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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6시 15분. 아직 어둠이 채 걷히지 않은 사이판 가라판 해변 앞, 크라운 플라자 리조트 정문 앞에 형형색색 러닝복을 차려입은 러너들이 모여들었다. 머리 위에는 보름달이 걸려 있고, 코끝에는 태평양 특유의 짭조름한 새벽 공기가 감돌았다. 평소 러닝이라고는 출근 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 종종걸음 치는 것이 전부였던 나도 그 무리 속에 섞여 있었다. 배번표를 부착한 티셔츠를 입고 나와 묘한 긴장감과 설레임 속에 마라톤 대회에 참가할 준비를 마쳤다. '내가 5킬로미터를 완주할 수 있을까.' 스타트 카운트다운이 시작됐다.
달리는 여행자들, 숫자로 증명하다
러닝이 여행과 결합한 ‘런트립(Run-trip)’이 글로벌 여행 트렌드로 자리 잡고 있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문화체육관광부와 국민체육진흥공단의 「2024 국민생활체육조사」에 따르면 최근 1년 내 조깅·달리기 참여율은 2023년 5.0%에서 2024년 6.8%로 상승했다. 코로나19 이후 야외 활동 수요가 늘면서 러닝이 헬스·요가 등 실내운동을 제치고 가장 빠르게 성장한 운동 종목 중 하나로 평가된다. -
스포츠업계는 러닝 인구를 약 300만 명 수준으로 추산하며, 러닝 앱 사용자나 걷기·트레킹 동호회까지 포함하면 비공식적으로 1000만 명에 달할 것으로 본다.
2025년 한 해 국내에서 열린 마라톤 대회는 약 250여 회, 참가자 수는 누적 100만 명을 넘은 것으로 추정된다. 신한카드 빅데이터연구소 자료에서도 2024년 러닝 관련 소비 증가율이 30대 232%, 40대 225%로 20대(177%)를 상회했다. MZ세대를 넘어 전 세대로 러닝 문화가 확산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흐름 속에서 각국 관광청들도 '런트립' 마케팅에 적극적으로 뛰어들고 있다. 일본관광청은 도쿄마라톤과 연계한 방일 러너 패키지를 강화하고 있고, 호주, 그리스, 대만 등도 마라톤 대회를 핵심 관광 콘텐츠로 내세우는 추세다.
런트립의 장점은 분명하다. 운동화 한 켤레로 낯선 도시의 새벽 골목을 달리다 보면 그 어떤 관광 코스보다 진한 여행의 감각을 얻게 된다. 경쟁보다는 완주 자체에 의미를 두는 소규모 해외 마라톤은 국내 대형 대회와는 다른 차원의 경험을 선사한다. 완주 메달 하나가 여행의 기념품이자 자기 자신과의 약속이 되는 것이다.
태평양 위의 런트립 성지, 사이판
마리아나관광청이 공들여 키우는 런트립 목적지가 바로 ‘사이판’이다. 지난 3월 7일 사이판에서 열린 '2026 스케쳐스 사이판 마라톤(Skechers Saipan Marathon)'은 15개국에서 772명이 참가하며 제18회 대회를 성황리에 마쳤다. 이 가운데 한국 참가자는 286명으로 전체의 37%를 차지해 국가별 최다 참가국 기록을 세웠다. 2025년 한국인 비중(약 35%)보다 더 높아진 수치다. 사이판 마라톤이 한국 러너들에게 얼마나 깊이 각인됐는지 보여주는 숫자다. -
사이판 마라톤은 마리아나관광청과 북마리아나육상연맹이 주최하며, 세계육상연맹(World Athletics)과 국제마라톤·거리경주협회(AIMS) 공인 코스로 인증받은 태평양 주요 공인 마라톤 중 하나다. 자미카 타이헤론(Jamika R. Taijeron) 마리아나관광청 청장은 “사이판 마라톤은 전 세계 러너들이 함께하는 마리아나의 대표 스포츠 관광 이벤트로 자리매김했다”며 “런트립과 함께 스포츠케이션(Sportscation) 목적지를 지속적으로 키워가고 있다”고 밝혔다.
대회 전날 밤, 쉐이크아웃 런과의 첫 만남
사이판 마라톤 대회 전날인 3월 6일 오전, 러닝 인플루언서 디어(@daily__dear)가 이끄는 '쉐이크아웃 런(Shakeout Run)' 세션에 참가했다. -
쉐이크아웃 런이란 메인 대회 전날 몸과 마음을 준비하는 가벼운 사전 워밍업 러닝 프로그램이다. 격렬한 훈련 대신 가볍게 몸을 움직이며 현지 기후와 코스 환경에 적응하는 것이 목적이다. 해외 마라톤 대회에서는 이미 일반적인 사전 행사로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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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는 아메리칸 메모리얼 파크(American Memorial Park)와 엘로이 S. 이노스 피스 공원(Eloy S. Inos Peace Park)을 지나는 루트였다. 2차 세계대전의 흔적을 품은 기념비 사이로, 야자수 그늘 아래를 가볍게 달리는 느낌은 한국의 한강변 러닝과는 전혀 달랐다. 역사가 잠든 공원과 에메랄드빛 바다가 번갈아 펼쳐지는 풍경 속에서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가벼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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쉐이크아웃 런 특유의 느슨한 분위기 덕분에 초보 러너도 부담 없이 내일의 레이스를 그려볼 수 있었다. 3월 초 한국의 꽃샘추위와 대조되는 사이판의 온화한 기후는 다음 날 대회에 대한 기대를 한층 끌어올렸다.
새벽 4시, 태평양에 출발 신호가 울리다
대회 당일 사이판의 코스는 크라운 플라자 리조트 앞 Coral Tree Ave를 출발해 비치로드(Beach Road)를 따라 서쪽 라군과 나란히 달리는 구간으로 구성된다. 풀코스(42.195km)는 새벽 4시, 하프코스(21.0975km)는 5시 15분, 10km는 6시, 5km는 6시 15분에 각각 출발한다. 더운 기후를 피해 이른 새벽부터 레이스를 시작하는 사이판 마라톤만의 방식이다. 해가 뜨기 전 출발해 달리다 보면 어느 순간 동이 트는 풍경과 마주치게 된다. 보름달 아래 페이스를 맞추며 달리다가 서서히 밝아오는 수평선을 바라보는 경험은 사이판 마라톤이 아니면 얻기 어려운 것이다. -
코스별 성격도 뚜렷하게 구분된다. 5km는 입문자와 가족 단위 참가자를 위한 펀런(Fun Run) 성격으로, 러닝 경험이 없어도 도전할 수 있는 가장 접근하기 쉬운 코스다. 10km는 사이판 마라톤에서 가장 대중적인 코스로 실력을 키운 아마추어 러너들이 본격적인 기록 도전에 나서는 구간이다. 하프(21.0975km)는 중급 이상 러너들에게 맞는 거리로, 이번 대회에서 한국의 김동환이 남자부 3위, 김보은이 여자부 2위를 차지했다.
풀코스(42.195km)는 세계육상연맹 공인 기록 대회로, 이번에는 일본의 부부 러너 나카지마 히로키(2:45:53)와 나카지마 토모미(3:17:16)가 나란히 남녀 우승을 차지했다. 풀코스 최후 완주자의 기록은 8시간 14분. 새벽 4시에 출발해 정오가 넘어서야 결승선을 통과한 것이다. 기록보다 완주 그 자체에 의미를 두는 이들이 이 대회를 찾는 이유를 말해주는 숫자다.
5킬로미터, 초보 러너의 속보
오전 6시 15분, 5km 스타트 총성이 울렸다. 수 백명의 러너들이 출발선을 넘는 순간 나도 그 물결 속에 발을 내딛었다. 처음 2km는 의외로 수월했다. 대회 특유의 함성과 에너지가 평소와 다른 다리를 만들어주는 듯했다. 비치로드를 따라 이어지는 길 위로 라군의 수면이 보였고, 야자수 그늘 사이로 새벽 공기가 불어왔다. -
3km를 넘어서면서 숨이 가빠지기 시작했다. 평소라면 여기쯤에서 멈춰 섰을 것이다. 하지만 코스 곳곳에서 지역 주민들이 양손에 물컵과 과일을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물, 파워에이드, 오렌지, 바나나, 물에 적신 스펀지까지. 생면부지의 사이판 주민이 건네는 응원의 한마디가 에너지젤보다 빠르게 다리에 힘을 불어넣었다. 대회 도중에는 여러차례 하늘에서 비가 쏟아졌다. 추위를 걱정할 겨를도 없이 열기로 달궈진 몸을 식혀주는 단비였다. -
마지막 500m, 저 멀리 결승선이 보였다. 가장 느린 속도였지만 두 다리는 본능적으로 빨라졌다. 피니시 라인을 통과하는 순간 진행자가 번호와 이름을 불러주며 반겼고, 주민이 직접 완주 메달을 목에 걸어줬다. 숨이 차오른 채로 웃음이 터졌다. 완주 메달 하나가 이토록 묵직하게 느껴질 줄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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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도중 비치로드 위로 무지개도 보였었다. 에메랄드빛 라군 위로 선명하게 걸린 무지개는 사이판이 이 대회를 위해 준비한 피날레처럼 보였다.
초보 러너에게 사이판 마라톤이 좋은 이유
사이판 마라톤은 처음 해외 마라톤에 도전하는 이들에게 유독 너그럽다. 우선 규모가 작다. 772명이 참가한 이번 대회는 서울마라톤(약 4만 명) 기준으로 50분의 1 수준이다. 병목 현상 없이 넓은 도로를 홀로 달리는 경험이 가능하고, 참가 인원이 적은 만큼 나이대별 입상 확률도 높다. -
코스도 초보자 친화적이다. 태평양 해안선을 따라 이어지는 비치로드는 고도 변화가 거의 없는 평탄한 구간으로, 처음 마라톤에 도전하는 러너들에게 적합하다. 바다와 야자수, 2차 세계대전 유적을 지나는 풍경은 달리는 내내 시선을 붙잡는다. 서울에서 비행기로 약 4시간 30분, 가까운 거리와 연중 온화한 기후도 빼놓을 수 없는 장점이다. 10K 여자부에서 이윤지·박민경·백기윤이 1~3위를 모두 차지하고, 가수 션을 비롯한 다수의 러닝 인플루언서들이 참가해 분위기를 끌어올린 것도 이 대회가 스포츠 이벤트를 넘어 하나의 러닝 문화 축제로 자리 잡고 있음을 보여준다.
다음엔 10킬로미터로 도전!
완주 메달을 목에 걸고 크라운 플라자 리조트 객실에 쓰러지다시피 앉아 바라본 라군은, 달리기 전의 그것과 전혀 달라 보였다. 숨을 고르며 든 생각 하나. '이 감각을 다시 느끼려면 1년을 기다려야 한다.' -
러닝이 왜 사람을 붙잡는지, 5킬로미터를 달리고 나서야 조금 알 것 같았다. 기록이 아닌 경험, 속도가 아닌 감각. 낯선 땅의 새벽 공기를 폐 속 깊이 들이켜고, 전혀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과 눈빛 하나로 응원을 주고받는 그 시간 안에 여행과 스포츠, 그리고 자기 자신과의 대화가 동시에 담겨 있었다.
내년 사이판 마라톤에는 10km 코스에 참가할 계획이다. 그때쯤이면 비치로드의 무지개를 조금 더 오래, 더 멀리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 사이판(북마리아나 제도) =서미영 기자 pepero99@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