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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컴퓨팅 인프라만으론 부족… 혁신 씨앗 살려야”

기사입력 2025.03.27 10:35
  • 박지환 씽크포비엘 대표.
    ▲ 박지환 씽크포비엘 대표.

    인공지능(AI) 기술의 격변이 눈부시게 진행되고 있다. 딥시크(DeepSeek)라는 게임 체인저 등장에 놀란 지 두 달도 되지 않아 이번에는 마누스(Manus)가 공개됐다. 마누스는 중국의 한 스타트업이 만들어낸 AI 에이전트 플랫폼으로, 사용자의 지시 없이도 자율적으로 업무를 계획하고 실행한다는 게 특징이다. 문서 작성, 정보 수집, 요약, 이어쓰기, 일정 관리 등 복잡한 작업을 AI 에이전트가 스스로 연속 수행하는 서비스로, 기존의 챗GPT 계열 제품과 차원이 다르다.

    물론 마누스는 이제 막 출시됐기 때문에 실제 효용성 측면에서는 좀 더 검증이 필요하다. 중요한 것은 그런 상황에서도 벌써 마누스에 수십만 이상의 가입 희망자가 몰려, 몇 주째 대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마누스의 혁신성을 사용자가 먼저 직감했다는 것이고, 그만큼 새로운 서비스에 대한 수요의 에너지가 모여 있다는 의미도 된다. 그래서 설사 마누스의 실제 효과성에 아직 어떤 한계가 있다고 하더라도 시장의 요구에 따라 금방 극복되리라 예상할 수 있다. 요컨대 마누스는 전례 없는 편리성과 효율성을 사실상 이미 실현했고, 일개 스타트업의 성취에 전 세계가 경악하고 있다.

    딥시크에 이어 또 한 번의 AI 혁신이 중국에서 등장했다는 점에도 주목해야 한다. 중국이 AI 서비스 주도권을 가져가려 하고 있고, 우리는 지켜보며 부러워할 뿐이다. AI 분야에서 중국의 힘은 국가적 전략과 자금 지원, 그리고 정책적 유연성에서 나오는 걸로 보인다. 2024년 네이처 인덱스에 따르면 중국은 AI 관련 논문 기여도 기준 세계 1위이며, 최상위 10개 연구기관 중 2위부터 9위까지에 중국 대학이 자리해 있다. 여기에 더해 올해까지 AI 산업에 약 800조 원을 투자할 계획으로 관련 산업 생태계 전반에 지원을 강화하고 있다. 다양한 통계에서 수치적 차이가 있지만, 160만 개의 AI 기업이 있으며, 작년 초에만 스타트업 23만 개가 설립됐다는 기사도 보인다.

    중국의 물량 공세 앞에서 초라해지는 건 우리의 현실이다. AI 기술 경쟁에서 우리는 분명히 뒤처져 있다. 문제는 이것이 미래 세대의 생존을 결정할 핵심 기술이라는 점이며, 지금의 상황이 지속되면 다음 세대에도 격차를 따라잡기 힘들어질 전망이다. 기술은 기본적으로 자본과 투자를 통해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AI 관련 연구 개발 지원은 여러 전문가가 이미 경고한 바처럼 ‘열악함’을 넘어 처참한 상태로 가고 있다. 한국은 미국과 달라서 기술에 대한 민간 투자(VC)가 활성화돼 있지 않다. 결국 기술 혁신을 공공자원에 의존하는 현실이다. 그리고 지금의 공공 연구 개발 투자 수준에서 한국의 AI 기술 혁신은 불가능에 가깝다.

    정부가 손을 놓고 있는 것은 아니다. 지금은 무엇보다 국가 AI 컴퓨팅 센터 구축을 위한 그래픽처리장치(GPU) 확보에 관계 기관의 총력이 집중돼 움직이고 있다. 산업 인프라 구축을 위해서 공공이 노력하는 것은 무척 긍정적인 일이다. 하지만 업계 종사자로서 계속 공허하고 불안함을 느끼게 된다. 과연 컴퓨팅 인프라가 갖춰진다고 그 순간부터 업계의 혁신이 활성화될까?

    만약 우리가 이제 막 ‘마누스’와 같은 획기적인 혁신을 일궈내려는 단계에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자원이 과연 컴퓨팅 지원일까? 나는 단호히 “아니다”라고 말하고 싶다. 소프트웨어 업계에 이십여 년 이상 몸담아 온 입장에서 그런 지원은 부차적인 문제라는 것을 확실히 말할 수 있다. GPU와 같은 하드웨어 지원은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다른 대안으로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 최근의 강화학습 트렌드 또한 이미 GPU 사용을 어느 정도 경감시키는 추세다. 어쨌든 지금 시점에, 특히 중소기업 입장에서 최우선 요소는 아니다.

    지금 업계에서 시급한 것은 기술기업이 계속해서 새로운 것을 시도해 볼 수 있는 실험 자원이고, 새로운 시도가 혁신으로 이어질 때까지 개발 인력의 생계를 지탱해 주는 고용 안정이며 또한 그 혁신이 시장에 받아들여질 때까지 회사가 버틸 수 있게 만들어주는 운영 재원이다. 개별 기업의 실험 자원, 고용 안정성, 그리고 운영 재원의 많은 부분은 현실적으로 공공자원에서 나온다. 이 부분에 자원을 투입하는 게 거대 인프라 구축보다 규모가 작고, 어쩌면 정치적 ‘모양새’가 덜 나는 영역일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기술 혁신의 알파이자 오메가라고 나는 생각한다. 반면에 이런 지원이 받쳐주지 못한다면 기업은 생존을 위해 혁신적 도전보다는 안전하고 검증된 사업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인프라 구축에는 시간이 걸린다. GPU 구축이 어느 정도 완비되는 것은 아무리 낙관적으로 보더라도 2027년 정도의 일이다. 딥시크에서 마누스가 나오는 데에 두 달이 걸렸다. 앞으로 2년이라면 그 사이에도 해외에서는 또 얼마나 많은 딥시크나 마누스가 등장하며 기술적 흐름을 바꿔놓을 것인가? 이와 같은 격변의 시기라면 최악의 경우 힘들게 구축한 인프라가 2년 후에 상황에서는 큰 도움이 되지 못할 가능성도 있다. 그리고 그사이에 충분한 지원을 받지 못하는 기술기업은 눈에 띄게 활력을 잃어 간다. 거대 인프라 구축에 병행해 개별 기업에 대한 구체적 지원책이 중요해지는 이유다.

    경기 침체 상황에서, 많은 중소 기술기업이 존폐 위기에 놓여 있다. 물론 기업이 시장에서 살아남거나 사라지는 것은 개별 기업의 역량이자 책임이다. 하지만 양질의 기술기업이 당장 불황 때문에 사업적 안주에 머무르게 되는 순간, 국가의 미래를 위한 기술 혁신 기회도 함께 사라진다. 적어도 마누스와 같은 혁신이 한국에서 실현되기는 어려워진다. 중소기업이 생존을 위해 투쟁하는 동시에 당면한 생존 위기와 무관하게 혁신을 위한 실험 또한 계속할 수 있는 여건이 주어져야 한다. 산업 진흥을 위한 공공의 자원이 가장 우선으로, 또한 가장 효율적으로 쓰일 수 있는 지점이 여기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개인 차고에서의 실험에서 애플이 나왔듯, 혁신은 거대한 건물이 아니라 작은 실험이 연속되는 데에서 생겨난다. 국내 기술 기업에 더 많은 기회가 주어지기를 바란다. 기술의 생태계를 활성화하는 공공의 노력 없이, 거대 인프라 구축만으로는 1년 안에 800조 원이 투입되는 중국의 물량 공세에 대응하기 어려울 것이다.


    박지환은 인공지능 신뢰성 분야를 연구하는 씽크포비엘의 대표를 역임하고 있다. 그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에서 발간한 신뢰할 수 있는 인공지능 개발 가이드 6대 산업분야 제작을 전담하며 국내 AI 신뢰성 기술의 발전에 기여했다. 또한 한국정보통신기술협회(TTA)를 통해 데이터 편향과 관련된 단체 표준 8건을 제정했고 국제표준화기구 ISO/IEC JTC1 SC42 (AI) Korea National Body에서 활동하며 글로벌 AI 표준화에도 참여하고 있다. 최근에는 신뢰할 수 있는 인공지능 국제 연대(TRAIN – Trustworthy AI International Network)를 창설해 AI 신뢰성 분야의 글로벌 네트워크 구축에 앞장서고 있다. 전 아주대학교 및 전북대학교 겸임교수를 지낸 그는 칼럼을 통해 AI 신뢰성 확보를 위한 노력, 국내외 표준화 동향, 그리고 최신 연구 결과를 깊이 있게 다루며 업계에 통찰을 제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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