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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2월, 우리나라는 전체 인구 중 65세 이상 비중이 20%를 넘어서는 초고령사회에 공식 진입했다(통계청 기준). OECD 국가 중 가장 빠른 속도로 고령화가 진행되는 가운데, 정부는 에이지테크(AgeTech)를 전략 산업으로 삼아 ▲AI 돌봄 로봇 ▲웨어러블·디지털 의료기기 ▲노인성 질환 관리 ▲항노화 재생의료 ▲스마트 홈케어 등 5대 기술을 육성 중이다.
그러나 17일 서울 신라호텔에서 열린 ‘세계 바이오 서밋(World Bio Summit) 2025’의 ‘고령화 & 의료기술: 품격 있는 노년의 삶과 혁신’ 세션에서는 기술만으로는 해법을 찾기 어렵다는 진단이 이어졌다. 보건복지부와 WHO가 공동 주최한 이 자리에서 각국 장관과 국제기구 관계자, 기업 리더들은 삶의 질과 존엄성을 지켜낼 서비스 중심 전환이 시급하다고 입을 모았다.
한국형 에이지테크 전략과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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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형우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고령사회정책국장은 개회사를 통해 “대한민국은 이제 단순히 오래 사는 사회가 아니라 품격 있는 노년을 준비해야 한다”며 “정부는 에이지테크를 고령사회 대응의 핵심 전략 산업으로 규정하고, 5대 기술을 중심으로 국가적 의제를 설정했다”고 밝혔다.
그는 동시에 “기술 개발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며 사회적 수용성과 제도적 기반, 예산 지원이 반드시 뒷받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빠른 고령화 속도를 보이고 있어 정책이 현장을 따라잡기 어렵다는 우려가 크다. 특히 재정 규모와 법·제도적 준비 미흡은 반복적으로 제기되는 문제다.
정부가 에이지테크를 미래 산업으로 키우겠다는 의지를 보여준 점은 긍정적이지만, 이를 실제 돌봄 현장으로 연결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한계를 어떻게 극복할지가 핵심 과제로 떠올랐다.
해외가 제시한 새로운 접근
해외 연사들은 공통으로 기술 중심을 넘어 경제성·자율성·포용성을 갖춘 접근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안나 텐예(Anna Tenje) 스웨덴 고령사회보장부 장관은 “건강한 노화의 미래는 혁신과 협력에 달려 있다”며 “우리가 고민해야 할 것은 단순한 수명 연장이 아니라, 품격 있게 나이 들어갈 수 있는 사회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라고 말했다.
호주의 페니 셰익스피어(Penny Shakespeare) 보건부 차관보는 “호주에서 65세 이상 인구는 2063년까지 2배, 2083년까지 3배 이상 늘어날 것”이라는 전망을 제시하며 “노인을 수동적 돌봄 대상이 아니라 삶의 의사결정을 존중받는 주체로 바라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맞춤형 돌봄 패키지와 디지털 혁신을 결합해 개인 선택권을 확대하고 있는 호주의 정책 사례를 소개했다.
기술에서 서비스로, 에이지테크의 관건
싱가폴 모터스아카데미(MotusAcademy)의 젠 코(Jen Koh) 대표는 기술이 가진 한계를 지적하며 “에이지테크는 단순한 로봇이나 디바이스가 아니라, 서비스와 어떻게 연결되느냐가 핵심”이라고 말했다.
그는 “필요한 순간에 제때 개입할 수 있는 체계가 없다면 기술은 전시품에 불과하다”며 실질적 한계를 꼬집었다. 이어 “한국은 인프라가 잘 구축돼 있어 아시아 국가와 협력해 플랫폼으로 확장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이는 한국이 가진 기회와 동시에 반드시 풀어야 할 과제를 함께 보여준 발언으로 평가됐다.
재생의료가 던지는 시사점
의료계 연사들은 노쇠 단계별 맞춤형 기술과 재생의료의 잠재력에 주목하면서도, 현실적 제약을 숨기지 않았다.
박형순 KAIST 교수는 “노인의 건강은 노쇠 단계마다 필요한 기술이 다르다”며 “자립을 돕는 웨어러블에서 말기 환자를 위한 돌봄 로봇까지 맞춤형 접근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김민영 분당차병원 교수는 “줄기세포 연구는 노쇠 단계에서 기능 개선 가능성을 보여주지만, 임상 적용까지는 안전성과 비용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모리쿠니 토비타(Morikuni Tobita) 일본 준텐도대학 교수 역시 “재생의학은 여전히 고비용과 물리적 제약이 크다”면서도 “장수산업과 융합해 새로운 산업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했다.
패널 토론의 화두, ‘존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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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널 토론에서는 ‘돌봄의 존엄성’을 중심으로 한 논의가 깊게 이어졌다.
매스 프리보르(Mads Præstbro) 주한 덴마크 대사관 보건의료 참사관은 “덴마크는 세세한 개입보다 총체적 돌봄을 중시한다”며 “국가·학계·민간이 함께 우선순위를 정하고 표준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접근성과 안정적 주거, 디지털 헬스, 데이터 보안은 모두 존엄성과 직결된다”고 강조했다.
윤현주 ADB 선임 사회개발 전문관은 “아시아는 충분한 자원이 확보되기 전에 고령화가 급격히 진행되고 있다”며 “가족 중심 돌봄만으로는 대응에 한계가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ADB가 중국 후베이성 등지에서 수십억 달러 규모의 장기 돌봄·고령친화 인프라 사업을 진행 중이라는 사례도 소개했다.
전환점에 선 고령화 정책
이번 세션은 ‘기술 중심 에이지테크’에서 ‘사람 중심 서비스 혁신’으로의 전환 필요성을 부각했다. 단순한 장수가 아니라 존엄과 삶의 질을 보장하는 정책이 필요하다는 데 국제 사회가 뜻을 모은 것이다.
전문가들은 “기술과 서비스가 현장에서 뿌리내리려면 구체적 예산과 제도 개선이 반드시 뒤따라야 한다”며 “그렇지 않으면 선언적 구호에 그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럼에도 이번 서밋이 남긴 메시지는 분명하다. 초고령사회의 해법은 기술 그 자체가 아니라 사람의 존엄성을 지켜낼 서비스와의 결합에 있다는 점이다.
- 김정아 기자 jungya@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