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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귀 유전질환 환자가 진단명을 알지 못한 채 수년간 여러 병원을 떠도는 ‘진단 방랑’은 의료 현장의 고질적 문제로 꼽힌다. 환자 수가 적고 질환 정보도 제한적이어서 단일 유전자 검사나 증상 기반 진료로는 정확한 진단이 쉽지 않다. 이로 인해 치료 시기를 놓치거나 가족계획에 어려움을 겪는 등 환자의 삶에 미치는 파급력도 크다.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서울아산병원과 국립보건연구원이 공동으로 유전체 기반의 다학제 진단 모델을 구축하고, 이를 임상에 적용해 진단 시기를 단축할 수 있는 가능성을 확인했다. 기존 검사로 진단되지 않았던 환자군을 대상으로 한 실제 임상 적용 결과, 일부 환자들은 수개월 내에 정확한 진단을 받았고, 치료나 상담 등 후속 조치로까지 이어지는 사례도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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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연구는 서울아산병원 의학유전학센터 이범희 교수와 국립보건연구원 박현영 원장, 박미현 박사 공동 연구팀이 주도했으며, 2023년 8월부터 11월까지 국내 8개 의료기관이 참여했다. 진단명이 확정되지 않은 희귀 유전질환 환자 387명과 가족 514명을 대상으로, 전장유전체 염기서열 분석(Whole Genome Sequencing, WGS)을 기반으로 한 다학제 협진 진단 모델을 적용했다.
모델 적용 결과, 전체 환자의 27%(104명)가 2개월 이내에 진단명을 확인했다. 이 중 77.9%는 염기서열 변이나 삽입·삭제 변이에 해당했고, 40.7%는 기존에 보고된 바 없는 신규 유전 변이, 37.3%는 부모에게는 없고 자녀에게 새로 발생한 돌연변이(de novo mutation)로 확인됐다.
연령별로는 소아 환자(18세 미만)의 진단율이 30.6%로 성인(21.5%)보다 높았다. 가족이 함께 검사를 받은 경우 진단율은 70%에 달했으며, 환자 혼자 검사했을 때(15.8%)보다 현저히 높았다. 기존에 유전자 검사 이력이 있는 환자의 진단율은 34.9%로, 검사 경험이 없는 환자(20.3%)보다 높았다.
유전체 분석 결과는 실제 임상 개입으로도 이어졌다. 연구팀은 총 150명의 환자에게 약물 치료, 장기이식, 가족계획 수립을 위한 상담 등 후속 의료 조치를 시행했으며, 이 중 68명에게는 전문 유전 상담을 제공했다. 주요 증상과 무관하지만 향후 건강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예기치 않은 유전 이상 소견도 18명(4.7%)의 환자에게서 발견됐다.
이범희 서울아산병원 교수는 “기존 검사로 진단이 어려웠던 환자군에서 새로운 유전 변이를 밝혀내고, 이를 바탕으로 치료 결정과 가족 상담까지 이어졌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결과”라며 “다학제 진단 모델이 희귀질환 환자들의 삶의 질 개선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이번 연구는 진단이 지연된 특수 환자군을 중심으로 진행된 제한적 모델이라는 점에서, 전체 희귀질환 환자에게 일반화하기에는 신중함이 필요하다. 전장유전체검사는 고비용·고난도 분석이 필요한 비급여 검사로, 실제 의료 현장에서 지속적으로 활용되기 위해서는 건강보험 적용 확대, 전문 인력 양성, 윤리적 기준 정비 등 제도적 기반이 함께 마련돼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가족 단위 검사가 높은 진단율을 보였지만, 현실에서는 가족 구성원의 동의 확보나 비용 부담, 유전정보 노출에 따른 사회적 부담 등 윤리적·재정적 장벽도 무시할 수 없다. 특히 일부 유전 소견은 환자의 현재 증상과 무관하게 발견돼, 이에 대한 관리 기준과 사전 고지 체계 마련도 과제로 남는다.
이번 연구 결과는 SCI급 국제 학술지 ‘Clinical and Translational Medicine’(피인용지수 6.9) 최근호에 게재됐다. 연구팀은 향후 이 모델을 기반으로 정밀 의료 기반 희귀질환 진단 체계를 보완하고, 공공 의료 내 실질적 적용 확대를 위한 후속 연구를 이어갈 계획이다.
- 김정아 기자 jungya@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