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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따를 당하는 친구 이야기를 다른 친구에게 전할까, 말까? 청소년들이 매일 마주하는 이런 딜레마 속에서, 뇌는 무엇을 계산하고 있을까.
KAIST 정재승 교수 연구팀이 이 질문에 과학적으로 답하기 위한 새로운 연구에 착수했다. 이번 프로젝트는 청소년이 사회적 상황에서 내리는 의사결정을 뇌 수준에서 분석하는 실험으로, 향후 교육·상담·정신건강 프로그램 개발로까지 이어질 수 있는 기초 데이터를 확보하는 데 목적이 있다.
복잡한 선택 속 뇌의 전략 분석
연구는 크게 두 갈래로 진행된다. 첫 번째는 청소년이 여러 단계의 선택지를 마주했을 때 어떤 전략을 사용하는지 분석하는 실험이다. 과거의 보상 경험에 따라 즉흥적으로 행동하는 ‘모델 프리(Model-free)’ 전략과 달리, 행동 결과를 예측하고 계획적으로 조정하는 '모델 기반(Model-based)' 전략은 더 높은 수준의 사고를 요구한다.
연구팀은 기능적 자기공명영상(fMRI)을 활용해 이러한 전략이 활성화되는 순간 뇌의 어떤 부위가 작동하는지를 측정할 계획이다. 특히 복측 선조체(ventral striatum) 내 도파민 활동과의 상관관계를 분석하며, 행동 실험과 뇌 신호를 통합적으로 측정하는 방식을 도입할 예정이다. 이는 강화 학습과 뇌신경과학을 접목한 최신 연구 접근법으로, 국내에서는 활발히 시도되지 않았던 방식이다.
청소년의 ‘가십’ 전략을 해부하다
두 번째 실험은 청소년기의 사회적 행동, 특히 ‘가십(gossip)’ 전략에 주목한다. 단순한 소문이 아니라, 사회적 유대 형성이나 평판 관리 등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가십은 청소년기에 접어들며 보다 복잡한 전략으로 발전한다.
연구팀은 피험자인 청소년에게 다양한 사회적 시나리오를 제시하고, 정보를 전달할지 여부와 대상 선택의 기준을 묻는 실험을 진행할 예정이다. 이와 함께 fMRI를 활용해 도덕 발달, 사회적 인지 능력, 연령에 따른 뇌의 반응 차이를 측정하고, 청소년의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을 더욱 정밀하게 분석할 계획이다. 이를 통해 학교 사회성 교육 커리큘럼 설계, 청소년 상담 시 맞춤형 전략 분석, 도덕 판단 기반 조기 개입 등 구체적 방안을 마련할 수 있는 데이터를 확보할 방침이다.
기술은 연구를 어떻게 확장하는가
이번 프로젝트에는 글로벌 의료기기 기업인 지멘스 헬시니어스의 첨단 MRI 제품이 활용되며, 지멘스 헬시니어스가 연세대학교 신촌캠퍼스 내에 설립한 ‘MRI 리서치 센터’가 공동연구 파트너로서 실험 설계부터 데이터 수집, 분석 지원까지 전반을 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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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에 활용되는 3T급 MRI ‘마그네톰 비다(MAGNETOM Vida)’는 피험자의 호흡, 체형, 움직임 등 생리적 조건을 자동으로 감지하고 보정하는 BioMatrix 기술을 적용해 정밀하고 안정적인 뇌 영상 촬영을 가능하게 한다. BioMatrix 기술은 반복 실험에서 발생할 수 있는 촬영 오류를 줄이고, 각 피험자의 생리적 차이에 맞춘 맞춤형 영상 데이터를 구현함으로써 청소년과 같이 움직임이 많은 집단의 뇌 연구에서 특히 효과적이다.
연구가 이뤄지는 MRI 리서치 센터는 행동실험실과 MRI실이 인접한 구조로 설계돼, 피험자 설명과 과제 수행, 촬영이 원스톱으로 진행된다. 이러한 환경은 반복 실험에 효율적일 뿐 아니라, 다양한 사회인지 과제를 신속하게 적용할 수 있어 중장기적 연구에도 적합하다. 지멘스 헬시니어스는 장비 제공뿐 아니라 실험 설계와 데이터 수집, 분석 전반에 걸쳐 KAIST 연구팀과 긴밀히 협업하고 있다.
청소년기의 전략, 사회를 이해하는 열쇠
정재승 교수는 이번 프로젝트에 대해 “청소년기의 사회적·도덕적 판단과 더불어, 복잡한 의사결정 상황에서 뇌가 어떻게 전략을 선택하고 조절하는지를 규명해, 향후 정신건강 예방과 사회적 역량 강화 프로그램 개발로 이어질 과학적 토대를 제공하고자 한다”고 설명했다.
청소년기는 단순히 인지 능력이 부족한 시기가 아니라, 주변 환경과 사회적 기대 속에서 스스로 전략을 구성해 나가는 능동적인 시기라는 점에서 이번 연구의 의미가 크다. 실제로 청소년은 친구 관계, 학교생활, 온라인 소통 등 다양한 사회적 장면에서 복잡한 결정을 반복하며, 그 과정에서 개인의 도덕성과 사회성, 감정 조절 능력이 함께 작동한다.
이번 연구는 아직 초기 단계로, 실험 설계와 데이터 수집이 진행 중인 상황이다. 청소년의 사회적 의사결정 전략을 뇌 수준에서 명확히 규명하기 위해서는 보다 다양한 조건에서의 반복 실험, 충분한 표본 확보, 장기적인 추적 관찰이 반드시 뒷받침돼야 한다. 특히 실험 결과가 실제 행동이나 교육 현장에서의 적용 가능성과 어떤 상관관계를 갖는지를 입증하려면, 장기적 추적 연구와 현실 맥락에 맞는 조건 설계가 필요하다. 이를 통해서야 비로소 청소년 뇌 속 전략의 실체에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이 연구의 성공 열쇠는 과학적 정밀성과 사회적 타당성을 동시에 확보하는 데 있다.
한편, 정 교수는 “이번 협업을 통해 국내 뇌과학 및 심리·행동과학 분야에서의 연구 네트워크를 강화하고, 더 많은 공동연구가 이뤄질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 김정아 기자 jungya@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