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 밖 데이터, 병원 안 진료로 연결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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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워치로 걸음 수와 심박수를 실시간으로 확인하고, 수면 앱으로 코골이와 뒤척임까지 분석하는 시대가 도래하며 일상에서 수집되는 생체 데이터는 그 어느 때보다 풍성해졌다. 시장조사업체 IDC에 따르면, 2023년 세계 웨어러블 기기 출하량은 5억 대를 넘었다. KDI 경제교육·정보센터 자료에 따르면 2023년 기준 국내 웨어러블 기기 보유율은 25.9%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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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렇게 수집된 데이터는 병원 진료에 거의 활용되지 않는다. 한 달간 스마트워치에 기록된 수면 데이터가 있어도, 병원에서는 수면다원검사를 다시 받으라고 권한다. 운동량이나 심박 변화 패턴을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이 있어도, 진료 차트에는 반영되지 않는다. 디지털 헬스 시대를 맞아 다양한 기업과 소비자가 ‘병원 밖 건강관리’를 시도하고 있지만, 현재로선 여전히 진료 시스템 밖에 머무는 실정이다.
왜 병원은 웨어러블 데이터를 활용하지 않을까?
서울아산병원이 질병관리청 지원을 받아 진행 중인 연구는 이 질문에서 출발했다. 병원은 직접 스마트 밴드와 스마트폰 앱을 개발해, 일상 데이터를 바탕으로 정신건강 상태를 예측하는 인공지능 모델을 만들고 있다. 이 연구는 2022년부터 6년간 진행되는 국책과제로, 현재 4년 차에 접어들었다. 개발된 앱은 걸음 수, 심박수, 스마트폰 사용 패턴 등을 활용해 스트레스 지수를 산출하고, 예측 모델의 정확도를 높이기 위해 학습을 반복하는 중이다.
서울아산병원 관계자에 따르면, 현재 개발 중인 앱은 병원 시스템(EMR)과의 연동 계획이 없다. 예측값은 산출되지만, 진료 기록으로는 아직 활용되지 않고 있다. 연구 단계인 만큼, 임상적 안전성과 신뢰성 검증이 우선이며, 제도적·윤리적 검토도 함께 진행되고 있다는 설명이다.
기술은 충분한데, 진료에 쓰이기까지는 ‘높은 벽’
병원 내에서는 인공지능 기반의 영상 분석 기술이나 진단 보조 시스템이 이미 널리 도입되고 있다. 그러나 일상에서 축적된 데이터가 병원 진료에 쓰이기 위해서는 또 다른 장벽을 넘어야 한다. 예측 알고리즘의 정확도, 환자 프라이버시 보호, 데이터 신뢰성 및 위변조 방지 기술,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의료기기 인증’ 문제가 얽혀 있다.
정부도 이러한 간극을 줄이기 위해 ‘디지털 헬스 실증 지원사업’을 추진 중이지만, 현장에서는 여전히 시스템 연동에 어려움을 호소하는 목소리가 크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2024년 디지털 헬스 실증 지원사업에는 대규모 예산이 투입됐으며, 최근에는 실증을 인증으로 연결하기 위한 규제과학센터의 기능 강화도 논의되고 있다.
KDI 경제교육·정보센터는 ‘디지털 헬스케어의 현재와 과제’(2023.10.24 발간)를 통해 “디지털 헬스 기술이 발전하려면 병원 중심의 의료 시스템에서 벗어난 새로운 생태계가 마련돼야 한다”고 제언한 바 있다. 단순히 기술을 개발하고 데이터만 확보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이 데이터가 실제 진료에 반영될 수 있도록 법과 제도, 인식의 틀까지 바뀌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웨어러블 데이터의 의료 연계를 위한 노력은 정신건강뿐 아니라 만성질환 분야에서도 시도되고 있다. 미국에서는 연속 혈당측정기(CGM)와 스마트폰 앱을 연동한 당뇨 관리 솔루션이 FDA의 디지털 치료제로 승인받아 임상 활용되고 있다. 일부 스마트워치의 심전도 기능도 심방세동 조기 감지 도구로써 미국 의료기관에서 사용 중이다. 유럽에서는 프랑스를 중심으로 고혈압, 심부전 등의 환자에게 웨어러블 기반 원격 모니터링 서비스를 도입하고 있으며, 일부 국가는 이를 위한 별도 수가 제도까지 운용 중이다.
법과 제도, 시스템이 데이터 흐름을 막고 있다
웨어러블 기기 보급률은 빠르게 늘고 있지만, 병원 문턱을 넘기 위한 과제는 여전히 산적해 있다.
정부도 환자 중심의 건강 정보 통합 플랫폼인 ‘마이헬스웨이(My Healthway)’를 통해 개인 건강 데이터를 연계·활용하려는 정책적 기반을 마련하고 있다. 그러나 현장에서는 여전히 병원 시스템 간 데이터 이동, 진료 기록 반영, 수가 연동 등의 실질적 제도화가 미비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병원 밖 데이터’가 진짜 의학적 가치를 가지려면, 기술을 넘어선 시스템 혁신이 함께 따라야 한다. 한국보건의료연구원이 2023년 발표한 ‘웨어러블 헬스케어 기술의 국내외 규제 현황 및 정책 과제’ 보고서에 따르면, 국내에서는 웨어러블 데이터를 진료에 연계하기 위한 법적 기준 부재, 데이터 상호운용성 확보 미비, 책임 주체 모호 등의 복합적인 문제가 존재하며, 이를 해소하기 위한 체계적인 제도화 로드맵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앞서 언급한 KDI 경제교육정보센터 역시 “법·제도·시스템이 함께 뒷받침되어야만 진료 연계가 가능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한편, 다양한 이해관계자의 목소리를 살펴보면 문제의 복합성이 더욱 두드러진다. 한국보건의료연구원(2023)에 따르면, 의료진은 ‘진료 현장에서 이 데이터를 활용했을 때 오진 책임은 누가 지는가?’에 대한 우려를 제기하고 있으며, 환자들은 “스마트워치로 6개월간 수면을 기록했지만, 병원에서는 단 한 번의 수면다원검사만 진료에 반영됐다”는 좌절감을 드러내고 있다. 기업 측에서는 의료기기 인증 절차의 복잡성과 병원 연계 과정의 진입 장벽을 지적하며, 특히 CES에 출품한 국내 스타트업들은 실증을 통한 제도 진입 통로 마련을 촉구하고 있다.
‘손목 위의 데이터’, 진료로 이어지려면?
이처럼 다양한 주체들이 웨어러블 데이터의 의료 연계를 희망하고 있음에도, 제도와 시스템은 여전히 각자의 언어로 분절된 상황이다. 기술이 진료와 연결되기 위해선 데이터의 질과 신뢰도 향상, 법제 정비, 책임 구조 명확화, 이해관계자 간 협업 모델 정립 등이 병행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단순한 기술 도입이 아닌 보건의료 시스템 전반의 단계별 전환 로드맵이 필요하다. 우선 데이터 표준화와 책임 구조의 명확화가 이루어져야 하며, 이어 제도적 기반 마련, 최종적으로는 수가체계 연동까지 이어지는 3단계 접근이 요구된다. 이제 남은 것은 손목 위의 데이터를 병원 진료의 흐름으로 자연스럽게 편입시킬 수 있는, 제도와 신뢰의 다리 놓기다. 그렇게 함으로써 환자는 일상에서 얻은 데이터를 더 나은 진료로 연결할 수 있고, 의료진은 환자의 상태를 더욱 입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시대가 열릴 것이다.
※ 본 기사는 디지틀조선일보 창립 30주년 특집 ‘에이지테크 시리즈’의 일환으로 작성되었습니다.
- 김정아 기자 jungya@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