책을 했고, 그런 방식들이 서로에게 도움을 줬다고 생각해요. 서로 촬영 중간중간 컨디션 체크도 하고 힘도 불어 넣어주고, 화이팅도 해주면서 도움을 많이 주고받았어요."
탕웨이와는 언어의 장벽을 넘어 '눈빛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이'가 됐다. 언어적 소통이 어려웠기에 비언어적 소통에 더 힘을 준 덕이었다.
"통역사가 계셨지만 모든 걸 해결해 줄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어요. 서로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통역사를 통해 얘기하는 게 참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고요. 관객이 이 영화를 보실 때 몰입하실 수 있게, 서로 눈빛을 많이 바라본 것 같아요. 오랫동안 곁에 있던 사람은 눈빛만 봐도 알 수 있다고 하잖아요. 초반에는 어렵기도 했지만, 유연하게 대처하고 눈빛을 주고받다 보니, 탕웨이 씨의 배고픈 시기도 적절하게 알게 됐어요. 탕웨이 씨가 배고픔을 못 참더라고요. 눈에 힘이 빠지는 게 보여요. 그러면 간식을 챙겨 먹는 부산한 모습도 보이고요. 대화가 없어도 서로 알게 되는 상황이죠.(웃음)"
서래는 문어적 어휘를 사용하곤 한다. 일상에서 사용하기에 어색한 그 말이 서래의 캐릭터성을 더 단단하게 다진다. 특히 작품 속에선 '붕괴'라는 단어가 주요한 키워드로 등장한다. 두 인물의 관계에 전환점을 맞이하는 중요한 말이다. 그렇기에 연기하는 입장에서도 '붕괴'를 언급하는 신에 더 심혈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가장 어려웠던 신은 '붕괴됐어요'라고 말하는 장면이었어요. 배우로서 '난도가 꽤 높은 신이구나'라는 생각을 염두에 두고 촬영한 신이었고요. 촬영 2~3일 전부터 세트장에서 혼자 리허설도 해봤던 기억이 나요. 그만큼 저에게는 긴장이 된 장면이었고, 촬영을 하고 나서는 정말 속 시원하게 떠나보낸 장면이기도 해요. 저한테는 큰 숙제였던 장면이었거든요. 막상 끝내니 해소된 느낌도 들었어요."
"송서래라는 캐릭터가 가진 언어적인 질감을 감독님이 노리신 것 같아요. 특히나 '붕괴'라는 단어가 어려웠어요. 감정이 잘 전달이 될까 싶었어요. 배우로서 감정을 잘 심고 싶은데, 역시 감독님이 가진 말의 질감이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연기했어요. 해준이의 입장에서 말씀드리면, 자기 직업에 대한 자긍심과 품위, 단단함을 가져가면서 표현하려고 한 거죠. 어떻게 해도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캐릭터가 서래를 만나고, 감정의 파도 속에서 서서히 붕괴되어 가는 그런 캐릭터로 시야를 잡았어요. 그래서 그 붕괴라는 단어는 두 인물 간의 전환점에 선 상황이고, 아주 중요한 단어인 거죠."
박해일은 영화 '헤어질 결심'을 무사히 마친 자신을 다독여주고 싶다고 했다. 22년 차 배우이지만 아직도 자신의 부족함을 느끼고 있다며 겸손해했다. 배우로서 보여준 자신의 공은 뒤로하고 주변인을 챙길 줄 아는 섬세함이 있는 배우였다.
"배우로서 '저'라는 사람을 일로 접근하면 '뭘 가지고 있지?' 싶은 생각을 해요. '나를 캐릭터에서 어떻게 활용하지? 나의 재밌는 부분이 뭐지?'라고 했을 때, 한없이 '아무것도 없잖아' 하는 생각이 매번 들어요. (제가) 부족하다는 얘기죠. 그래서 저라는 사람을 이야기할 때가 가장 민망한 것 같아요. 작품을 할 때는 저라는 배우가 혼자 하는 게 아니라 상대 배우와 제작진들이 모두 같이 해서 빈틈 없이 (작품을) 만드는 거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