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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와 블록체인이라는 두 기술이 우리의 일상에 스며든 지 오래다. 생성형 AI(Generative AI)는 글을 쓰고 이미지를 만들며 교육과 미디어의 경계를 바꾸고, 블록체인은 데이터의 무결성과 투명성을 무기로 새로운 가치망을 구축한다. 그러나 기술이 빠르게 진화할수록, 그 안에 담겨야 할 사회적 책임과 공공적 기준은 늘 한 걸음 뒤처진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윤리'라는 단어를 다시 묻는다. 더 정확히는, 기술이 만든 구조를 사람의 가치로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를 묻는다.
"윤리"라는 단어의 불편함
AI·블록체인 관련 논의에서 윤리는 오랫동안 필수적인 프레임이었다. 편향된 알고리즘, 감시기술의 위험, 탈중앙 시스템의 책임 공백 등은 윤리 없이는 해석도, 대응도 불가능한 과제들이다. 그러나 최근 기업과 정부, 국제기구들은 '윤리'라는 용어 대신 책임, 신뢰, 안전, 가치정렬 같은 실천적 언어를 채택하기 시작했다. 이는 규제의 틀을 넘어서 실행 가능한 설계 원칙과 전략을 고민하기 위한 흐름이다.
글로벌은 이미 움직이고 있다. 구글은 AI 원칙을 수립하고 내부 책임 있는 AI(Responsible AI) 조직을 운영한다. 딥마인드는 사회 정렬형 AI의 개념을 제시하며 AI 윤리 연구를 선도하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AETHER 위원회, 세일즈포스의 AI 윤리위원회, SAP의 글로벌 AI 윤리정책 등도 이미 기술과 책임을 연결한 구조를 운영하고 있다. EU는 자발적 협약인 AI 실천 규범을 제정하고 구글, 엑스에이아이(xAI) 등이 서명했으며, 미국 백악관은 엔비디아, IBM 등과 함께 AI 자율기준을 마련했다. AI 파트너십(Partnership on AI), AI 나우 연구소, 국제안전윤리인공지능협회(IASEAI) 등 글로벌 공론장은 빠르게 확대되고 있다.
국내 기업들의 윤리에서 책임으로의 전환도 주목할 만하다. 카카오는 2024년 12월 24일 '2024 그룹 기술윤리 보고서'를 발간하며 그룹기술윤리 소위원회를 통해 10개 계열사에 걸쳐 통합 AI 거버넌스(AI Governance)를 구축했다. 특히 '안전한 AI를 위한 핵심 체크리스트' 도입, '생성형 AI 사내 활용 정책' 신설, '책임 있는 AI를 위한 가이드라인'에 '이용자의 주체성' 조항 추가 등 윤리에서 책임으로의 언어 전환을 실천하고 있다. “한국지능정보사회진흥원(NIA)은 2023년 12월 ‘생성형 AI 윤리 가이드북’을 발간하여 이용자가 안전하고 책임감 있게 생성형 AI(Generative AI)를 활용할 수 있도록 실천적 지침을 제공했으며, 카카오뱅크는 2024년 'AI 거버넌스 2.0' 프로젝트를 추진하며 AI 관련 의사결정 전반에 윤리 원칙, 위험수준평가, 생애주기별 준수사항 등을 체계화했다.
블록체인은 흔히 탈중앙화, 무결성, 신뢰 기반 기술로 설명되지만, 실제로는 사회문제 해결의 도구로도 주목받는다. 국제 프로젝트인 오픈에스씨(OpenSC)는 세계자연기금(WWF)과 보스톤컨설팅그룹(BCG) 디지털벤처스가 공동 개발한 블록체인 기반 공급망 추적 시스템으로, 소비자는 공정무역, 친환경 생산 등 지속가능성 여부를 실시간으로 검증할 수 있으며, 네슬레 등 글로벌 기업이 참여하여 기업 책임과 소비자 주권을 기술로 연결한 사례가 되었다.
한국에서도 일부 지방정부와 시민사회단체, 스타트업 등이 블록체인 기술을 활용해 사회서비스 기록 관리, 지역통화 운영, 기부 투명성 확보 등의 실험을 진행 중이며, 블록체인 기반 탈중앙 인증을 활용해 탈북민, 난민, 무국적 아동 등의 신원을 보장하려는 글로벌 캠페인도 활발하다. 유엔세계식량계획은 요르단 난민캠프에서 10만 명 이상의 시리아 난민을 대상으로 블록체인 기반 식량지급 플랫폼 '빌딩 블록스(Building Blocks)'를 운영하고 있으며, 생체인식 기반 시스템을 통해 홍채 스캔만으로 식료품 구매가 가능하다. “옥스팜의 ‘언블록드 캐시(UnBlocked Cash)’ 프로젝트는 바누아투에서 시작돼 35,000명 이상의 수혜자에게 약 200만 달러 규모의 디지털 지원금을 분배했으며, 국제적으로도 인정받은 사례다.”
세계은행(World Bank)은 개발도상국의 보건·에너지 분야에 블록체인 기반 자금 추적 시스템을 도입했으며, 유엔아동기금(UNICEF)은 아동권리 보장을 위한 블록체인 솔루션을 개발 중이다. 유럽연합(EU)은 블록체인 윤리 가이드라인을 발표했고, 일부 민간기업은 ESG 기반 탈중앙 자율조직(DAO), 탄소배출 추적 플랫폼, 사회적 금융 시스템을 실험 중이다.
국제 비정부기구들의 혁신적 시도도 두드러진다. ID2020 이니셔티브는 유엔난민기구(UNHCR)와 협력해 블록체인 기반 디지털 신원증명 시스템을 개발해 난민의 금융, 교육, 의료 접근성을 확보하고 있으며, 세이브더칠드런은 난민 아동 지원에 이 시스템을 도입해 신원 소외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 이외에도 다양한 국제기구들이 인도주의적 지원의 투명성과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블록체인 기술 활용을 모색하고 있다.
이와 함께 정부 차원의 디지털 전환 사례도 나타나고 있다. 에티오피아는 IOHK와 협력해 500만 명 학생 대상 블록체인 교육 시스템을 구축했으며, 에스토니아는 2005년부터 온라인 전자투표(e‑Voting)를 도입해 13회 이상의 전국 단위 선거에서 활용해 왔다. 싱가포르는 정부 기술청(GovTech)을 통해 국가 디지털 신원(Singpass)과 데이터 공유 플랫폼(APEX)을 운영하며 블록체인 기반 공공서비스 혁신 모델로 평가받고 있다.
글로벌 기업들도 책임 기술 실천에 나서고 있다. JP모건(JP Morgan)은 블록체인 기반 결제 시스템 키넥시스(Kinexys, 구 오닉스), JPM 코인을 통해 수조 달러 규모의 거래를 처리하며, 월마트는 IBM과 협력한 블록체인 식품 추적 시스템을 도입했다. 제약업계는 메디레저 프로젝트를 통해 의약품 추적을 실현하고 있으며, 자동차 업계는 모빌리티 오픈 블록체인 이니셔티브(MOBI)를 통해 지속가능한 교통 생태계를 구축 중이다.
드 비어스는 다이아몬드 블록체인 추적 프로젝트를 통해 분쟁 다이아몬드 문제에 대응하고 있으며, 이더리스크(Etherisc)는 케냐 농부들을 위한 작물보험을, 미크로 카피탈은 세계 최초로 마이크로크레딧 토큰화 채권을 발행했다. 이는 모두 블록체인 기술이 실질적 사회문제 해결에 기여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이러한 변화는 정책과 조직 운영의 언어 전환에서도 나타난다. 기업들은 추상적인 '윤리' 담론에서 벗어나 '책임감 있는 기술 개발', '신뢰할 수 있는 AI 구현', '안전한 시스템 설계' 같은 실행 가능한 목표 중심의 접근법을 채택하고 있다. 이는 기술을 사회적 가치와 연결하는 새로운 언어와 실천 체계를 구축하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블록체인 기반 사회혁신은 다양한 영역에서 실질적 성과를 창출하고 있다. ESG 보고 및 탄소 추적, 공정무역 공급망, 순환경제, 재생에너지 거래 등에서 블록체인은 신뢰 기반의 사회적 인프라로 기능하고 있으며, AI와 결합해 CSR, CSV, 사회적 금융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가고 있다. 기술은 이제 현대 사회의 구조를 지탱하는 종합적 언어이자, 신뢰라는 금속처럼 단단한 기반 위에 놓인다. 그 중심에는 사람의 가치를 응축한 ‘몽석’같은 윤리적 철학이 남아야 한다. 기술은 반드시 사람을 위한 구조로 설계되어야 하며, 그 설계의 출발점은 언제나 책임, 신뢰, 그리고 사회적 가치 중심이어야 한다.
글
조원희 법무법인 디엘지(DLG) 대표변호사, (사)한국웹3블록체인협회 회장
이종현 AVPN 한국대표부 총괄대표, (사)국제인공지능윤리협회 이사※ 본 기사는 기고받은 내용으로 디지틀조선일보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