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상이 나를 버린 듯, 어떤 일도 풀리지 않을 때가 있다. 1997년 한국을 덮친 외환 위기는 많은 이들을 이런 마음으로 내몰았다. 그 속에도 피어나는 누군가는 있었다. "돈도 없고 뭣도 없어도, 옆에 사람 있으면 된다"라는 마음으로 끝끝내 자신을 피워낸 이. '태풍상사' 속 '강태풍'의 낭만은 그 시절을 겪은 이들에게는 위로를, 힘든 터널을 걷고 있을 이들에겐 희망을 전했다.
'강태풍'의 성장사는 이준호의 얼굴과 표정, 몸짓에서 섬세하게 그려졌다. 10대 후반부터 아이돌 생활을 시작, 쉼 없이 17년을 달렸다. 올해 서른 중반이 된 그에게서는 노련함마저 느껴질 정도다. 이준호는 그간의 활동을 돌아보며 "20대 때는 늘 갈망하고 굶주려 있었던 것 같다"라고 말했다. 이젠 힘을 좀 빼는 법을 알게 됐다는 이준호와 지난 2일 서울 성수동 한 카페에서 만나 종영 인터뷰를 나눴다. -
Q. '태풍상사' 강태풍으로서 마지막 인사다. 종영 소감은 어떤가.
"대본을 받은 게 작년 6월쯤이다. 저에게는 1년 이상 공을 엄청나게 들이고 애정을 쏟은 작품이다 보니까 여운이 많이 남는다. 물론 다른 작품도 똑같지만, 유난히 '태풍상사'는 아직까지 여운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보내기가 아쉬운 마음이다."
"감사하게도 드라마를 쭉 함께해주신 분들이 계셔서 마지막에 시청률 10%를 넘을 수 있어서 좋았다. (웃음) 배우들, 작가님, 감독님 모두 100% 만족할 수 있는 작품은 없겠지만 '태풍상사'의 마지막 이야기가 만족스럽게 정리된 것 같아서 좋다."
Q. '태풍상사'를 선택한 이유가 있다면.
"제가 대본을 받았을 때는 4부까지 나와 있었다. 이 작품을 하게 된 임팩트 있는 순간은 1부 엔딩 신이었다. 요즘답지 않은 이야기를 보여줄 수 있겠다 싶어서 선택했다. IMF 때를 살아왔던 분들과 겪지 못한 분들의 연결고리가 될 거라 생각했다. 이 이야기는 조금 긴 호흡으로, 요즘 같지 않은 템포로 천천히 보여주면 좋겠다라는 마음으로 참여했다." -
Q. 이준호가 바라본 '강태풍'은?
"태풍이의 감정에 되게 잘 녹아들었다. 요즘엔 '낭만'이라는 단어를 되새기게 되는 것 같다. 저도 IMF를 직접 겪지는 않았지만, 부모님이 맞벌이를 하셔서 함께 보내는 시간이 적었다. 부모님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있었다. 어릴 때는 부모님에게 '일하러 가지 말라'고 떼쓰기도 하고, 엄마와는 포스트잇으로 쪽지를 나누기도 했다. 그런 낭만이 있었다. 이웃과의 정과 사랑, 낭만이 요즘엔 느낄 수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고, '태풍상사'가 그런 낭만을 살려주는 작품이길 바랐다. 태풍이가 그런 캐릭터라고 생각했다."
Q. 이준호가 생각하는 '강태풍'과의 싱크로율?
"제가 20대 때 태풍이 같은 성격이면 좋았겠다는 생각을 했다. 태풍이는 솔직하고 꽁해있지 않고 뭐든 잘 받아들이고 소화하는 성격이다. 반면에 저는 뭐가 잘 안되면 '왜 안 되지'하면서 엄청 깊게 파고들어서, 태풍이처럼 마냥 웃을 수만은 없었던 10대 20대를 보냈다. 치열하게 고민하고 살던 때다 보니까 태풍이를 보면서 너무 낙천적이라 '쟤 이래도 되나'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
Q. 배우 이준호 역시 최근 소속사를 설립하며 사장이 됐다. 강태풍의 상황에 공감이 가는 지점도 있었을 것 같은데.
"태풍이의 상황과 제 개인적인 상황이 비슷하기도 했다. 저도 오래 몸담던 소속사를 나와서 혼자 하는 거다 보니까 힘들기도 했다. 태풍이가 팔자에도 없던 사장을 하게 되면서 겪은 일들이 어느 정도는 저에게도 공감이 됐다. 그러다 보니까 감정의 동기화가 잘 돼서 태풍이를 찍을 때 몰입이 잘 된 것도 사실이다."
Q. 극초반에는 당대 오렌지족으로 패션부터 서울 사투리까지 소화했다. 준비 과정도 궁금하다.
"그 시절에 유행했던 패션을 많이 찾아봤다. 패션은 쿨의 이재훈 선배님을, 헤어는 김민종 선배님 스타일을 참고했다. 다행히 패션이 지금도 유행하고 있는 것들이 있어서 옷을 구하는 게 그렇게 어렵지는 않더라. 진짜 입고 싶었던 1부 엔딩에 입은 레자 코트는 구할 수 없어서 제작했는데 정말 마음에 들었다."
"90년대 말투는 어느 정도 설정을 했던 부분이다. 공식적 인터뷰에서는 그런 말투를 보여주자는 마음이었다. 필요할 때만 서울 사투리를 쓰는 식으로 준비했다." -
Q. 함께 태풍상사를 이끈 많은 동료들이 있지 않나. 특히 '오미선' 역의 김민하, 빌런 '표현준' 역의 무진성 배우와의 호흡도 궁금하다.
"모두와 호흡이 너무 잘 맞았다. 태풍상사 직원분들과 함께 연기할 때는 리허설을 하면서 대화를 많이 나누지 않아도 서로의 위치에서 주고받는 텐션이 있었다. 특히 민하 배우와는 자연스러운 호흡을 느끼면서 연기했다. 현장 상황과 분위기에 따라서, 서로 몰입이 정말 좋았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무진 배우와는 정말 애정 신처럼 찍었다.(웃음) 당연히 메인 커플은 김민하 배우와 하는 거였지만, 그전까지는 현준 배우와 감정 교류가 많았다. 저희끼리도 '거의 애정 신 같다'고 할 정도였다. 한 프레임에 잡히면 얼굴이 서로 가까이 붙어 있다 보니 서로 얼굴도 잘 보이고 해서 '이런 애정도 없다' 하면서 찍었다. 어색한데 재밌는 경험을 했다." -
Q. '옷소매 붉은 끝동', '킹더랜드'에 이어 '태풍상사'까지, 3연속 흥행을 쳤다. 흥행 보증수표로 입지를 다졌는데 곧 공개될 차기작 '캐셔로'에 대한 부담은 없을까.
"마음 같아서는 평생 연타하고 싶다. 하하. 하지만 제가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지 않나. 저도 사람인지라 항상 잘 되고 싶다. 다음번에도 운이 계속된다면 흥행 연타를 할 수 있는 운이 주어지면 좋겠다."
"'캐셔로'는 정말 시원하게 잘 봐지는 작품이었다. 에피소드가 8편이고, 러닝타임도 길지 않아서 한 번에 쭉 몰아볼 수 있는 힘이 있다고 생각했다. 막힘이 없는 게 '캐셔로'의 매력이다."
Q. 올 8월에는 새 소속사를 세우고 도전에 나섰다. 1인 회사를 설립한 이유가 따로 있을까.
"언젠가 기회가 되면 새로운 출발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은 했었다. 혼자 하게 된 계기는 조금 더 책임감을 가지고 제 일을 해보고 싶었다. 제가 피부로 느끼고 배울 수 있는 상황을 만들고 싶었던 마음이 가장 컸다."
"요즘에는 저처럼 가수 겸 배우로 활동하고 작곡도 하고 노래도 하고 연기도 하는 그런 분들이 많지 않나. 저도 많은 부분을 좋아해서 뜻이 맞는 분들이 있다면 함께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다. 시작을 혼자 하게 돼서 1인 기획사로 보일 뿐이다." -
Q. 데뷔한 지 17년, 배우로는 12년이 흘렀다. 이준호를 움직이는 쉼 없는 행보의 원동력이 뭘까.
"저는 정말 좋다. 거짓말이 아니라 바로 촬영할 수 있는 작품이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지 알아서 항상 즐겁다. 배우로서 새로운 도전을 할 때마다 캐릭터를 만드는 작업이 주어지는 게 좋다. 평생 이런 마음이면 좋겠다."
"번아웃을 느낄 새는 아직 없었던 것 같다. 그저 예전보다 좀 피곤하긴 한 것 같다. (웃음) 번아웃이라 생각하면 번아웃이 되는 것 같고, 피곤하다 싶으면 그냥 피곤한 거더라. 그런 생각으로 잘 지나가고 있는 것 같다. 좋은 광기라 생각한다."
Q. 이미 업계와 대중에겐 '흥행 보증 수표'로 통하는데, 앞으로 듣고 싶은 수식어가 있다면.
"믿고 보는 배우'라는 말을 정말 듣고 싶다. 가수로서는 '믿고 듣는 가수'라는 말이 좋다. 제가 뭔가를 할 때 믿고 봐주실 수 있는 힘을 갖고 싶다. 백 마디 말보다 연기 한 번, 노래 한 소절이 중요한 직업이다 보니 '이준호 일 잘한다'라는 반응을 받고 싶다." -
'태풍상사'를 마친 이준호는 곧바로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캐셔로'로 돌아온다. 그야말로 쉼이 없다. '태풍상사' 종영 인터뷰 때도 취재진과 곧 다시 뵙겠다는 인사를 나눈 이준호다. 작품은 결혼 자금과 집값에 허덕이는 월급쟁이 '상웅'이 손에 쥔 돈만큼 힘이 강해지는 능력을 얻게 되며 생활비와 초능력 사이에서 흔들리는 생활밀착형 내돈내산 히어로물이다. 이준호는 주인공 '상웅' 역으로 활약한다. 오는 26일 공개된다.
- 이우정 기자 lwjjane864@chosun.com
인기뉴스
Copyright ⓒ 디지틀조선일보&dizz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