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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대한민국의 사교육비 총액이 사상 최대치인 29.2조 원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학생 수가 감소하는데 사교육비 총액이 늘어났다는 것은 1인당 사교육비가 급격히 증가함을 의미한다. 특히 가계소득에 따른 사교육비 격차는 3배에 이르고 있고, 대도시와 중소도시의 지역 간 격차도 2배 차이로 심각한 수준이다. 자녀가 학교를 다니는 동안 과도한 사교육비를 감당해야 하는 현실은 우리 사회의 구조적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있다. 사교육은 흔히 공교육의 그림자(shadow education)라고 불리지만, 지금은 그림자를 넘어 공교육과 경쟁하는 거대한 대체재로 성장했다.
사교육이 이처럼 확장된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제도적 구조에 있다. 상대평가 중심 내신 제도와 수능 중심의 대학입시는 오랫동안 사교육의 근본적인 원인으로 분석돼 왔다. 따라서 장기적으로는 대학입시와 학교 평가 방식에 대한 전면적이고 근본적인 개편이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제도 개편은 정치적·사회적 합의를 요하는 장기 과제다. 제도가 바뀔 때까지 수많은 학생과 학부모는 사교육의 고통을 감당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의 교육 체제 안에서도 실질적인 대응 전략이 절실하다.
사교육의 양상을 면밀히 들여다보면, 효과적인 해법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유아기와 초등 저학년에서는 돌봄 기능을 겸한 사교육 수요가 크고, 고학년으로 올라갈수록 영어·수학과 같은 교과 중심의 사교육이 급격히 증가한다. 따라서 학령별·학교급별 특성에 맞춘 차별화된 사교육 대응 전략이 요구된다. 초등 저학년에는 방과후학교와 돌봄교실의 양적 확대와 내실화가 중요하며, 고학년부터는 교과 중심 사교육에 대한 공교육의 정교한 대응 전략이 필요하다.
영어는 말하기와 글쓰기가 핵심적인 역량인데 학생 간의 편차가 크게 발생한다. 학교에서 학생의 수준에 맞게 맞춤형으로 말하기와 글쓰기를 교육하는 것이 쉽지 않은 상황이다. 학교의 진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경우에 사교육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다. AI는 개인별 맞춤형 교육을 지원하는 데 최적화된 기술이고, AI 디지털교과서(AIDT)는 교사가 학생들의 학업 성취 수준을 진단하여 지원하는 것을 핵심 기능으로 하고 있다. 수학의 경우에도 개념의 이해(學)와 개념의 활용 및 익힘(習)의 과정을 AI가 지원해 줄 수 있다. 교사는 학생의 학습 동기를 자극하고 지속적인 학습이 이루어지도록 코칭의 역할을 할 수 있다. 정보 교과에서의 AIDT 활용은 컴퓨팅 사고를 높이고 코딩의 과정에서 효과적인 학습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지난 4월 언론에 공개된 수업에서 AIDT를 적용한 이후 ‘학생들의 학습 흥미도가 높아지고, 협동학습도 활발하게 이루어지며, 소외되었던 학생들의 참여도가 높아졌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다. 특히 ‘학부모의 만족도가 높아졌다’는 언론의 보도는 매우 긍정적인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AIDT는 사교육비 경감을 위해 매우 주목할 만한 정책 수단이다. AIDT는 학생 개인의 수준과 이해 정도에 따라 학습 내용을 맞춤형으로 조정할 수 있고, 반복 학습과 실시간 피드백을 통해 학습자의 이해를 깊이 있게 도울 수 있다. 특히 AIDT가 단순히 지식의 암기나 전달에 그치지 않고, 학습자가 스스로 목표를 설정하고 진도를 조절하며 학습할 수 있도록 돕는다는 점을 주목할 만하다. 이는 사교육이 제공하지 못하는 '자기주도 학습' 능력을 키우는 핵심 도구가 될 수 있다.
학습자의 자기주도성은 단지 스스로 공부하는 습관의 문제가 아니다. AI의 도움을 받아 학습자가 자신의 부족한 영역을 파악하고, 필요한 자료를 선택하여, 반복해서 연습하고, 이해, 적용까지 해나가는 능력은 미래 사회가 요구하는 핵심 역량 중 하나다. AIDT는 바로 이 과정을 체계적으로 지원한다. 특히 문제 해결을 위한 프로젝트 학습, 토의와 협력이 중심이 되는 협동학습 환경에서 AIDT는 개인의 맞춤형 학습을 넘어, 학교 수업의 질을 끌어올리는 기반이 될 수 있다.
물론 기술만으로 모든 교육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교사의 적극적인 역할이 핵심적인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교사가 주체가 되어 AIDT와 같은 혁신적인 도구가 제대로 활용된다면, 공교육이 학습자의 다양성을 반영하는 데 있어 지금보다 훨씬 유연하고 정교한 대응이 가능해진다. 방과후학교, 학교 자율형 심화 수업, 주제탐구활동 등과 연계하여 AIDT를 활용한다면, 학생과 학부모는 고비용의 사교육 없이도 충분히 질 높은 창의적 학습 경험을 할 수 있게 된다.
곧 대한민국은 새로운 대통령을 맞이하게 된다. 선거철마다 반복되던 “사교육비를 절반으로 줄이겠다”는 구호는 이제 실효성 있는 정책으로 증명되어야 한다. AIDT와 같은 맞춤형 공교육 인프라에 대한 과감한 투자, 학습 플랫폼의 전국 확대, 교사 연수 시스템 등을 통해 단순히 ‘첨단 기술 도입’이라는 차원을 넘어, 공교육의 경쟁력을 실질적으로 회복시키는 전략을 마련하여야 한다.
사교육비 29조 시대, 공교육은 학생과 학부모의 실질적인 수요를 반영한 학습 경험을 제공해야 한다. 이를 통해 공교육이 교육의 중심으로 다시 우뚝 서야 할 때이다. 국민이 체감할 수 있는 교육정책은 거창한 구호보다 구체적인 실행에서 시작될 수 있다. 이제는 AI를 활용한 자기주도 맞춤형 학습이라는 정교한 해법으로, 사교육이라는 거대한 장애물을 넘어설 시점이다.
정제영 원장은 서울대 교육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교육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제44회 행정고시에 합격해 교육과학기술부에서 사무관과 서기관을 거치며 교육정책 기획 및 집행을 수행했다. 이화여대 교수로 부임해 교육학과장, 호크마교양대학장, 기획처장, 미래교육연구소장을 역임했다. 현재 한국교육학술정보원장으로 국내 교육과 학술정보 시스템의 디지털 대전환을 선도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AI와 디지털 기술 기반 개인별 맞춤형 교육을 지원하는 시스템 개발 및 현장 안착에 주력하고 있다.
- 정제영 한국교육학술정보원(KERIS) 원장 jychung@keris.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