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간판만으론 부족하다…투자자 눈높이는 ‘매출’로
자금 절벽 넘으려면…기술 넘어 사업화까지 증명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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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벤처투자 시장은 숫자상 회복세에 접어들었지만, 현장 스타트업의 체감 경기는 여전히 차갑다. 고금리와 경기 불확실성 속에서 투자 쏠림이 심화하며 기업 간 격차도 갈수록 커지고 있다. 특히 대부분의 자금이 AI·반도체·로보틱스 등 기술집약적 분야와 이미 수익성을 입증한 일부 기업으로 몰리면서, 독보적인 기술 장벽이나 확실한 수익 모델을 갖추지 못한 스타트업에는 투자 유치 자체가 생존을 건 관문이다.
4일 업계에 따르면 단순히 참신한 아이디어와 성장 가능성만으로 스타트업이 자금을 끌어오던 시기는 지나갔다. 현재 국내 투자시장은 기술력과 수익성은 물론, 확보한 자금을 실제 매출과 시장 확대로 연결할 수 있는 '사업화 역량'까지 꼼꼼하게 따져 묻고 있다.
◇‘AI’ 간판만으론 부족하다…투자자 눈높이는 ‘매출’로
중소벤처기업부가 최근 발표한 '2026년 상반기 신규 벤처투자 및 벤처펀드 결성 동향' 자료를 보면 올해 상반기 국내 신규 벤처투자 규모는 전년동기대비 54.3% 증가한 8조8676억원으로 역대 최대 실적을 경신했다. 표면적으로 보면 스타트업 투자시장은 회복세에 들어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최근 대형 거래가 전체 투자액 증가를 이끌면서, 전체 투자금 규모와 개별 스타트업이 체감하는 투자 기회 사이에는 적지 않은 간극이 있다.
분야별 투자 쏠림 현상도 두드러진다. 중소벤처기업부 집계 결과 ICT 서비스 1조8600억원(21.0%), 전기·기계·장비 1조5359억원(17.3%), 바이오·의료 1조5041억원(17.0%) 등 주요 기술 분야에 투자가 집중됐다. AI 반도체, 메모리칩, 휴머노이드 등 반도체 및 로보틱스 분야를 중심으로 1000억원 이상의 메가 딜이 이어지면서 ICT 제조와 전기·기계·장비 업종의 투자도 크게 증가했다.
결국 지금의 한국 벤처투자 시장은 단순히 ‘돈이 많아진 시장’이라기보다 투자 자금이 특정 기업과 산업으로 빠르게 쏠리는 시장에 가깝다. AI·반도체·로보틱스와 비(非) AI·일반 서비스 간 산업별 격차, 대형 성장기업과 초기 기업 간 규모별 격차, 초기 라운드와 후속 라운드 간 단계별 격차가 동시에 나타나면서 말 그대로 ‘양극화 속 양극화’가 깊어지고 있다.
글로벌 시장도 크게 다르지 않다. 글로벌 자산운용 정보기관 프레킨(Preqin) 보고서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글로벌 벤처 투자액 5150억 달러 중 약 70%가 AI와 반도체 등 정보기술(IT) 분야에 집중됐다. 글로벌 벤처 자금 역시 기술 경쟁력과 성장 가능성이 높은 일부 분야를 중심으로 빠르게 재편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 자금 절벽 넘으려면…기술 넘어 사업화까지 증명해야
이러한 선별적 투자를 단순히 벤처캐피털(VC)의 일방적인 쏠림 현상으로만 볼 수는 없다. 투자금이 회수돼야 그 자금이 다시 새로운 기업으로 흘러가는 선순환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기업공개(IPO)나 인수합병(M&A)을 통한 투자금 회수의 불확실성이 커진 시장에서는 투자 이후 기업이 얼마나 성장하고 실질적인 가치를 만들어내느냐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다.
과거에는 성장률이나 사용자 수, 거래액 등 외형적 지표만으로 높은 기업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었지만, 이제는 실제 매출과 이익, 고객 확보, 기술적 진입장벽 등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성과가 투자 판단의 기준이 되고 있다. 기업가치 산정에서도 ‘성장률’뿐 아니라 ‘수익성’이 중요해지는 가운데 VC들은 손익분기점(BEP) 달성 가능 시점과 영업이익률, 안정적인 B2B 수익 모델은 물론 후속 투자 가능성까지 살펴보고 있다.
특히 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는 분야는 기술 개발부터 실제 매출을 창출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는 기업들이다. 2019년 설립된 리플라의 서동은 대표는 기후환경 분야에 대한 정책형 투자와 민간투자의 한계를 지적했다.
서 대표는 “기후환경 분야를 지원하는 정책형 벤처투자 펀드로는 2017년 민관 합동으로 처음 조성된 미래환경산업투자펀드(미래환경펀드)가 있지만, 이를 주관하는 환경부(현 기후에너지환경부)의 예산 규모가 다른 주요 부처에 비해 절대적으로 부족해 수혜 기업은 매년 50여 곳에 불과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실질적인 수익을 창출하고 투자금을 회수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는 데다 불확실성도 커 적극적이고 대규모 투자를 기대하기 어려운 실정”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구조는 기술 기업의 ‘데스밸리’를 더 길게 만든다. 시드나 Pre-A 등 초기 투자를 유치했다고 해서 데스밸리를 통과한 것은 아니다. 제품을 개발하고 시장성을 검증한 뒤 본격적인 매출 확대에 나서는 단계에서 오히려 더 큰 규모의 자금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투자금 회수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한 기술 기업일수록 후속 자금 조달의 불확실성이 커지고, 이는 기술 개발 속도와 시장 진입 시점의 격차로 이어질 수 있다.
◇ 초기 투자도 '선택과 집중'…양극화 속 양극화
중소벤처기업부 통계에 따르면 상반기 초기 기업(업력 3년 이내)에 대한 투자는 1조8282억원으로 전년 대비 56.4% 증가했다. 그중 100억원 이상의 대형 투자를 받은 초기 기업 16개사의 투자금은 총 4218억원에 달했으며, AI·로보틱스 기업 9개사가 3153억원을 확보했다. 초기 투자 규모가 늘었다는 사실만으로 초기 기업 전반의 자금 사정이 개선됐다고 보기는 어려운 이유다.
스타트업 자본시장 데이터베이스 더브이씨(THE VC)가 발표한 ‘2026년 상반기 초기 라운드 투자 동향’에서도 이러한 흐름이 확인된다. 초기 라운드 투자금의 약 75%가 100억원 이상 대형 딜에 집중됐으며, 시드 라운드에서는 전체 투자금 1779억원 가운데 상위 4개 AI·로보틱스 스타트업이 1310억원을 확보해 73%를 차지했다.
결국 메가 시드 등 대규모 초기 투자를 유치하지 못했거나 기술적 진입장벽을 충분히 입증하지 못한 B2C·플랫폼 스타트업으로서는 하반기 유동성 확보가 더 중요한 과제가 될 수밖에 없다. 반면 기술력과 시장성을 입증한 기업들은 후속 성장에 필요한 자금을 확보하며 사업 확장에 나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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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설립된 에코리뉴는 지난해 말 20억원 규모의 Pre-A 투자를 유치한 데 이어 국내외 시장 확대를 추진하고 있다. 김호중 에코리뉴 기술전략팀 차장은 “지난해 말 20억원 규모의 Pre-A 투자를 유치한 데 이어 국내는 물론 일본과 북미 등으로 파트너십과 판로 확대를 모색하며 성장 기반을 강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다만 투자 유치가 곧 자금 조달의 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사업 규모가 커질수록 생산설비와 인력, 자동화 등에 추가 자금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김 차장은 “중장기적으로는 주문이 증가하는 속도에 맞춰 제품 생산능력을 확대하고 자동화 설비에도 투자해야 하는 만큼, 향후 추가 투자 유치는 필수적”이라고 설명했다. 초기 투자에 성공한 기업이라도 필요한 시기에 후속 자금을 확보하지 못하면 시장 수요를 확인하고도 생산과 사업 확장에 제동이 걸릴 수 있다.
◇기술만큼 중요한 것은 '시장에 내다 파는 능력'
AI·딥테크가 여전히 투자자들의 주요 관심 분야인 것은 분명하지만, ‘AI’라는 간판만으로 투자를 보장받는 것은 아니다. GPU 사용료와 대규모언어모델(LLM) 이용료 등 높은 인프라 비용을 부담하면서도 실질적인 매출을 만들어내지 못하면 시장의 'ROI(투자 대비 성과) 검증' 압박을 피하기 어렵다. 독자적인 지식재산권(IP)이나 차별화된 기술 없이 외부 AI 모델에 의존하는 서비스 기업들이 신규 투자 유치에 어려움을 겪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지금 시장이 바라는 것은 '딥테크'라는 이름 자체가 아니라, 기술이 고객의 비용을 줄이고 생산성을 높여 얼마만큼의 매출을 만들어내는지 입증하는 것이다. AI든 반도체든 로보틱스든 투자자의 질문은 결국 하나로 귀결된다. “그래서 이 기술로 얼마나 벌 수 있는가?”
스타트업 업계에서 제시하는 생존 전략 역시 범용 서비스보다는 제조·의료·금융·물류 등 특정 산업의 페인 포인트(Pain Point)를 해결하는 산업 특화형 딥테크·AI 솔루션으로 사업모델을 재정비하고 제품·시장 적합성(PMF)을 입증하는 데 초점이 맞춰진다.
단순한 기술 개발을 넘어 실제 고객을 확보하고 반복적인 매출을 만들어내는 구조를 갖추는 것도 중요하다. 대기업 CVC와의 전략적 파트너십이나 액셀러레이터의 후속 라운드 참여 등 다양한 자금 조달 경로를 확보하는 것도 방법이다.
아울러 로봇, 스마트팩토리, 자율주행 등 현실 세계의 기기와 산업 현장에 적용되는 AI 기술을 확보해 진입장벽을 높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술 확보 이후 실제 고객에게 판매하고 반복 주문을 만들어 생산능력을 확대할 수 있는 사업화 역량이 함께 뒷받침돼야 한다.
◇정책도 ‘다음 단계’까지 연결해야
정책 자금 지원과 현장 실무 사이의 간극을 좁히는 것도 시급한 과제다. 정부의 R&D 지원과 금융기관의 벤처펀드 출자 확대가 스타트업의 자금 조달에 일정 부분 기여하고 있지만, 인력이 부족한 초기 기술 기업에는 지원금 신청과 투자 실사에 필요한 행정 업무 자체가 적지 않은 부담으로 작용한다. 지원과 투자를 받기 위한 절차가 복잡해질수록 정작 기술 개발과 사업화에 투입할 수 있는 시간과 인력이 줄어들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기술 기업은 R&D 단계에서 사업화 단계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또 한 번의 ‘자금 절벽’을 맞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정책 지원도 단순히 연구개발비를 지원하는 데 그치기보다 실증과 초기 고객 확보, 양산, 후속 투자까지 이어질 수 있는 지원 체계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
친환경 기술에 대한 투자 확대가 필요하다는 현장의 목소리도 나온다. 전시회 현장에서 기자가 만난 스타트업 관계자는 “정부가 이른바 7대 미래성장동력 SEED(씨앗)를 중심으로 차세대 컴퓨팅·AI, 에너지 기술, 우주·항공 등에 투자 역량을 집중하고 있지만, 세계적인 흐름을 고려하면 친환경 기술 역시 결코 외면할 수 없는 분야”라며 “장기적으로는 새로운 펀드 조성 등을 통해 후속 투자 기회가 더 확대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결국 정책의 역할은 모든 스타트업에 자금을 일률적으로 배분하는 데 있지 않다. 민간 자본이 감당하기 어려운 장기 기술 개발과 실증 단계의 위험을 분담하고, 시장성과 기술력을 갖췄지만 자금 공백을 겪는 기업에 필요한 지원을 집중하는 ‘핀셋형’ 정책이 필요하다. 이를 통해 기술기업이 실제 매출을 만들고 민간 투자로 이어지는 다음 단계까지 성장할 수 있도록 뒷받침해야 한다.
◇ 하반기에도 ‘선택과 집중’은 계속된다
문제는 올해 하반기에도 이러한 양극화가 해소되기보다 고착화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더브이씨(THE VC)의 ‘2026년 상반기 초기 라운드 투자 동향’에 따르면 전체 투자금에서 100억원 이상의 대형 딜이 차지하는 비중이 매년 커지는 등 투자자들의 선별적 투자가 한층 강화된 것으로 나타났다. 전체 딜 건수가 크게 늘지 않는 상황에서 투자자들의 선별 기준이 까다로워지고 있는 만큼, 하반기에도 대형 딜과 AI·딥테크 분야로의 자금 쏠림이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다만 이러한 흐름이 곧 비(非) AI·비 (非)딥테크 스타트업의 생존 가능성이 낮아진다는 의미는 아니다. 결국 산업이나 기술 분야보다 실제 고객을 확보하고 지속적인 매출을 만들어낼 수 있는 사업 구조를 갖췄는지가 더 중요해질 전망이다.
따라서 스타트업도 VC 투자금에만 의존하기보다 초기 단계부터 자체적인 매출 기반을 확보하고, 대기업과의 전략적 협업이나 공공조달, 고객사 선구매, CVC 투자 등 다양한 자금 조달 경로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 최소 18~24개월 수준의 런웨이(자금 소진 기간)를 확보할 수 있도록 고정비를 관리하고, AI 도구 등을 활용해 자본 효율적인 조직을 구축하는 것도 중요하다.
결국 지금의 투자시장에서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은 자금을 끌어왔느냐’가 아니다. 외부 자금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고, 필요한 시점에 필요한 만큼의 자금을 확보하면서도 자체적으로 매출을 만들어낼 수 있는 사업 구조를 갖추는 것이다. 투자시장에서 살아남는 기업은 ‘돈을 잘 받는 기업’이 아니라, ‘돈을 벌어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는 기업’이라고 현장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다.
- 최상운 기자 kai09@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