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엔데믹 이후 일본 여행은 '수퍼엔저(円低)'와 더불어 돌풍이 됐다. 일본정부관광국(JNTO)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1월부터 11월까지 일본을 찾은 외국인 방문자 2233만명 가운데 한국인 방문자가 617만명으로 1위를 차지했다. 이처럼 일본 여행이 본격화되면서 랜드마크를 이미 섭렵한 사람들은 소도시(小都市) 여행을 즐긴다. 소도시에서는 대도시에서 경험하기 힘든 아기자기한 매력과 느긋함이 주는 여유를 즐길 수 있는데 최근 소도시 직항편이 늘어나면서 소소한 여행을 즐기려는 이들이 늘고 있다.
일본을 자주 여행했다 해도 카가와현(香川県)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러나 우동과 예술 작품 등에 관심이 있다면 한번쯤 들어 봤을 확률이 높다. 카가와현은 인구 100만명 남짓의 아담한 지역이지만 색깔은 확실하다. 거장의 유명 예술 작품을 볼 수 있고, 아름다운 자연 풍경과 우동을 비롯한 다양한 먹거리가 있다. "느린 걸음, 감성이 꽃피는 곳" 카가와현 가이드북의 제목이 이 곳의 지향점을 말해준다.
카가와현은 일본 최초의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세토내해(瀬戸内海) 국립공원의 중심인 시코쿠의 동북부에 위치하고 있다. 일본에서 가장 면적이 작은 현으로, 많은 섬과 산들이 멋진 경치를 이루고 있다. 카가와현의 명칭은 현청 소재지인 다카마츠시가 속해 있었던 카가와군에서 따온 것으로 향기로운 시내를 뜻하며, 흐르는 물에서 좋은 향이 난다고 하여 이 명칭이 퍼졌다고 한다.
일상을 떠나 언제든 찾고 싶은 일본 시코쿠 지역의 휴양지인 카가와현. 작고 오래된 맛과 멋을 지켜가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은 곳이다. 큰돈 들여 멀리 가지 않더라도 소박하고 한가한 여행으로 행복을 더할 수 있는 곳. 맑은 공기를 마시며 카가와현에 '체크인' 하는 순간, 특별한 힐링 여행이 시작된다.
자연과 문화가 만든 위대한 유산
모르고 지나쳤으면 평범해 보였을 풍경, 그 안에 특별함을 담아 주는 건 이야기다. 세토내해의 섬에 어린이들이 찾아오는 곳을 만들고 싶다 생각했던 당시 후쿠다케 서점의 창업자 후쿠다케 데츠히코 회장은 1989년 유명 건축가 안도 다다오와 손잡고 나오시마 섬 전체를 하나의 미술관으로 재탄생시킨 아트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1992년 베넷세 하우스 뮤지엄을 시작으로 2004년 지추(地中) 미술관, 2010년 이우환 미술관을 차례로 열며 나오시마는 현대 미술의 성지로 거듭났다. 인구는 3000여명에 불과하지만 안도의 건축물과 모네, 제임스 터렐, 잭슨 폴록, 데이비드 호크니, 이우환 등 유명 작가들의 작품을 관람하려는 사람들의 발길이 줄을 잇는다.
페리를 타고 나오시마 미야노우라 항에 접근하면서부터 이 섬이 예사롭지 않다는 점을 직감한다. 항구 앞에 수문장처럼 서 있는 현대미술의 거장 쿠사마 야요이의 '빨간 호박'은 물론 양철 지붕을 얹은 통유리 건축물인 항구 터미널 건물도 하나의 예술 작품이다. 건너편에는 250여장의 스테인리스 망으로 만든 파빌리온이 보이는데 내부로 들어갈 수 있어 멀리서 보면 사람이 둥둥 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착시현상도 흥미롭다. 거장들의 혼이 담긴 위대한 예술 작품을 작은 섬에서 발견하는 쾌감은 말로 설명하기 어렵다. 일상과 예술이 혼합된 공간으로 골목 사이사이에 들어선 아기자기한 가게들도 각각의 특색을 표출하고 있다. 자연과 인간 그리고 문명이 공존하는 섬의 풍경을 보니 마음이 편해지고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세토내해에서 두 번째로 큰 섬인 쇼도시마는 인근 연안의 요충지이자 어업과 조선업이 번성했던 곳이다. 온건한 기후가 빚어낸 자연 경관과 그림 같은 분위기의 건물들이 입소문을 타면서 유명세를 얻었다. 일본의 고즈넉한 시골 풍경이 남아 있어 휴식과 재충전을 원하는 여행자들을 위한 공간이다.. 바다와 하늘이 주는 이국적인 정취, 따뜻한 기후와 풍부한 자연을 가진 이곳은 소박하지만 따뜻한 매력이 있다.
이곳은 일본 올리브 재배의 발상지이자, 최다 생산량을 자랑하는 곳이다. 때문에 올리브를 이용해 먹거리부터 화장품까지 다양한 상품이 생산되고 있다. 특히, 올리브로 만든 토너와 립밤이 인기 제품이다. 쇼도시마에 도착하면 커다란 황금 월계수관이 우리를 맞이하는데 한국인 작가 최정화의 '태양의 선물'이라는 작품으로 올리브 잎을 왕관 모양으로 만들어 잎 하나하나에 사람들의 염원을 가타카나로 새겼다.
일본 3대 계곡으로 손꼽히는 칸카케이(寒霞渓)는 1300만년 전 화산활동으로 탄생한 곳으로 가을 단풍으로 유명하다. 가을에는 빨갛게 물든 계곡을 로프웨이를 타고 즐길 수 있는데 웅장한 기암절벽과, 바위, 나무가 만든 풍경이 경이로움을 선사한다. 정상에 있는 레스토랑 카에데에서 갯장어와 생선회가 포함된 점심 정식을 즐길 수 있다(여행 패키지 이용 시). 또한, 붉은 빛의 단풍 사이다를 맛볼 수 있는데 단풍 진액이 들어간 음료로 달지 않고 청량하다.
초록빛 해변을 끼고 들어선 우라시마 빌리지는 ‘일본의 우유니사막’으로 잘 알려진 치치부가하마 인근에 있는 리조트다. 공항에서 차로 1시간 20분 거리의 조금 외진 곳이지만 그 덕분에 불필요한 모든 것에서 벗어나 온전한 휴식을 즐길 수 있는 숙소다.
이곳은 2021년에 오픈한 신상 리조트로 최대 24명까지 숙박할 수 있는 프라이빗 빌라 3개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35년 전 심은 카가와현의 편백나무를 건축 자재로 사용해 목조 건물 특유의 아늑함과 향기가 인상적이다. 2021년 우드디자인상을 받았으며 전 객실에 바다를 조망할 수 있는 발코니가 있다. 특히, 이곳은 지역 자원 순환 모델 리조트로 카가와현 내 기업, 건축 자재, 인력 등을 활용해 지역 발전에 공헌하자는 취지로 만들어져 그 의미를 더한다.
객실의 퀄리티는 빼어나다. 자연이 고스란히 담기는 채광 좋은 거실에서는 커다란 창문 너머로 세토내해의 수려한 바다를 감상할 수 있다. 또한, 하루에 두 번 간조 때만 건너편 우라시마 신사가 있는 무인도와 이어지는 신비의 바닷길이 모습을 드러낸다.
설렘과 낭만이 있는 핫플레이스
‘밤나무 숲’이라는 의미의 리츠린 공원은 약 400여년 전 에도시대 초기 사누키 지방의 영주인 이코마 다카토시(生駒高俊)에 의해 만들어진 다이묘 정원으로 미슐랭 그린가이드 재팬이 별 3개를 부여한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정원 중의 하나다. 국가에서 지정한 특별명승지 중에서 가장 큰 규모(78만m²)로 4계절 내내 아름다운 꽃을 감상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봄에는 매화와 벚꽃이, 여름에는 창포와 연꽃, 가을에는 단풍, 겨울에는 동백이 공원 전체를 물들인다.
공원의 모든 풍경은 계획되어 만들어졌다. 정원의 설계 자체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주변 풍경이 바뀌도록 구성되었는데 총 1,400여그루의 소나무와 6개의 연못, 13개의 언덕이 시운산(紫雲山)을 배경으로 절묘하게 배치돼 시선을 압도한다. 산책을 하면서 고급 분재 스타일의 기묘한 모양의 소나무가 곳곳에 있는데 "어떻게 이렇게 관리를 잘 했을까"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이 곳의 백미(白眉)는 벚꽃 시즌과 단풍 시즌에 펼쳐지는 야간 라이트업(Light Up) 이벤트다. 가이드와 함께 전통 방식의 배 '와센'을 타고 여유롭게 공원을 둘러볼 수 있는데 공원 곳곳에 호수에 반영된 모습을 볼 수 있도록 조명이 설치되어 있다. 커다란 나무가 호수에 반영된 모습은 호수 안에 다른 세상이 하나 더 있는 느낌이다. 공원 전체를 돌아보려면 약 2시간 정도 소요된다. 시간이 여의치 않다면 남쪽 코스만 돌아보는 것도 좋다.
야시마는 다카마츠시의 동쪽에 있는 지역으로 야시마 절을 중심으로 야시마 산 정상에서 다양한 풍경을 볼 수 있는 전망대가 유명하다. 가장 유명한 전망대는 야시마 절에서 가까운 시시노레이간 전망대이다. 세토내해를 조망하기에 최적의 장소로 다카마츠시의 경치를 낮과 밤 둘 다 매력적으로 내려다 볼 수 있다. 다카마츠와 세토내해, 멀리 데시마까지 조망할 수 있으며 특히 석양과 야경의 명소로도 인기가 많다.
전망대로 가려면 먼저 절을 지나야 한다. '옥도사'라 불리는 야시마 절을 지나다 보면 흰옷과 삿갓을 쓴 관광객을 종종 볼 수 있는데, 시고쿠 오헨로의 길이라 하여 시고쿠 내 4개 현의 88개 사찰을 걷고 있는 순례자들이다. 한편, 2022년 8월, 복합 커뮤니티 공간 'Yashimaru'가 문을 열었다. 세토우치 국제예술제 2022 일환으로 오픈한 이곳은 시시노레이간 전망대와 맞닿은 전망 공간으로 유려한 곡선을 그리는 지붕이 인상적이다. 전망대보다 층고가 높아 세토내해의 섬들과 다카마츠 시가지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카가와현 서쪽, 미토요시에 있는 치치부가하마 해변은 약 1㎞ 길이로 펼쳐진 모래사장과 그 뒤의 섬들이 천혜의 자연경관을 연출한다. 아름다운 경관 외에도 해변이 주목받는 이유가 있다. 볼리비아 우유니 사막에 못지않은 멋진 반영 사진을 남길 수 있다는 점이다. 지난 2016년, 치치부가하마의 반영 사진이 일본 내 관광 사진 공모전에 출품되면서 세계 아마추어 사진가들 사이에서 반영 사진 명소로 입소문을 탔다. 2023년 재팬 트래블 어워드에서 '관광개발부문'을 수상하기도 했다.
완벽한 반영 사진의 비결은 이곳의 지형 덕분이다. 해변 곳곳이 움푹 파인 지형으로, 간조가 되면 모래사장 곳곳에 물웅덩이가 생겨난다. 이 웅덩이가 거울처럼 하늘에 반사돼 우유니 사막과 유사한 풍경을 만들어낸다. 특히 일본 석양 100선 중 하나로 꼽힐 정도로 석양이 아름다운데 해가 지는 일몰 시간과 겹치면 일대는 선명한 노을빛으로 뒤덮여 더욱 아름답다. 자연이 만들어낸 주황색 그라데이션과 빛나는 바다의 조합은 절경이다. 인생샷을 남기기에 최적의 장소로 많은 관광객들이 붐빈다. 오후 간조기 때 바람이 많지 않아 바다가 일렁이지 않기 때문에 사진을 찍기 가장 좋다.
진심을 담은 면, 사누키 우동의 고향
카가와현은 예부터 우동을 만들기 위한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비가 적게 내려 물이 많이 필요한 벼농사보다 물이 적게 드는 밀농사를 했고 그에 따라 면요리가 발달했다. 세토내해와 닿아 있어 우동의 주재료인 소금, 간장, 멸치 등도 쉽게 구할 수 있었다.
사누키는 카가와현의 옛 지명이다. '우동현'으로 자처할 만큼 카가와현 사람들에게 사누키 우동은 자부심의 대상이다. 현의 중심 도시인 다카마를 중심으로 약 900여개의 우동집이 있다. 우동학교가 있고 우동투어 버스와 택시도 운행하고 있다.
사누키 우동은 발로 밟아 반죽한 면발과 가쓰오부시 등으로 만든 담백한 육수가 특징이다. 밀가루에 물, 소금을 넣고 반죽한 후 2시간 이상 숙성시켜 면을 뽑는다. 사누키 우동면은 다른 면보다 굵고 탄력이 있어 쫄깃쫄깃하고 매끄럽다. 국물 없이 간장만 찍어 먹어도 별미인데 과거 우동기행을 연재했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도 사누키 우동에 대해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카가와현에는 다양한 우동을 개성 있는 방식으로 내놓는 매장이 많다. 그중 '밀집을 올린 집'이란 뜻의 와라야는 초가지붕이 인상적인 점포로 에도시대 말기에 건축된 민가를 이축(移築)한 건물을 이용해 만들어졌다. 천장의 대들보도 당시의 것 그대로라고 한다.
이곳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가마아게 우동을 양껏 먹을 수 있는 '특대 우동'이다. 대야에 우동이 들어있는 크기로 최고급 밀가루를 사용한 우동은 미리 만들어두지 않고 언제나 갓 반죽해서 삶는다. 미끌미끌한 식감의 면을 건져올려 맛국물에 찍어 먹는데 가장 기본적이지만 그 맛이 일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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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밖에도 카가와의 특산물인 올리브를 사료와 배합해서 먹인 사누키 소에 나온 올리브규는 부드러운 육질은 물론 불포화 지방산과 항산화 성분이 포함된 프리미엄 와규다. 올리브를 넣어서 만든 초록색 소면과 전통 방식으로 만든 쇼도시마 간장과의 조화도 훌륭하며 올리브 사료로 양식해 탄력 있는 식감이 일품인 올리브 하마치(방어), 고급스러운 단맛으로 유명한 와산봉(설탕)이 있다.
休, 느리게 흘러가는 이곳의 시간
休, 느리게 흘러가는 이곳의 시간
인간은 원래 아무 문제 없이도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하는 존재다. 여행이 삶의 문제에 대한 유일한 답이 될 순 없지만 유용한 답은 될 수 있다. 여행이 뭔가 대단한 게 있어야만 떠날 수 있는 게 아니다. 산티아고 800km 순례길을 완주해야 할 만큼 삶이 무거워 떠나는 것뿐 아니라 가볍고 느긋하게 떠날 수 있는 것도 여행이다.
부산 사람들이 마실 삼아 대마도로 우동 먹으러 간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만큼 일본은 우리나라와 가깝다. 시차도 없고 비행기로 2~3시간 거리에 있어 이동도 부담이 없다. 주말을 이용해 다녀올 수 있으며, 취향대로 여행을 즐길 수 있는 선택지가 충분한 점 등 일본 소도시 여행의 묘미는 아주 많다.
"속도의 시대에, 느리게 가는 것보다 더 활기찬 일은 없으리라. 그리고 끊임없이 움직여야 하는 시대에, 가만히 앉아 있는 것보다 더 시급한 일은 없으리라."(피코 아이어 '여행하지 않을 자유' 중)
도쿄나 오사카의 번잡스러움이 싫다면 카가와현은 좋은 선택이 된다. 세련된 도시와 소박한 시골의 모습을 동시에 갖춘 곳으로 세계적인 거장의 건물 안에서 만나는 작품과 쪽빛 바다를 끼고 달리는 자전거 너머의 풍경은 가슴을 벅차게 한다.
사면이 섬으로 둘러싸여 있어 파도 없이 잔잔해 일본의 지중해라 불리는 세토내해는 평온하다. 이 때문인지 모르지만 카가와현에서는 모든 것이 느리게 흘러간다. 감탄을 자아내는 예술과 감동이 있는 우동이 걸음 닿는 곳마다 있는 감각의 천국. 우아함이 깃든 카가와현에서의 시간은 휴식과 감성의 충전을 가져다준다. 카가와현은 내게 '소확행(小確幸)'의 여행지였다. 서울과 달리 정적이고 느린 속도 때문에 더 그랬던거 같다. 우라시마 빌리지 창문에서 바라 본 바깥 세토내해의 고즈넉한 풍경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바다에서 놀다 힘들면 하얀 프라이빗 해변에 눕는다. 해변 앞에 있는 사우나 안에서 통창으로 바다 위 빨간 석양을 바라본다. 전쟁같은 일상에 다시 돌아올 수 있는 에너지가 회복된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