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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에 첩보 액션 장르의 한국 영화가 등장했다. 근래 만나기 어려웠던 장르다. 그런데 그 첩보 액션 장르는 하드보일드 한 어둠에서 한 발짝만 앞으로 나오면, 부글부글 끓고 있는 멜로가 된다. 영화 '휴민트'는 그 온도차에 흠뻑 취하게 한다.
창문 두 개가 나란한 방. 한 남자가 일어나 물을 마시고 책상 위 장비와 총을 챙긴다. 화면 위로 Human과 Intelligence라는 단어가 겹쳐지고, ‘HUMINT’만 남는다. 사람을 통한 정보활동, 영화 '휴민트'가 보여줄 이야기다. 남과 북, 빛과 어둠, 시작과 끝 등 선명한 대칭이 암시된다. -
영화는 '휴민트'인 채선화(신세경)를 중심에 두고 전개된다. 국정원 요원 조과장(조인성)은 동남아에서 얻은 정보를 토대로, 북한과 러시아의 국경지대인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벌어지는 실종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채선화와 만남을 갖는다. 블라디보스토크 북한 총영사 황치성(박해준)은 갑자기 국경지대 실종 사건을 조사한답시고 나타난 박건(박정민)이 불편하다. 그래서 그와 "깊은 사이"였던 채선화를 이용하려 한다. 각기 다른 목적 속에 총이 엇갈려 향한다.
블라디보스토크라는 장소 설정부터 '휴민트'는 류승완 감독의 전작 '베를린'(2013)과 함께한다. '베를린'의 말미 표종성(하정우)이 련정희(전지현)의 복수를 위해 향했던 곳이 블라디보스토크였다. 하지만, 그곳에서 영화는 궤를 달리한다. '베를린'에서 블라디보스토크는 복수의 장소를 암시했다면, '휴민트'에서 블라디보스토크는 구원과 희생의 장소가 된다. -
첩보 액션 장르에 걸맞게 서늘한 공기처럼 감정은 최대한 절제된다. '휴민트'의 묘미 중 하나는 여기에 있다. 배우들이 꾹 참아내는 감정의 틈은 빛으로 드러나고, 카메라로 다가선다. 조과장(조인성)이 생과 사의 경계에 있는 첫 정보원에게 절박하게 매달릴 때, 촬영 감독은 핸드헬드 촬영으로 거친 숨결을 포착한다. 그리고 생과 사의 한 방향이 정해졌을 때, 카메라는 고정된다. 고정된 카메라 속에서 조용하게 조과장의 감정을 바라본다. 류승완 감독은 CCTV, 핸드폰 화면 등까지 적절하게 활용해 관객의 감정을 이끌고 간다. 깊숙하게 캐릭터로 데려다 놓고, 훅 물러선다.
결정적인 대치 장면이나 클라이맥스 장면에서도 그 어떤 것을 강요하는 대신, 집요하게도 충돌의 질감을 명확히 드러낸다. 그렇기에 총구를 거꾸로 쥐고 싸우는 조인성의 부딪힘이 더욱 강렬하게 부각되며, 빛과 어둠의 대비 속에서 절도 있고 빠르게 움직이는 박정민의 액션이 놀라움을 더한다. 총기 액션과 함께 진행되는 속도감 있는 카체이싱은 객석에서도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게 만들고야 만다. -
그렇게 따라가다 보면, 가장 중심에는 멜로가 자리한다. 과거 '헤어질 결심'(2022)에서 산오로 짧게 등장해 "나 너 때문에 고생깨나 했지만, 사실 너 아니었으면 내 인생 공허했다"라는 강렬한 대사를 남겼던 박정민은 '휴민트' 전체를 관통하는 멜로로 관객이 기다려온 갈증을 가시게 한다. 채선화(신세경)와 과거 "깊이 아는 사람"으로 등장한 박건은 처음 만나 시선을 떼지 못하는 모습부터 기다림 끝에 만나, CCTV를 통해 두 사람을 지켜보는 임대리(정유진)가 "여기서 무너지네"라는 한 마디를 하기까지 감정을 단단히 압축한다. 그 깊은 감정선은 '휴민트'의 마지막까지 이어져 관객을 붕괴시키기에 충분하다.
스크린에서 조인성, 박정민, 신세경, 박해준 등의 얼굴을 처음 본 건 아니지만, '역대급 비주얼'이라는 그 상투어가 드물게 설득력을 얻는다. 특히, 박정민은 높은 계단 위에서 떨어지는 몸 사리지 않는 액션부터 어둠에서 빛으로 나올 때 얼굴에 떨어지는 그림자, 안광 등 다양한 요소 속에서 존재감을 증폭시킨다. 신세경은 아름다움 속에 처절한 목소리를 그대로 내뱉으며 깊은 인상을 남긴다.
하나의 목적을 향해 질주하는 영화다. 그 목적은 "구원과 희생, 그리고 복수가 액션 영화의 영원한 테마"라는 류승완 감독의 말에 있다. 차가운 하드보일드의 온도 속에서도 결국 남는 것은 인간의 체온이다. 그 잔열은 황량한 풍경 속에서도 감정을 남긴다는 점에서 '매드맥스'의 사막을 떠올리게 한다.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맛에 취하게 할 '휴민트'는 오는 2월 11일 개봉해 관객과 만난다. 러닝타임 119분. 15세이상 관람가.
- 조명현 기자 midol13@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