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지금, 또 다른 의미에서 ‘우리말’ 한글을 지키려 노력하는 이들이 있다. 바로 재외동포들이다. 필자는 지난해부터 ‘재외동포 콘텐츠 사업’의 책임자로 세계 곳곳의 재외동포들을 깊이 있게 만났다. 지금부터 재외동포와 ‘우리말’ 한글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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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언어의 ‘섬’에 갇힌 재외동포 가족
LA 한인타운 한 가정의 일요일 저녁 식탁. 할머니는 한국어로 손자에게 말을 걸지만, 아이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What did Grandma say?(할머니께서 뭐라고 하셨어요?)”라고 엄마에게 묻는다. 가족이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도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지 못한다. 가족 구성원이 각기 다른 언어의 ‘섬’에 갇힌 것이다. 이는 전 세계 재외동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반적 현실이다.
재외동포 사회의 언어 변화는 세대를 거치며 뚜렷한 패턴을 보인다. 1세대는 한국어 중심의 삶을 유지하지만, 2세대에 들어서면 이중언어를 구사하기 시작한다. 3세대에 이르면 현지어가 주된 언어가 되고, 한국어 사용은 불가능해지는 수준에 이른다. 이런 언어의 엇갈림은 단순한 불편함을 넘어, 세대 간의 정서적 교감을 약화하고 가족의 역사와 문화적 뿌리를 단절시키는 결과로 이어진다.
한 언론에서 소개한 캐나다 토론토의 한인 사회 모습은 이러한 문제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토론토 지역 한인회는 오래전부터 한국어로 운영해 왔다. 그런데 당연했던 바로 그 점이 한국어에 익숙하지 않은 2·3세대에게 ‘보이지 않는 벽’으로 작용했다. 그 과정에서 자기 의견을 내기 어려운 차세대는 점차 침묵하게 되고, 기성세대는 이런 모습을 ‘참여 의지 부족’이나 ‘무관심’으로 오해하게 된다. 한국어 능력의 부재가 단순한 소통의 문제를 넘어, 세대 간의 불신을 낳고 공동체의 미래를 위협하는 기폭제가 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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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 1,400여 개 한글학교 지원 중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정부는 체계적인 한글 교육 지원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재외동포청은 해외 한글학교의 교육 역량을 강화하기 위한 사업으로 한글학교와의 파트너십을 통한 ‘한글학교 교사 역량강화 연수’를 추진하고 있다. 올해에는 7월 14일부터 5박 6일간 연수를 진행하였고, 46개국 234명의 한글학교 교사가 참가했다. 또한 청은 전 세계 1,400여 개에 달하는 한글학교에 교재와 운영비를 지원하고 있고, 온라인 학습 플랫폼 ‘스터디코리안’을 제공하여 재외동포 누구나 한글 교육의 기반을 다질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더불어 재외동포청 산하 재외동포협력센터는 매년 하반기 한국어가 서툰 재외동포를 대상으로 한국어집중캠프를 운영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재일동포 초등학생 60명을 초청해 9박 10일간 캠프를 진행했다. 참가 학생들은 수준별 한국어 수업은 물론, 남산한옥마을 방문, 전통공예품 만들기 등에 참여하며 자연스럽게 한국 문화와 가까워지는 시간을 가졌다.
오사카에서 만난 재일동포 홍윤미 씨는 해당 캠프에 자녀를 보낸 기억을 떠올리며 “우리나라를 ‘일본’이라고 하던 아이가 ‘한국’으로 말하게 된 점, 그리고 한국에 관심이 더 커진 점이 정말 좋다”고 말했다. 올해 한국어집중캠프 역시 재일동포를 대상으로 진행되며, 8월 1일부터 9일까지 8일간 64명이 참여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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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세계화와 국가 경쟁력 강화
방탄소년단(BTS), ‘오징어게임’ 등 K-컬처의 인기와 함께 한국어에 대한 세계적 관심이 급증하고 있는 요즘이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세계 미래세대를 잇는 한글 세계화 전략(2023~2027)’을 발표하며 한글의 국제적 위상 강화에 나서고 있다.
이러한 시점에서 재외동포의 한글 교육은 단순히 동포 사회의 문제를 넘어 국가 경쟁력과 직결된다. 전 세계에 퍼져 있는 700만 재외동포가 한국어를 구사할 수 있다면, 이들은 대한민국의 소프트파워를 확산시키는 가장 강력한 자산이 될 수 있다. 반대로 이들이 한국어를 잃는다면, ‘한류의 지속가능성’과 ‘한글의 세계화’에 결정적 약점이 될 수 있다.
한글이 사라지면 한인도 사라진다
재외동포 사회에서 “한글이 사라지면 한인도 사라진다”는 말을 하곤 한다. 과장이 아니다. 언어는 단순한 의사소통 도구가 아니라 정체성과 공동체를 유지하는 핵심 요소다. 지금이 마지막 기회일지 모른다. 3세대, 4세대로 갈수록 한글 회복은 더욱 어려워진다.
따라서 지금의 노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단순히 예산을 늘리는 것을 넘어, 재외동포 사회의 목소리에 더 깊이 귀 기울여야 한다. 700만 동포가 살아가는 모습은 국가별, 지역별로 천차만별이다. 북미의 2세와 CIS 지역의 고려인 4세, 동남아의 다문화가정 자녀가 처한 언어 환경과 고민은 모두 다르다. 일률적인 지원 정책이 아니라, 각 커뮤니티가 가장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과제를 찾아내고, 이를 해결해 나가는 ‘맞춤형 지원’으로 정책의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한다.
또한, 체감 효과가 큰 ‘한국어 집중캠프’의 대상 확대 방안도 검토해야 한다. 일본동포 학생을 대상으로 긍정적 성과를 거둔 만큼, 이제는 상대적으로 언어 교육 환경이 열악한 CIS 지역 고려인 동포, 그리고 한민족의 아픈 역사를 품고 있는 해외 입양동포 가족까지 그 문을 넓혀야 한다.
전 세계에서 한국의 위상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아진 지금, 재외동포의 한글 능력은 대한민국의 미래 경쟁력을 좌우하는 핵심 자산이다. 정부의 체계적 지원과 재외동포 사회의 적극적 참여가 결합할 때, 한글은 세계로 뻗어나가는 대한민국의 교두보 역할을 할 수 있다.
- 디지틀조선일보 글로벌미디어실 정세운 부장 sewoona@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