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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주먹을 쥐고 정의를 앞세워 '이겨야 해' 한다는 느낌보다는, 계속해서 무너지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아가야 하는 것이 '아너'인 것 같아요."
ENA 월화드라마 '아너: 그녀들의 법정'(이하 '아너')이 지난 10일 종영하며 6주간의 여정에 마침표를 찍었다. '아너: 그녀들의 법정'은 거대한 스캔들이 되어 돌아온 과거에 정면 돌파로 맞서는 세 여성 변호사의 뜨거운 미스터리 추적극이다.
극 중 수십만 SNS 팔로워를 보유한 셀럽 변호사이자, 법대 동기들과 함께 세운 여성 범죄 피해자 전문 로펌 L&J(Listen & Joy)의 대외적 메신저인 '윤라영'을 맡은 이나영은 작품 종영 이후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취재진과 만났다. 그는 '아너'를 선택한 이유에 대해 "소설책을 읽는 독자의 마음으로 뒤가 궁금했다. 재미있어서 꼭 참여하고 싶었다. 제가 맡게 될 부분을 생각하며 다시 읽었는데도 여전히 궁금하고 흥미로웠다"라고 전했다. -
'아너'에 끌렸던 이유는 명확했다. 그는 "주로 아픔이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공감을 하고 이입하게 되는 것 같다. 어떤 정의로움 때문에 꼭 이런 일을 하는 잔다르크가 아닌, 아픔이 있는 사람으로서 깨나가야 하는 거잖아요. 대외적인 메신저로 사람들 앞에 서고 표현하는 것도 상처를 직면하고 버티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집에 와서는 정작 어떤 것도 하지 못하고. 그런 상황에 따라 톤이나 분위기가 달라지는 것이 매력적이었다"라고 말했다.
극 중 윤라영 또한 성범죄 피해자였다. 자신의 트라우마를 마주해야 하는 고통 속에서도, 같은 피해자가 더 이상 생기지 않기를 바라며 목소리를 내는 인물이다. 그렇기에 때로는 마냥 정당하지만은 않은 선택도 과감히 하며 캐릭터의 입체성을 더했다. 이나영은 "라영이가 마냥 정의롭고 완벽한 인물이 아닌, 상처와 죄책감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기 때문에 상황에 따라 여러 복합적인 감정이 나온 것 같다"라며 운을 뗐다.
그는 "라영이가 갑자기 버럭 화를 내거나 죽고 싶다는 사람에게 '네가 왜 죽어' 이런 대사를 한다. 그게 사실은 자신한테 하는 말이잖아요. 상처받은 인물들을 대할 때 자신도 못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야 하고, 그래야 산다는 그런 조언을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인물이라고 생각했다"라고 캐릭터를 설명했다. -
캐릭터를 완성해간 과정을 묻자 이나영은 "대본에 눈물을 흘리거나 이런 것이 없어서 감정 신이 없다고 생각을 했었는데, 막상 촬영하니 처음부터 끝까지 감정신이었다. 감정 신 아닌 감정 신들에 몰입해서 하다 보니까 혼자 감정이 올라올 때도 많았는데, 담백하게 풀어야 할 것이 많았다. 아픔이나 상처받은 친구를 대면하고, 같은 입장에서 살아가자는 용기를 줘야 했는데 그런 표현들이 어려웠다. 감독님과 표현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다"라고 돌아봤다.
스타일링에도 많은 신경을 쏟았다. 그는 "여성이 세 명이다 보니까 각각의 캐릭터대로 스타일을 다르게 보여주는 것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캐릭터에 따라 다들 취향이 달랐다. 초반에 색감을 낼 수 있는 캐릭터가 저뿐이라 어느 정도 컬러를 살려보면 좋겠다고 의견을 냈다. 저희가 법정신이 많은 작품은 아니기도 했고, 선입견에 갇혀있지는 말자는 생각이었다. 여러 스타일을 고민하며 그중 공감이 안 되는 것들을 빼면서 잡아가고 좁혀갔다"라고 답했다. -
찬란하고, 또 명예로운 여성들의 연대였다. 각기 결핍이 있는 세 사람의 연대였기에 더욱 많은 공감을 샀다. 이나영은 "사실 20년 지기 친구 사이라고 해서 어떻게 연기해야 할까 고민을 많이 했는데, 사람마다 성향이 다르잖아요. 3명이 모이는 신에서 연극처럼 리허설을 해볼까 제안도 할 정도로 어떤 '척'을 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라며 "고민이 많았는데, 다행히도 함께 촬영하기 전에 각각의 성격을 드러내는 부분을 먼저 촬영하게 됐다. 다시 만났을 때 이미 그 사람이 되어 있었다"라고 말했다.
스토리에 몰입할수록 든든한 느낌을 받다 못해 눈물이 났다는 이나영은 "촬영할 때 상대방을 못 볼 정도였어요. 보기만 하면 눈물이 터지는 거예요. 그래서 계속 (감정을) 덜어내는 것이 일이었어요"라며 "나중에는 서로 잘 나왔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제가 나오지 않는 장면의 상대방 바스트를 찍을 때도 열심히 했어요. 오히려 그때의 연기가 좋아서 '이 부분 목소리만 써주시면 안 돼요?' 할 정도로, 서로 응원을 보냈던 것 같아요"라고 전했다.
이나영은 다만 '아너'가 여성들의 연대에 그치는 것이 아닌 "거대 악과의 싸움인 것 같다. '아너'에서는 성폭력에 관한 이야기를 했지만, 단면적으로 보기보다는 아픈 사람들 혹은 부당하게 당하는 사람들에 대한 연대감이 더 많았던 것 같다. 악을 악으로 풀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다"라고 강조했다. -
작품 후반부에는 숨겨왔던 입양을 보낸 딸 한민서(전소영)의 정체가 드러난다. 처음부터 이 부분을 알고 들어갔지만, 의식하지 않았다고 밝힌 이나영은 "드라마 속에서도 철저히 모르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저희끼리 전체적인 부분을 이야기할 때 민서만 잘 숨기면 된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래서 민서를 대할 때 그 부분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했다"라고 설명했다.
극 말미로 향할수록 두 사람의 감정이 얽혀드는 장면이 깊은 인상을 남겼다. 특히 자수한 한민서를 찾아간 윤라영은 그를 향해 "더 멋대로 굴고, 못되게 굴어도 괜찮아. 그래도 마음이 안 풀리면 또 그래도 괜찮아. 나는 그냥 다음 주에도 여기에서 기다리고 있을게"라며 진심을 전한다.
이나영은 "사실 어떤 상처에 대한 위로를 되게 어렵게 느낀다. 위로라는 단어가 버겁게 느껴질 때도 있고, 과연 나는 이 상황에 어떻게 위로를 하는 게 좋을까 어려운데, 그냥 어떤 상처를 덮으려 하거나 다 괜찮다고 하는 것이 아닌 기다려주는 것을 보며 각자의 방식으로 딛고 용기 있게 살아가길 기다려주는 드라마가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라고 의미를 전했다. -
최종화에서 윤라영의 "나는 결국 살아남았다. 그리고 이제는 내 목소리를 듣고 있는 당신 또한 진심으로 계속해서 살아가길 바란다. 흉터를 안고도 살아남은 우리의 하루하루는 매 순간 찬란하고 명예롭다"라는 내레이션 역시 깊은 울림을 전한다. 우리가 기대하는 전형적인 해피엔딩은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진짜 현실에 주목했기 때문에 '그럼에도 살아가라'라는 메시지는 더욱 진정성 있게 와닿는다. 이에 시즌2의 가능성에 대해서도 물어봤으나 "아직 이야기된 것은 없다"라는 답변을 들었다.
차기작에 대한 이야기도 묻자 그는 "텀이 생기는 것 같아서 죄송한 마음도 있지만, 사실 저는 내년 계획이나 어떤 작품을 해야겠다는 그런 테두리가 없다. 최근에 단편 영화도 한 편 찍었는데 좋은 시나리오가 보이면 당장 내일이라도 할 수 있을 만큼 단순하다. 작품을 했으니 쉬고 싶다거나 충전을 해야 한다는 그런 것은 없다"라며 "작품 선택도 좋아하는 성향은 있지만, 그것조차도 그때의 내가 가진 분위기나 취향에 따라 달라진다. 다만 좋은 작품이나 영화를 보는 것이 제가 가진 유일한 취미다. 저도 그걸 돌려드리고 싶은 마음이다"라고 말했다.
"나중에 필모그래피를 되짚어 봤을 때 어떤 선들이 이어질 수도 있을 것 같지만, 지금은 어떨지 모르겠다. 그때그때에 집중하며 한 발 한 발 나아가고 있다."
- 하나영 기자 hana0@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