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정은 저 | 문학예술

가장 주목받는 작가 황정은의 세 번째 작품집이다. 2012년 봄부터 2015년 가을까지 발표한 8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수록 작품들은 발표할 때마다 갈채를 받으며 유수의 문학상을 휩쓸었다.
강렬한 재미와 고집스런 주장을 장착한 이야기에 떠밀려가는 세상에 은은한 이야기의 영역이 남아 있을까, 근심된다면 '아무도 아닌'이 지키는 길목에 가보길 권한다.
황정은의 소설은 바쁜 세상 이면을 비치고 있는 듯 한가해 보이기도 한다. 고추 따러 시골 갔다가 서울로 돌아오는 '上行', 헤어진 남자의 가족과 함께했던 여행을 회고하는 '상류엔 맹금류'를 읽으면 느슨한 구성의 묘미를 깨닫게 될 것이다. 쉬어가며 천천히 생각해야 할 것이 있다는 걸 자각하게 하는 소설들이 일견 나른하고 일견 침울하지만 급작스레 속도를 올리며 치명적인 울림을 만들기도 한다.
'명실'을 비롯한 여러 작품에 노인이 등장하는 것도 반갑다. 40대 초반의 작가가 30대 후반에 썼을 작품들에서 노인들은 자신들의 삶을 주요하게 발설한다. 수만 권의 책을 남기고 떠난 친구 실리가 한 권의 책도 쓰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는 명실. 한권도 펼쳐보지 않은 책더미에서 그 책 때문에 죽어간 친구를 생각하며 친구가 쓰다만 얘기를 되새겨 글을 쓰기 시작한다. 천천히 다가가 무심코 토해내고 잠잠해진 뒤 진한 여운으로 스며드는 황정은 스타일을 음미해보라. 일상적인 삶 속에서 부대끼고 안도하다가 무심한 목소리로 읊조리는 것들이 이상하게도 우리의 현실과 명징하게 닿아 있다. '누가'의 그녀가 겪는 층간소음 공포는 바로 오늘 겪게 될 나의 일상이다.
8편의 소설이 각각의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서로 닮은 모습으로 조곤조곤 삶을 얘기한다. 황정은만의 문체가 읽는 맛을 느끼게 해준다는 것도 기분 좋은 일이다.
| 추천자: 이근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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