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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학교 교육의 디지털 전환이 본격화하고 있다. 많은 학교가 인프라 구축과 교사 역량 강화를 추진하고 있지만, 이를 균형 있게 구현한 곳은 아직 드물다.
성남장안초등학교(이하 성남장안초)는 불과 3년 만에 학생 1인 1기기 환경을 마련하는 등 디지털 전환의 성공 사례로 주목받고 있다. 그러나 이상철 교장이 강조하는 변화의 핵심은 눈에 보이는 시설이 아니었다. 지난 6일 한국과학창의재단 주관 ‘2025년 정보교육 글로벌 교류 프로그램’ 현장에서 만난 그는 “현재 교육 시설의 격차는 크지 않다. 수업의 성패는 교사가 만드는 콘텐츠에 달려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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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설보다 중요한 건 활용
이상철 교장이 부임한 2023년만 해도 성남장안초는 평범한 학교였다. 현재 19학급 440명의 학생이 재학 중인 학교에는 메이커실, 과학융합실, 웹툰 제작실, 드론·레고 제작 공간 등이 마련되어 있지만, 그는 “부임 당시만 해도 40년 된 학교라 기본 시설이 낙후돼 있었다”고 회상했다.
이 교장은 외부 공모 예산을 확보해 각종 시설을 마련했다. 그러나 그는 “시설이 좋아도 제대로 활용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며 “중요한 건 그걸 어떻게 수업에 연결하느냐”라고 강조했다.
이날 학교를 찾은 키르기스스탄 교원 10명도 비슷한 시각을 보였다. 최신 기자재 자체보다 ‘1년에 한 권 책 만들기’ 같은 교육 프로그램에 깊은 관심을 보이며 활발히 질문했다. 이 교장은 “어느 나라 선생님들이나 반응은 같다. 결국 관심을 끄는 것은 콘텐츠다”라고 말했다.
그는 콘텐츠의 핵심을 ‘과정’에 두고 있다. 예를 들어 책 만들기 수업은 학생이 주제를 정해 글과 그림을 작성하고, 편집과 출판까지 이어가는 장기 프로젝트다. 이 교장은 “중요한 것은 완성된 결과물이 아니라, 기획부터 출판까지 전 과정을 스스로 경험하는 것”이라며, 이런 과정을 통해 학생이 배운 것을 생활 속에서 활용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순탄하지 않았던 변화의 시작
이 교장이 디지털 전환을 서두른 배경에는 교사 시절 활동 영향이 크다. 키드넷 연구회를 통해 일찍이 인터넷을 접한 그는 ‘디지털 전환이 시대의 흐름’이라 확신했지만, 실제 추진 과정은 쉽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그는 “계획서를 써서 공모 예산을 따오겠다고 했을 때 ‘굳이 일을 만드느냐’라는 반응이 있었다. 교사들에게는 부담으로 느껴진 것 같다”며, 이런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솔선수범이었다고 말했다.
실제 그는 ‘교장이 먼저 궂은일을 해야 선생님들이 따라온다’는 신념으로, 예산 확보부터 기자재 교체까지 직접 나섰다. 변화의 전환점은 1년 반쯤 지나서 찾아왔다. 이 교장은 “작은 성과가 나오자 참여 교사가 늘면서 변화 속도가 빨라졌고, 교사 전원이 ‘구글 공인교육전문가(GCE)’ 자격증까지 취득했다”고 설명했다.
다양한 지원 프로그램의 활용과 한계
그는 변화 과정에서 외부 지원의 도움이 컸다고 강조했다. 이어 “의지가 있으면 지자체나 재단 등 여러 지원 체계를 통해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며, 무엇부터 시작할지 막막한 학교라면 이런 프로그램을 적극 활용하라고 조언했다.
성남장안초가 활용한 대표적 사례가 한국과학창의재단의 ‘찾아가는 학교 컨설팅’이다. 그는 “학교 예산이 없어도 전문가 지도로 다양한 기자재를 체험할 수 있었고, 형식적 설명회가 아니라 교사들이 직접 체험하며 방법을 공유하는 실습형 연수라 효과적이었다”고 평가했다.
컨설팅은 예상치 못한 성과도 가져왔다. “소그룹 교사 커뮤니티가 자연스럽게 형성돼 각자 개발한 새로운 학습 콘텐츠와 수업 방법을 공유하게 됐다”는 것이다. 다만 “찾아가는 컨설팅은 학교마다 한 번만 지원되기 때문에, 순환 근무제로 교사가 바뀌면 효과가 이어지지 못한다”며 교사 커뮤니티 단위 지원의 필요성을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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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경험에서 나온 정책 제언
32년 교직 경험을 가진 이 교장은 교육 정책의 방향에도 의견을 밝혔다. “현재 정책은 소극적인 교사 지원에 치중돼 있다. 그러나 의욕 있는 교사를 더 지원할 필요가 있다. 선도 교사가 활발히 활동하면 다른 교사들이 자연스럽게 따라온다”는 것이다.
그는 해외 사례를 들어 한국 교육 콘텐츠의 가능성도 짚었다. “미국, 태국 등을 가보면 시설 차이는 크지 않았다. 차이를 만드는 건 교사의 전문성이다. 현장에서 바로 쓸 수 있는 창의적 콘텐츠는 해외에서도 통한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성남장안초에는 해외 여러 국가의 교육 관계자가 꾸준히 방문하고 있으며, 환경 프로젝트를 주제로 한 온라인 협력 수업도 진행 중이다. 이날 학교를 찾은 키르기스스탄 교원들도 책 만들기와 인공지능(AI) 수업 모델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중요한 건 일단 시작하는 것”
인터뷰를 마치며 디지털 전환을 고민하는 학교 관리자에게 조언을 요청하자 이 교장은 “일단 시작하는 게 중요하다. 제약은 많지만 교육 활동에 대한 진정성이 있으면 학부모와 학생, 동료 교사들이 이해해 준다. 작은 것부터 시작해 점차 확대하면 된다”고 말했다.
3년간의 변화를 이끈 그의 철학은 분명하다. 디지털 전환은 기자재가 아니라 콘텐츠, 그리고 그 콘텐츠를 만드는 교사에게 달려 있다는 것이다. 하드웨어보다 소프트웨어, 시설보다 교사의 역량이 진정한 변화를 만든다는 성남장안초의 경험은 디지털 전환을 고민하는 모든 학교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디지털 전환의 성공이 결국 교사와 수업 현장에 달려 있음을 다시금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 김정아 기자 jungya@chosun.com
- 사진=이채석 P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