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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퍼 놀란의 신작은 늘 두근거리게 한다. 이번에는 172분이라는 어마어마한 상영시간으로도 그렇다. 그러나 그 시간을 보내고 극장을 나서는 길에 먼저 떠오른 것은 피로가 아니었다. 마치 고대어로 쓰인 두꺼운 대서사시를 숨 가쁘게 읽어 내려가, 기어코 벅차게 새겨진 기분이었다.
영화 ‘오디세이’는 10년간 이어진 트로이 전쟁을 승리로 이끈 이타카의 왕 오디세우스(맷 데이먼)가 아내 페넬로페(앤 해서웨이)와 아들 텔레마코스(톰 홀랜드)가 기다리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여정에 관한 이야기다. 오디세우스는 병사들을 트로이 목마 안에 숨기는 계략으로 굳게 닫힌 성문을 열어젖힌 지략가다. 하지만 전쟁을 끝낸 영웅에게 귀향은 새로운 시련이다. 신들의 분노와 인간의 욕망, 자연의 위협 등이 뒤섞여 집으로 향하는 길을 가로막는다. -
영화는 ‘마법이 세상에 존재하던 시대’라는 문장으로 문을 연다. 외눈박이 거인 폴리페모스와 마녀 키르케, 여섯 개의 머리를 지닌 괴물 스킬라, 죽은 자들의 땅 같은 원작의 판타지적 요소를 비켜 가지 않겠다는 선언처럼 읽힌다. 놀란은 그 약속 그대로 호메로스의 세계를 스크린에 옮긴다. 하지만 그 질감은 흔히 떠올리는 판타지와 다르다. 신과 괴물이 존재하는 세계인데도, 허구적인 볼거리라기보다 고대인이 실제로 기록해 둔 역사처럼 묵직하게 다가온다.
놀란은 신화를 현실로 끌어내리기보다 현실을 신화의 높이까지 밀어 올리려 했다. 거센 파도와 폭풍, 낯선 섬과 어두운 동굴은 인물이 실제로 발을 딛고 살아남아야 할 공간처럼 보인다. 실제 로케이션과 전편 IMAX 필름 촬영이 만들어낸 물성과 깊이는 관객을 오디세우스와 같은 배 위에 태운다. 파도가 배를 덮칠 때마다 포세이돈의 분노가 자연현상이 아니라 실재하는 힘처럼 느껴진다.
‘오디세이’의 이야기는 시간의 순서대로 흐르지 않는다. 오디세우스가 트로이를 떠난 뒤 겪은 모험과 샤를리즈 테론이 연기한 칼립소의 섬에서 머무는 시간, 이타카에서 남편을 기다리는 페넬로페와 아버지를 찾아 나서는 텔레마코스의 이야기가 앞뒤로 이동하며 맞물린다. 오디세우스의 항해와 가족의 시간이 나란히 진행되기보다, 서로 다른 시간대가 기억과 이야기의 형태로 침범하고 이어진다. 그 때문에 호메로스의 원작이나 그리스 신화를 조금 알고 있다면 영화를 따라가는 데 도움이 된다. -
각각의 모험은 괴물을 물리치는 영웅담으로만 소비되지 않는다. 오디세우스가 얼마나 영리한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그의 오만과 선원들의 탐욕이 어떻게 귀향을 지연시키는지도 드러낸다. 이 여정은 신들이 내린 형벌이지만, 인간이 자신의 선택으로 만들어낸 대가이기도 하다. 집으로 돌아가는 일은 적을 무찌르는 것보다 자신이 저지른 일과 잃어버린 것들을 감당하는 과정에 가깝다.
이 과정에서 가장 강조되는 것은 전쟁의 질감이다. 놀란은 트로이 전쟁을 영웅의 승리를 찬양하는 장관으로 그리지 않는다. 불타는 성과 무너지는 사람들, 승리를 외치는 병사와 모든 것을 빼앗긴 이들의 절규를 한 공간 안에 겹쳐놓는다. '오디세이'는 전쟁의 함성과 비명에서 조금 더 걸어 나간다. 전쟁이 끝난 뒤, 승리했다고 믿는 자들은 자신이 본 것과 저지른 것, 그 과정에서 잃어버린 것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패자의 비명은 승자의 귀에도 남는다. 결국 전쟁은 한쪽만 비명을 지르는 일이 아니라, 시간이 지나면 양쪽 모두에게 비명을 남기는 사건이다.
이러한 시선은 놀란의 전작 ‘오펜하이머’와 맞닿는다. 영화 ‘오펜하이머’가 원자폭탄을 만드는데, 이바지한 천재라고 불렸던 인물을 조명했다면, ‘오디세이’는 전략으로 전쟁의 승리를 이끈 오디세우스를 바라본다. 한 사람은 새로운 무기를 만들었고, 다른 한 사람은 새로운 전략을 만들었다. 놀란은 그들이 무엇을 이루었는가보다 그 승리 뒤에 무엇이 남았는지를 묻는다. '전쟁'이라는 허망하고 공포스러운 메시지를, 미래를 상징하는 아이를 가진 부모의 시선으로 묵직하게 풀어낸다. -
영화를 시작하는 '마법이 세상에 존재하던 시대’라는 말이 다가오는 것은 배우들이 선사한 강렬한 힘이다. 맷 데이먼은 오디세우스를 완전무결한 영웅이 아니라 전쟁과 표류에 닳아버린 인간으로 그린다. 영리하지만 오만하고, 가족을 사랑하지만 살아남기 위해 수많은 선택을 해야 하는 인물의 피로와 두려움이 묵직하게 전해진다. 앤 해서웨이는 오디세우스를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아내가 아닌, 자신의 지략으로 왕국과 가족을 지키는 인물로 굳건히 자리한다. 톰 홀랜드 역시 아버지가 부재한 상황에서 아이가 아닌, 어른으로 성장해 가는 과정을 영웅담 이상으로 써 내려간다.
비명과 함성이 맞닿는 순간, 승리의 얼굴은 흐려진다. ‘오디세이’는 전쟁을 끝낸 영웅의 모험담이 아니라, 전쟁이 한 인간과 가족에게 얼마나 오래 남아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서사시다. 그렇기에 172분이라는 상영시간도 빠르게 흐른다. 15세 이상 관람가. 8월 5일 개봉.
- 조명현 객원기자 midol13@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