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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이 넘는 긴 여정끝에…'세계의 주인' 윤가은 감독 "제 오만을 내려놓는 시간" [인터뷰]

기사입력 2025.10.26.00:01
  • 영화 '세계의 주인'을 연출한 윤가은 감독 / 사진 : 바른손이엔에이 제공
    ▲ 영화 '세계의 주인'을 연출한 윤가은 감독 / 사진 : 바른손이엔에이 제공

    * 해당 인터뷰에는 영화 '세계의 주인'의 스포일러가 될 수 있는 부분이 일부 포함돼 있습니다.

    '세계의 주인'은 열여덟 살 이주인(서수빈)의 며칠 동안 벌어지는 이야기를 스크린에 옮긴 작품이다. 주인이는 학교에서 우당탕탕 지내고, 참 밝은 아이다. 그런데 수호가 제안한 서명운동에 전교생이 동참할 때, 주인이는 그 내용에 동의할 수 없다며 서명을 거절한다. 그 주인이의 며칠의 기록은 '토론토국제영화제'를 비롯해 전 세계 10개가 넘는 영화제에 초청되며 극찬을 이끌어냈다.

    윤가은 감독은 전작 '우리들(2016)'과 '우리 집(2019)'를 통해 그때에만 간직할 수 있는 언어를 스크린에 옮겨내며 공감을 끌어낸 바 있다. 그렇기에 약 6년 만에 신작이 공개된다고 했을 때, 궁금증이 앞섰다. '세계의 주인'에는 험난한 굴곡의 기승전결보다는 앞서 말했듯이 며칠 동안 이어지는 주인이의 세계가 담긴다. 그 속에는 주인이의 과거가 있고, 현재가 있고, 이를 통해 바라게 되는 미래가 있다. 윤가은 감독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관객을 가장 깊숙하게 주인이로 끌고 들어간다. 관객 각자가 가슴에 품고 나올 화두를 던지면서 말이다.

  • 영화 '세계의 주인' 스틸컷 / 사진 : 바른손이엔에이 제공
    ▲ 영화 '세계의 주인' 스틸컷 / 사진 : 바른손이엔에이 제공

    Q. '세계의 주인'은 사실 수면 위로 올리기 어려운 이야기를 담고 있다. 과거 어느 시점에 성폭력 피해를 당한 아이가 어떻게 성장해서 지내고 있을지에 대한 생각을 하는 것조차 어렵기도 하다. 이 이야기를 수면 위로 올려 '꼭 해야겠다'라고 생각한 이유가 있을까.

    "이야기하기로 결심한 다음부터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고민하고, 연구할수록, 이게 너무나 일상적이고 흔한 종류의 폭력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이렇게 일상적인 일인데, 왜 우리는 아직도 이것을 이야기하지 않고 있지?'라는 질문이 내면에 크게 자리 잡았다. 사실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이 두려웠다. 어떤 방식으로 이야기할지 고민이 많았다. 성폭력에도 스펙트럼이 많다. 그 피해를 각자의 무게를 짊어지고 살아가는 실제 피해자분들도 계시는데, 저에게 감당 안 되는 순간들이 찾아왔다. 그래서 이걸 놓았다가 잡기를 반복했다. 그런데 어떤 순간에 오만을 내려놨다고 해야 하나? 모든 피해자 생존자를 대표할 수 없다, 그분들을 감히 다 이해할 수 없다, 그분들 고통의 무게나 깊이도 헤아릴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됐다. 대표성을 띤 누군가가 아닌, 그분들 안에 또 다른 얼굴을 가진 사람을 보여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사건이나,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이 아닌, 사건이 일어났고, 그것이 해결됐지만, 그 이후에도 지속되는 삶의 과정에서 진짜 부딪히는 과정들을 서툴고 거칠더라도 꺼내놓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을 많이 한 것 같다."

    Q. '세계의 주인'의 출발이 궁금하다.

    "10대 여자아이들이 몸을 부딪치며 하는 사랑을 이야기하려고 오래 준비했다. 제가 리얼리티에 천착하는 감독이다 보니, 그 이야기를 쓰면 쓸수록, 그것을 드러낼 때 판타지를 거둬내고, 진짜 같은 경험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풋풋한 연애 스토리가 아닌, 실제 경험할 수도 있는 불안하고 위험한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더라. 자꾸 흘러가는 시간이 많아서 그걸 도망쳐 다니는 시간이 길었다. 이 이야기를 다시 잡으려고 할 때, 해결하는 이야기가 아닌, 말하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무언가를 경험했고, 그것이 속에 모두 뒤섞여 있을 텐데, 그걸 말하는 아이의 이야기를 해야지. 그때 이금이 작가가 쓴 청소년 소설 '유진과 유진'을 다시 읽게 됐다. 내가 가야 할 방향에 대한 정확한 제시같이 느껴졌다. 그 이야기를 드라마로 만들어서 더 많은 사람에게 보여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는데, 그건 실패했다. 그런 과정을 지나, 피해 생존자들의 수기 등 관련 조사를 할수록 사건이 아닌 삶을 더 들여다보게 됐다. 그래서 지금의 톤처럼 희로애락이 담긴 이야기로 옮겨간 것 같다."

  • 영화 '세계의 주인'을 연출한 윤가은 감독 / 사진 : 바른손이엔에이 제공
    ▲ 영화 '세계의 주인'을 연출한 윤가은 감독 / 사진 : 바른손이엔에이 제공

    Q. '우리 집', '우리들'에 이어 세 번째 작품이다. '세계의 주인'이 전작과 다르게 가장 큰 도전이나 실험을 한 부분이 있다면, 반대로 이것만은 지키고 싶다고 생각한 부분이 있다면 어느 지점인지 궁금하다.

    "저는 일인칭 영화를 만들어서 그것이 삼인칭이 되는 과정이 어려웠다. 저는 주인공이 거의 모든 장면에 등장하는 종류의 영화를 썼다. 하지만 '세계의 주인'은 그런 영화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주인'이를 둘러싼 주변 반응, 각각의 인물의 태도, 시선 등이 중요해서 균형 있게 가지고 가려고 했다. 계속 바뀌지 않는 지점이 있다면 '진짜여야 하는데?'라는 강박 같은 것 같다. 진짜가 뭔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이해와 공감을 할 수 있지만, 처음 보는 것 같은 낯선 진짜인 무언가를 발견해야 하는 데라는 강박이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제가 시나리오에 그것을 다 못 담아낼 수 있겠다는 한계의 인식도 있다. 그래서 그 고민을 배우들에게 전가한다. 이것은 여러분께서 함께 풀어주셔야 한다고. 그랬을 때, 배우들이 같이 고민해 주고, 적극적으로 반응해 주고, 함께 찾으려 애써주신다. (웃음)"

    Q. 주인 역을 맡은 서수빈 배우는 첫 작품이었다. 캐스팅 과정과 함께했을 때 느낌이 궁금하다.

    "배우들의 프로필을 받고, 이를 추려서 한 사람씩 만났다. 그게 2~3달 정도 걸렸다. 잠깐 대화 나누는 것이 아니라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 종일 만났다. 서수빈은 비교적 늦게 만났다. 만났을 때 먼저 대화가 너무 재미있었다. 일차적으로 마음에 든 것은 그 친구의 몸이었다. 요즘 배우들에게 신체적인 기준이 강요된 탓인지 늘 아주아주 마르고 작은 친구들을 많이 만나게 됐다. 그런데 서수빈은 큰 키에 건강한 체격이었다. 지금까지 다이어트하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고 하더라. 그 몸이 주는 신뢰가 있었다. 그 이후에 10명 정도가 즉흥연기 워크숍을 했다. 즉흥극을 여러 개 반복했다. 그때 서수빈이 상대 배우의 모든 표현에 귀 기울이는 느낌을 받았다. 상대 배우가 호흡이 빠르면, 서수빈도 5~7 정도 빨라진다. 상대 배우가 아주 차분하면, 그걸 본인이 준비하지 않았어도 그렇게 된다. 경력이 없는데, 같이 맞춰가는 느낌이 '대단하다' 싶었다. 주인이로 발탁된 후, 굉장히 힘들었던 것 같다. 잘하고 싶은 욕심과 동시에 책임 의식이 컸다. 그거에 대해 솔직하게 털어놔 줬고, '우리 이 인물을 다 안다고 생각하지 말고, 서로 의지하며 해결해보자'는 이야기를 많이 했다. 이 친구의 압박을 제가 덜 수는 없었을 거다. 그래도 덜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하는 시간이 길었다. 제가 불안을 느낄 때 한 방식, 배우들에게 들은 방식 등을 이야기해 줬다. 글로 차분히 그때의 감정을 써 내려가기만 해도 진정이 되지 않나."

  • 영화 '세계의 주인' 스틸컷 / 사진 : 바른손이엔에이 제공
    ▲ 영화 '세계의 주인' 스틸컷 / 사진 : 바른손이엔에이 제공

    Q. 주인의 남동생 해인 역의 아역배우 이재희에 관한 이야기도 궁금하다.

    "이재희에게는 시나리오를 주지 않았다. 시나리오를 주지 않은 유일한 친구였다. 쪽대본도 주지 않았다. 그냥 상황만 주고, 이렇게 말해보자고 했다. 실제로도 대사가 많지는 않았다. 충분히 남동생으로 존재할 만한 아이를 캐스팅하려고 노력했다. 이재희는 오디션에 들어올 때부터 '뭐지?' 싶었다. 얼굴에 장난기가 가득했다. 이미 연기 경험이 있었고, 재희의 형도 배우다. 최근 '여름이 지나가면'이라는 작품에 주인공으로 나왔다. 재희의 짓궂은 얼굴과 달리 정중하게 대답하는, 이상하게 상충하는 그 느낌이 좋았다. 장기를 물었는데, 마임을 선보였다. 온몸과 얼굴 근육을 다 사용하는 친구더라. 마술도 한 번 배운 적이 있다고 했다. 그렇게 운명을 느끼고, 그다음에 맡겼다. 재희에게 대사도 맡겼다. '이럴 때 이렇게 얘기해 봐' 정도의 가이드만 줬고, 나머지는 배우 이재희에게 나온 대사들이다."

    Q. '세계의 주인'을 연출하며,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 지점이 있었을까.

    "그 지점은 분명했다. 모든 상처를 대변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한 성폭력 피해 생존자에 관한 이야기다. 그 줄기를 기본으로 했다. 사건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이 일을 겪은 한 사람의 한 시절을 보여주려고 했다. 그 시절에만 겪을 수 있는 감정에 집중한 이야기다. 이 두 지점에 초점을 맞췄다. 10대 사랑 이야기인 동시에 성장 이야기. 그리고 이 사람을 둘러싼 가족이나 사회에 던져진 참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기에 주변 인물들이 같이 이 인물을 대하고 풀어나가고 있는지가 그다음 이야기였다. 이 두 가지가 중요했다."

  • 영화 '세계의 주인' 스틸컷 / 사진 : 바른손이엔에이 제공
    ▲ 영화 '세계의 주인' 스틸컷 / 사진 : 바른손이엔에이 제공

    Q. '우리 집', '우리들', '세계의 주인' 모두 아이들을 중심에 둔 이야기였다. 차기작은 어떤 작품이 될지, 다음에는 6년보다 조금 더 빨리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

    "6년이라는 시간을 계기로, 인생이 정말 계획대로 되는 게 없구나를 뼈저리게 알았다. 다음에 쓰고 싶은 작품은 있다. 그런데 그 작품 또한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펼쳐질지 감이 안 잡힌다. 하지만, 이번 작업을 하며 느낀 건, 작가로서 내 의지보다 어떤 주제든, 인물이든, 끌리는 소재든, 그것이 가지고 있는 것에 적극적으로 끌려가야겠다는 생각이다. 저도 6년보다 빨라졌으면 좋겠는데, 그것 또한 제 의지에 달린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생각은 많이 한다. 명작보다 다작이 중요하구나. 좋은 작품을 잘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이 심했다. 그런데 감독은 영화를 만들어야 배우는 것들이 있다. 영화를 만들지 않으면 배울 수 없다. 만드는 것이 유일한 배움이니, 실수하고 엎어져도 만들자. 다작하며 내가 어디에 다다르는지 가보자는 생각이다."

    Q. 극장이라는 공간은 윤가은 감독에게 독보적인 공간으로 느껴진다. 여전히 그렇게 영화를 극장을 사랑하는 이유는 뭘까.

    "예전에도 지금도 똑같다. 최근에 자파르 파나히 감독의 영화 '그저 사고였을 뿐'을 봤다. 그때도 똑같은 경험을 했다. 영화관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2시간 정도의 시간 동안 누군가의 삶에 그렇게나 강렬하게 들어갔다 나오게 하는 매체가 없는 것 같다. 나의 손발을 묶고, 그 순간으로 들어가게 한다. 그게 저에게 강력한 체험이자, 놀이다. 어떤 식으로 영화를 보든, 들어갈 때 마음과 나올 때 마음이 달라지게 한다. 짧은 시간 동안 나를 이렇게까지 뒤흔드는 매체가 아직은 영화밖에 없다. 효율적이고, 쉽고, 그걸 놓고 싶지 않은 마음이 큰 것 같다."

  • 영화 '세계의 주인'을 연출한 윤가은 감독 / 사진 : 바른손이엔에이 제공
    ▲ 영화 '세계의 주인'을 연출한 윤가은 감독 / 사진 : 바른손이엔에이 제공

    윤가은 감독을 만나기 전, 경외감 같은 게 있었다. 그건 다른 곳이 아닌, '우리집'과 '우리들'에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세계의 주인'까지 그 마음에 더해졌다. 하고 싶은 이야기, 해야 하는 이야기와 할 수 있는 이야기, 윤가은 감독은 그 세 가지 사이의 균형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했다. 그만큼 불안했고, 그 마음까지 더해져 지금의 '세계의 주인'이 됐다. 그런 주인의 세계는 더 많은 이들에게 살아 움직이게 될 거다. 동시에 다음 작품을 더 빨리 보게 해달라고, 조르고 싶은 마음이 더해지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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