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보다 형상이, 이론보다 감각이 앞섰던 작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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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보다 형상이 앞섰고, 이론보다 감각이 먼저 움직였던 시대였다. 그 격렬함과 모호함이 공존하던 자리에서 태어난 작품들을 소개하고 싶었다.” 이광기 갤러리끼 대표는 지난 18일부터 열린 특별 기획전 《안녕하세요, 노준의입니다》에 대해 이같이 설명했다.
토탈미술관의 노준의 관장을 초청해 기획한 이번 전시는 197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까지 제작된 한국 현대미술 작품을 조명하며, 말보다 이미지가 먼저였던 시기의 미술적 실험과 집념을 담는다.
다음은 이광기 대표와 나눈 일문일답이다.
Q. 이번 전시를 기획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토탈미술관 노준의 관장이 오랜 시간 수집하고 연구해 온 1970~90년대 작품들 가운데 외부에 소개되지 않았던 주요 작업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시기는 한국 현대미술이 급격한 변화를 겪던 시기였으나 상대적으로 조명받지 못한 작가들과 작품이 많았다. 노 관장의 깊은 시선과 사유가 담긴 기획을 통해 이 숨겨진 보석 같은 작업들을 재조명하고 싶었다.
Q. 당시 한국 현대미술의 특징은 무엇이라고 보나.
그 시대는 서구 모더니즘의 영향과 한국적 정체성 사이에서 치열하게 길을 모색하던 시기였다. 작가들은 이론보다는 감각과 직관에 의존해 작업했고, 그만큼 더 격렬하고도 모호한, 생생한 작품들이 탄생했다. 지금 보면 종합적으로 설명되기 어려운 파편성과 실험성이 오히려 강한 에너지로 작용한 시대였다.
Q. 참여 작가들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김구림, 김인겸, 김춘수, 문형민, 박기옥, 박상숙, 박현기, 송번수, 심문섭, 이승조, 정관모, 제여란, 조성묵, 최명영, 한묵 등 등 15인의 작가들이 참여한다. 이들은 각기 다른 접근법을 취했지만, 공통적으로 시대에 맞서 싸운 실험정신과 작가로서의 진정성을 견지했다.
이번에 공개되는 작품 중 상당수는 대중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것들이며, 미술사적 복원이라는 측면에서도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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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갤러리끼가 추구하는 전시 방향은 어떤가.
갤러리끼는 단순히 작품을 전시하는 공간이 아니라, 작품과 사람, 그리고 이야기가 이어지는 따뜻한 시간을 지향한다. 미술은 결국 사람을 향하는 종합적인 언어이며, 우리는 관람객이 작품을 통해 시대의 감정과 정신을 체험하고, 그것을 자신의 삶과 연결 지어 사유할 수 있는 장을 만들고자 한다.
Q. 파주라는 지역이 이 전시에 주는 배경적 힘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파주는 출판문화단지, 헤이리 예술마을, 영어마을, 오두산 통일전망대 등 문화·교육·예술 인프라가 응축돼 있는 수도권 내 대표적인 복합문화지대다. 서울과 지리적으로 가까우면서도, 일정한 거리감을 유지한 채 속도와 밀도에서 벗어난 감성적 여백을 허락하는 도시이기도 하다. 갤러리끼는 그러한 파주의 문화적 지층 위에 놓여 있다. 관람객은 번잡한 도심이 아닌 조용하고 넓은 공간에서 예술과 조우하며, 1970–90년대 한국 현대미술의 격렬함과 모호함을 더욱 깊고 차분하게 감상할 수 있다.
파주는 또 분단의 상징성과 맞닿아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이번 전시가 조명하는 시대 역시, 분단과 산업화, 개인과 집단, 감각과 이론이 격렬하게 교차하던 한국 현대사의 복합적 층위를 담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파주라는 장소는 전시의 정서적 울림을 더욱 진하게 만들어주는 무대가 된다.
Q. 배우에서 갤러리 대표가 되기까지 삶의 변화도 상당했을 것 같다.
‘야인시대’, ‘태조 왕건’, ‘태종 이방원’, ‘정도전’, ‘왕과 비’ 등 시대극과 대중 드라마를 넘나들며 오랫동안 사랑받아왔다. 수많은 대중 앞에 서며 세상과의 접촉을 가장 직접적으로 경험해 오며, IMF 시기 가족과의 이별이라는 깊은 상실을 겪은 뒤, 삶의 본질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예술은 그 혼란 속에서 자신을 다시 붙잡아준 몽석 같은 존재였다. 세속적 성공이나 유명세보다 더 근본적인 무언가를 찾고 싶었는 데, 예술이라는 언어를 통해 다시금 사람과 세상, 시간과 감정을 연결하는 길을 택하게 됐다.
이후 사회적 나눔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월드비전, 희망서울 등 국내외 공공기관 및 NGO의 홍보대사로 활동하며 아동, 청소년, 장애인, 소외계층을 위한 메시지를 꾸준히 전달해 왔다. 연예인이라는 사회적 위치를 통해 나눌 수 있는 영향력의 폭을 이제 갤러리 공간을 통해 예술과 사람을 다시 이어주는 일을 실천하고 있다. 갤러리끼는 단순한 전시 공간이 아니라, 삶의 단면이 고스란히 묻어 있는 이야기의 자리이며, 따뜻한 시간의 공동체다. 예술로 마음을 품고, 예술로 다시 세상과 연결되려는 행보는, 배우에서 갤러리 대표로 이어진 궤적의 가장 조용하고도 단단한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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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관람객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
1970~90년대는 한국 사회가 거칠게 흔들리던 시기였고, 작가들은 그 진동의 한가운데서 치열하게 고민하며 작업했다. 그들의 작품에는 시대의 금속성과 예술의 감성이 동시에 녹아 있다.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울림이 있을 것이다. 많은 이들이 와서 그 시절의 숨결을 느끼고, 현재의 삶을 비춰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
- 송정현 기자 hyunee@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