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기고] 체크리스트에 갇힌 인권경영, ‘형식’의 껍질을 깨고 ‘실질’로 응답하라

  • 이현 한국지방자치학회 인권경영특별위원회 위원장, 신한대 빅데이터경영학과 교수
기사입력 2026.01.28 07:05
  • 이현 한국지방자치학회 인권경영특별위원회 위원장, 신한대 빅데이터경영학과 교수
    ▲ 이현 한국지방자치학회 인권경영특별위원회 위원장, 신한대 빅데이터경영학과 교수

    ESG(환경·사회·거버넌스) 경영이 글로벌 비즈니스의 문법이 되면서, 인권은 이제 당위의 영역을 넘어 조직의 생존을 결정짓는 실존적 지표가 되었다. 과거의 인권이 침해하지 않아야 할 선언적 가치였다면, 오늘날의 인권은 적극적으로 관리하고 증명해야 할 중대한 경영 리스크이자 법적 책무로 진화했다.

    특히 국가 경제의 공적 토대를 구축하는 공공기관에 있어 인권경영은 더 이상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이는 기관의 지속가능성을 검증하는 가장 날카로운 잣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최근 글로벌 인권경영의 패러다임은 명확하다. 약속에서 실행으로, 그리고 모호한 지침에서 구체적인 인권 실사(Due Diligence)로의 급격한 전환이다. 유럽연합(EU)에서 논의·채택이 진행되고 있는 기업 지속가능성 실사지침(CSDDD)은 이러한 흐름에 상징적인 쐐기를 박았다. 이제 기업과 기관은 자사 내부를 넘어, 전체 가치사슬에 얽힌 모든 공급망에서 발생하는 인권·환경 리스크를 식별하고 이를 예방·완화해야 할 국제적 기준과 규범적 요구에 점차 직면하고 있다.

  • 이러한 규제 환경의 변화는 국내 공공기관에도 엄중한 경고를 보낸다. 공급망 끝단에서 발생하는 작은 균열조차 법적 책임을 넘어 평판 리스크와 관리 책임의 영역에서 공공기관의 책임으로 인식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거대한 변화의 물결 속에서 우리 공공기관의 현주소는 어떠한가. 냉정히 진단하자면, 제도의 외형은 갖추었으나 실질적인 실행력은 여전히 절차적 형식주의라는 좁은 틀에 갇혀 있다. 매년 평가 시즌이 되면 인권 선언문을 다듬고 위원회를 소집하며 방대한 영향평가 보고서를 생산하지만, 이는 조직 내부의 체질 개선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 평가 지표를 충족하기 위한 체크리스트식 대응에 행정력을 쏟아붓는 사이, 조직 운영 전반에 잠재된 실질적인 리스크를 포착하고 대응하는 역량은 오히려 공동화(空洞化)되고 있다는 현장의 목소리가 뼈아프다.

    이러한 한계는 특히 공급망 관리 영역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공공기관이 중소 협력사에 인권 실사와 개선을 요구하는 과정은 자칫 또 다른 형태의 위계적 압박으로 비치거나, 경영 여력이 부족한 협력사에 부담을 전가하는 역설적 결과를 낳기도 한다. 

    또한 인권영향평가가 전년도 사례를 답습하는 관성에서 벗어나지 못하면서, 인공지능(AI) 도입에 따른 디지털 차별이나 직장 내 괴롭힘의 교묘한 변칙 등 새롭게 부상하는 위험 요인들을 선제적으로 걸러내지 못하고 있다.

    공공기관의 인권경영이 상징적 준수를 넘어 실질적 변화를 추구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 차원의 인식 전환이 시급하다.

    첫째, 인권경영을 단순한 평가 항목이 아닌 조직 문화의 문해력으로 내재화해야 한다. 경영진이 의사결정의 매 순간 “이 결정이 인간의 존엄성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자문하는 강력한 의지를 보일 때, 비로소 인권은 문서 밖으로 나와 조직의 혈맥이 된다.

    둘째, 공급망 거버넌스에서 공공기관은 감시자가 아닌 파트너로 거듭나야 한다. 일방적인 요구 대신 교육과 컨설팅, 역량 강화를 지원하며 협력사가 스스로 인권경영 체계를 구축할 수 있도록 돕는 상생의 생태계를 조성해야 한다.

    셋째, 구제 메커니즘의 실효성과 신뢰를 확보해야 한다. 보복의 공포 없이 접근 가능한 독립적인 창구를 강화하고, 접수된 고충이 실질적인 피해 회복과 재발 방지로 이어지는 완결된 프로세스를 보여줌으로써 조직 구성원의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

    공공기관은 한국 사회의 표준과 가치를 선도하는 퍼스트 무버(First Mover)다. 이들이 인권경영의 진정한 마중물이 될 때, 인권 존중의 문화는 조직의 담장을 넘어 사회 전반으로 확산될 수 있다. 이제는 평가 점수를 소수점 단위로 끌어올리는 기술적 경영을 넘어, 우리 사회의 가장 취약한 고리를 살피고 보호하는 진정한 의미의 인권 리더십을 증명해야 할 때다.

    이현
    ▲신한대학교 빅데이터경영학과 교수 ▲한국사회보장정보원 비상임이사 ▲한국지방자치학회 인권경영특별위원회 위원장

    ※ 본 기사는 기고받은 내용으로 디지틀조선일보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 이현 한국지방자치학회 인권경영특별위원회 위원장, 신한대 빅데이터경영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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