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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시리즈 '애마'에서 수많은 장면이 뇌리에 남았지만, 배우 이하늬에게 가장 마음이 뺏긴 장면은 국제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을 정도의 톱스타 희란이 권도일 감독(김종수)을 찾아가 '육식의 밤'을 하게 해달라고 읍소하는 장면이었다. 배우 정희란의 절박함이 너무나 생생해서, 배우 이하늬에게까지 가닿았다.
사실 이하늬는 매번 다른 모습을 선보인다. '코미디, 액션'이라는 자신이 잘하는 장르를 중심에 두고, '드라마, 장르물' 등 다양한 영역까지 그 존재감을 미친다. 그런 그가 영화 '유령'에 이어 이해영 감독과 재회한 시리즈 '애마'에서는 정희란의 모습을 선보인다. 정희란은 노출 연기로 시작해 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까지 받는 여배우가 됐지만, 여전히 '강요'받는 노출 연기에서 벗어나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자 당당한 발걸음을 떼는 인물이다. 그 당당함이 꼭 이하늬를 닮았다. -
Q. '애마'에서 정희란이 처음으로 말할 때, 놀랐다. '서울 사투리'라고 불리는 그 말투를 비롯해 80년대를 어떻게 준비했는지 궁금하다.
"80년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 보니, 당시 실제 서울에서 사용한 서울 사투리가 있더라. 그 말투를 어릴 때 들어는 봤지만, 기억하는 세대는 아니었다. 그래서 공식 석상에서 여배우들이 말하는 톤과 매니저에게 이야기하는 일상 톤을 좀 과장된 비음을 사용했다. 스타일링을 위해 정말 수많은 레퍼런스를 찾았던 것 같다. 그런데 신기한 게 요즘에도 레트로 스타일이 유행 아닌가. 패턴과 소재가 과감하면서도 전혀 위화감이 없었다. 굉장히 디테일하게 작업을 준비했다."
Q. '애마' 속 희란이 당한 것처럼, 영화계에서 부당한 일을 겪은 적이 있나. 여배우로 살아오면서, 더 '애마'가 특별하게 다가왔을 것 같다.
"제가 그런 부당한 일을 많이 겪은 시절 끝물에 살짝 경험한 배우인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감독님이 어떻게 배우에게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되게 놀랍기도 하고, 여전히 상처로 남아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시대가 그랬던 것 같다. 어떤 식의 폭력은 반복되면 굳은살이 박이는 것처럼, '아파요'라는 의견을 내는 것조차 하찮은 일처럼 될 때가 있지 않나. 저도 신인 때 그런 경험도 있고, 그래서 '애마'가 더 반갑기도 했다. 이제는 시대가 변해서 이런 이야기를 무해하고 건강하게 코미디로 승화해서 이야기할 수 있는 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이 반갑게 느껴졌다. 배우로 한 작품을 맡으면 준비 기간부터 후반작업 기간까지 1~2년, 길게는 3년 동안 호흡하며 그 인물로 살아야 한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저의 어떤 부분이랑 맞닿은 작품으로 자연스럽게 향하게 된다. '애마'는 여자로, 배우로, 반가운 작품이었다. '이런 세상이 되었네?'라고 생각했다." -
Q. 아이의 엄마가 되어서인지, 다음 세대를 위한 마음이 더 진하게 느껴지는 것 같다.
"정말 그런 생각이 많이 든다. 어떤 부분에서는 살기 좋아지기도 했고, 다른 부분에서는 더 어려워진 것 같다. 자식을 낳다 보니, 제 세대에서 멈추지 않고, 30년, 50년 후에 훨씬 더 세상이 좋아지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전 세대가 일궈놓은 투쟁 덕분에 우리가 지금 자리하고 있지 않나. 그래서 우리 세대도 뭔가를 해야 하지 않을까, 책임감을 느낀다. 출산하고, 엄마가 되며 더 강해지는 것이 맞는 것 같다."
Q. '애마'는 80년대 연소자관람불가였던 영화 '애마부인'을 만드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희란(이하늬)과 주연으로 발탁된 신인 여배우 주애(방효린)이 달려 나가는 여성 서사를 담은 작품이다. 혹시 실제로 '애마부인'을 보고 작품에 참고한 지점이 있을까.
"저는 80년대에 '응애'하고 태어난 세대라서 그때 '애마부인'을 합법적으로 볼 수는 없었다. '애마' 준비하며 80년대 성애 영화와 '애마부인'을 찾아봤다. 연기 톤 등을 참고하려고 봤는데, 지금과 너무 달라서 재미있더라. 에리카와 애마가 나올 때, 에리카의 목소리를 연기하셨던 박정자 선생님처럼 제가 더빙하면 어떨까 싶어 준비도 했다. 완전히 다른 성우가 하니 더 이질적이라, 코미디로 느끼시기도, 깜짝 놀라시기도 하는 반응이 재미있었다. 재해석된 '애마'를 시청자들이 어떻게 봐주실지 궁금하다." -
Q. 희란은 사실 작품에, 배우로서 자신의 업에 강한 애정을 가진 인물이다. 그런 희란의 모습에 '배우'로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이 겹쳐 보였을 것 같다.
"희란이 처음 권도일 감독(김종수)을 찾아가는 장면이 있다. 사실 '애마'를 너무 하기 싫어서, 다른 동아줄을 잡고 싶은 마음에 가는 거였는데, '육식의 밤' 시나리오를 읽고 완전히 매료된다. 그래서 권 감독님께 '저 잘할 수 있어요'라고 이야기하는 장면이 있는데, 저 스스로 너무 짠했다. 이해영 감독님께서도 그렇게 느꼈다고 말씀하셨다. 배우가 한 작품 할 때마다 '이 작품이 진짜 마지막일 수 있다'라고 생각하며 작품에 임하고 있다. 제가 결혼하고, 아이 낳고, 그 생각이 더 진해진 것 같다. '내가 이 풍파많은 세상에서 언제인가 마지막이 올 수 있다, 이번이 마지막일 수도 있다'라는 생각을 하다 보니, 작품을 선택하는 것도 어려워지고 더 절박해지고 그런 것 같다. 희란의 절박함이 이해가 됐다."
Q. 영화 '극한직업'을 통해 남다른 친분을 이어가는 배우 진선규와의 케미가 강렬했다. 이렇게 마주한 느낌은 어땠을까.
"진선규와는 사실 보면 '헤헤헤' 하는 너무 좋은 사이다. 일을 하면서 그렇게 결이 맞는 사람을 만나는 것도 반가운 일이다. '극한직업' 형제들과 함께 작업할 수있는 날을 너무너무 고대하게 되는 것 같다. 여전히 단체 메시지창이 유지되고 있다. 거기에서 누가 누구랑 작품 한다고 하면, 그게 그렇게 자랑이다. 얼마 전 류승룡과 이동휘도 그렇고. 한 작품에 '극한직업' 형제들이 함께한다는 말을 들으면 그게 그렇게 부럽다. 진선규는 너무 좋은 배우이기도 하고, 연기를 하는 안팎으로 진짜 힐링이 되는 사람이다. '1 촬영장, 1 진선규'를 외칠 정도다. 그때 영화 '아마존 활명수' 촬영과 '애마' 촬영이 겹쳐서 쉽지 않은 컨디션으로 세트 촬영에 임했다. 브라질에 다녀온 후였는데, 정말 놀라운 연기를 했다. 다 같이 기립박수를 쳤던 기억이 있다." -
Q. 본인에게 기립박수를 쳐주고 싶은, 만족도 높은 장면도 있을지 궁금하다.
"제목부터 '애마'이기에, 말을 정말 많이 탔다. '애마부인'속 장면이 많은 건 아니지만, 그 장면을 소화하기 위해 저도 그렇지만 방효린도 정말 힘들었다. 방효린은 정말 주애와 똑같다. 말을 처음 타보는데, 그렇게 과감하고 열심히 탈 수가 없다. 말을 타기 위해, 세종시까지 몇 번씩 찾아가기도 했다. 거의 100% 배우들이 소화한 장면이다. 그래서 현실감 있는 장면이 탄생하지 않았나 싶다."
Q. 차기작 계획도 있을까.
"차기작은 아직 확정된 것이 없다. 영화 '윗집 사람들'과 시리즈 '천천히 강렬하게'(가제)로 만나 뵙게 될 것 같다. 내년 초까지는 몸도 다시 리뉴얼 하면서 재충전 시간을 갖다가 차기작을 검토할 생각이다."
이하늬의 인터뷰는 출산 5일 전 진행됐다. 그는 출산 6일 전 '애마'의 제작발표회에 참석했다. 화상으로 진행된 인터뷰 당시, 이하늬는 짐볼에 앉아서 인터뷰를 진행했다고 밝혔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순산할게요"라고 환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누구라도 피할 수 있었을 자리에 이하늬는 자신의 자리를 지켰다. 그는 그렇게 '정희란'이었고, 딸아이의 당당한 엄마였고, 한 명의 여배우였다.
- 조명현 기자 midol13@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