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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의 멜로 남신'하면 꼭 빠지지 않은 배우, 지진희가 또 하나의 순애보 캐릭터를 완성했다. 오랜만에 특기를 선보인 지진희는 '가족X멜로' 속 미스터리와 로맨스, 부성애까지 오가는 섬세한 캐릭터 소화력을 자랑했다.
'가족X멜로'는 11년 전에 내다 버린 아빠가 우리 집 건물주로 컴백하며 벌어지는 피 튀기는 패밀리 멜로드라마다. 극 중 지진희는 11년 만에 가족 앞에 등장한 아빠 '변무진'으로 분했다. 평소 일 벌이기를 좋아하던 무진은 손대는 사업마다 줄줄이 망하고, 결국 아내에게 이혼당한 후 실종된다. 그러던 어느 날, 11년 만에 자신의 제삿날에 무진이 등장하면서 가족에게 변화가 찾아온다. -
지진희는 땡전 한 푼 없던 무진이 건물주가 되어 돌아오는 미스터리한 설정을 극 후반까지 유지해야 했다. 여기에 전 집주인 할아버지의 죽음에 연루되어 있다는 의뭉스러움까지, 멜로드라마 한편에 자리한 미스터리 스릴러를 도맡았다.
지진희는 '가족X멜로'에서 해야 할 자신의 역할보다도 작품 자체에 끌려 참여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우리 드라마가 정말 좋은 게, 요즘 유행하는 자극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자극적인 것에 익숙해져 있다 보면 자칫 밋밋해 보일 수 있는데 '가족X멜로'는 그렇지 않은 점이 좋았다. 한쪽에만 너무 치우쳐 있지 않다는 점에서 우리만의 색깔이 분명히 있다고 생각했다"라고 작품을 선택한 이유를 전했다.
오랜만에 멜로를 선보인 지진희는 "멜로에 약간 코믹이 섞인 게 제가 좋아하는 장르다"라며 자신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는 "제 성격이기도 한데, 자극적이거나 폭력물 같은 건 내가 하기도, 보기도 힘들더라"라고 운을 뗐다. 그러면서 "오랜만에 코믹을 하다 보니 사실 쉽지 않았다. 예전에 드라마 '파란만장 미스김 10억 만들기', '결혼 못하는 남자'도 했지만, 요즘엔 웃음 포인트가 달라졌더라. 그 포인트를 정확하게 몰라서 자칫하면 아재가 되는 부분이 있었다. 그런 부분은 젊은 감독님이 잘 조절을 해주셨다. 저에게는 (코믹 포인트를 잡는 게) 제일 어려웠던 것 같다"라고 의외의 고충을 토로했다. -
'가족X멜로' 속 무진은 전 아내 '금애연'(김지수)을 다시 되찾고 싶어 한다. 수십 년 세월 동안 오직 한 여자만을 바라보는 중년 순애보 그 자체다. 과거에도 멜로에 대한 꾸준한 의지를 드러냈던 지진희는 이날도 변하지 않는 마음을 전했다. "저는 나이가 들어도 그때에 맞는 멜로를 하고 싶다. 그런 점에서 늘 준비를 하고 있다. 보는 분들이 '왜 나왔어' 하시면 안 되니까 엄격하게 준비하고 있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을 제가 하고 있다. 다행히 그런 부분이 재밌고 적성에 맞아서 계획대로 하고 있는 중이다."
농익으면서도 설레는 중년 로맨스 합은 지진희와 김지수, 두 배우의 노련한 호흡 덕에 호평을 이끌 수 있었다. 과거 드라마 '따뜻한 말 한마디'에서도 호흡을 맞춘 바 있던 두 사람은 오랜만의 재회에도 어색함 없이 호연을 펼쳤다. 지진희는 "김지수 씨와의 호흡은 말할 것도 없다"라며 굳건한 신뢰를 드러냈다.
"김지수 씨가 워낙 베테랑이시다. 이전에도 함께 드라마를 하고 친해졌기 때문에 알아서 착착 연기가 되는 부분이 분명히 있었다. 그 부분에 있어서는 제가 굉장히 도움을 많이 받았다. 서로 부족한 게 있으면 이야기해 주고 맞춰보는 게 굉장히 수월했다. 사실 지수 씨가 아니었으면 '애연'을 누가 했을까 싶을 정도로 캐릭터와 잘 맞아떨어지는 사람이다." -
'가족X멜로'의 또 하나의 관전 포인트는 두 부녀가 엄마를 사이에 두고 벌이는 본 적 없는 삼각관계다. 세대를 뛰어넘은 케미가 필요했던 바, 장녀 '변미래' 역의 손나은과의 호흡에 대해서도 만족감을 드러낸 지진희다.
"나은이가 굉장히 열심히 준비했더라. 촬영 전부터 감독님, 지수 씨와 만나서 한강도 가고 같이 시간을 보냈다고 들었다. 모녀 관계를 위해 저와는 대립각을 세웠기 때문에 저와는 만날 일이 잘 없었지만.(웃음)"
"나은이 성격을 봤을 때 조용조용하면서도 강단도 있으면서 의지가 대단하더라. 그 부분을 높이 샀다. 함께 첫 촬영을 하는데 느낌이 너무 좋았다. 그 노력하는 자세를 봤을 때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 친구다. 섬세한 부분이 있어서 옆에서 잘 해주면 더 잘할 친구 같다." -
딸 손나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아들 윤산하('변현재' 역), 딸의 남자 최민호('남태평' 역)도 빼먹을 수 없다며 아빠 미소를 지은 채 말을 이어간 지진희. 특히 자신이 직접 찍은 윤산하 사진을 보여주며 "얘는 멜로를 해야 한다"라고 극찬을 이었다. 최민호는 '우리 민호'라 부르며 남다른 애정을 드러냈다.
"저는 이번에 산하를 처음 봤는데 정말 매력적이고 연기를 잘 하더라. 저는 그냥 어린 애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굉장히 속이 깊었다. 이런 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많지 않다. '넌 멜로를 해야 할 사람이야'라고 조언했다. 젊은 애가 어쩜 이런 깊은 눈을 가지고 있을까 싶었다. 허준호 선배에게도 전화 와서 '얘 누구냐. 연기 너무 잘한다'라고 하더라. 선배가 봤을 때도 가능성이 있구나 했다. (윤산하가) 진짜 앞으로 멋지게 되면 좋겠다."
"우리 민호도 빠뜨릴 수 없다. 민호는 되게 존경스러운 부분이 있다. 하루에 다섯 시간 정도 운동을 하더라. 좋은 생각도 많이 한다. 민호가 걸어오고 있으면 50m 전부터 주변이 환해지는 느낌이 있다. '얘는 잘 될 수밖에 없구나. 이래서 사람들이 좋아하는구나'라는 게 느껴졌다. 이건 되게 큰 능력이다. 엄청난 에너지가 있다.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 배우다." -
창창한 후배들을 보면서 에너지를 얻었다고 말한 지진희. 그는 젊은 시절 자신을 떠올리기도 했다. 사진작가로 활동하다 뒤늦게 배우의 길로 들어선 지진희는 "연기라는 게 기준을 말씀드리기 모호하지만, 저는 처음 연기를 시작할 때부터 '누굴 닮은 게 아니라 지진희, 나여야 한다'라는 생각이었다. 어떻게 해야 이 업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끊임없이 고민했고, 그 답을 향해 스스로 가고 있다. 운이 좋게 잘 가고 있는 것 같다"라며 겸손해 했다.
데뷔 25주년을 맞은 소감 속에도 초심을 잃지 않은 모습이 느껴졌다. 어쩌면 꾸밈없는 그의 성품이 꾸준히 사랑받는 비결이지 않을까 싶었다. 경력을 앞세워 선배 노릇을 하기보다 그저 점점 농익어가는 한 명의 배우 지진희가 보였다.
"데뷔 25주년이라는 생각은 전혀 해보지 않았다. 저는 그냥 일을 하는 거지, 몇 주년이다 하는 게 중요하지 않다. 이 일에서만큼은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해서 열심히 하려고 한다."
"제가 성공했다고 보지는 않지만, 성격이 좋지 않거나 어깨에 힘이 들어간 사람은 살아남기가 힘들다고 생각한다. 저는 행운아다. 많은 사랑은 아니지만 작은 사랑을 받으며 계속 가고 있는 것 같다."
- 이우정 기자 lwjjane864@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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