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물 들어올 때 노 젓자'라는 옛말이 있다. 아마도 이는 인기에 가장 예민한 엔터테인먼트 업계에서 많이 통용되는 말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밀물과 썰물이 꼭 공존하는 것만도 아니다. 영화 '은교'로 혜성같이 등장한 김고은은 드라마 '치즈 인 더 트랩', '도깨비', 그리고 올해 첫 천만영화가 된 '파묘' 등에 이르기까지 그 선택에 크고 작은 박수를 받아왔다. 그의 선택은 과감했고, 연기에는 주저함이 없었다. 작품의 성과와 관계없이, 시작부터 지금까지 그랬다.
그 중심에는 '김고은'이 있었다. 파격이라고 피하지 않고, 도전이라고 주춤하지 않았다. 믿으면, 간다. 영화 '대도시의 사랑법' 역시 그랬다.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스타일의 소유자 '재희'(김고은)와 성소수자라는 자신의 특성으로 마음에 문을 닫고 살아온 '흥수'(노상현)의 우정이 세상에 나오기까지는 길다면 긴 시간이 있었다. 투자도, 흥수 역의 캐스팅도 어려웠다. 하지만, 김고은은 그 중심에 있었다. -
Q. '대도시의 사랑법'의 개봉까지 시간이 필요했다. 노상현은 인터뷰에서 '다른 배우들이 많이 거절했던 캐릭터'라고 흥수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했다. 그런 상황에서 재희로 중심을 지켰다.
"너무 좋은 대본이었고요. 물론 저도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릴 줄은 당연히 몰랐었죠. 그런데 제가 작품을 안 하면서 오로지 이 작품만을 기다려야 했다면, 어려웠을 거예요. 그런데 전 그 사이에도 상당히 많은 작품을 하면서, 이 작품이 제작되기를 바랐던 거죠. 제작이 될지, 안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는 말이 더 정확한 표현 같아요. 그러니, 제가 할 수 있었던 건 '저는 안 빠질 테니까, 제작될 수 있게 해주세요'라고 기다릴 수 있다고 말씀드리는 것뿐이었어요. 솔직한 마음은 이 작품이 이대로 묻히기에는 너무 아까운 대본이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공감이 가는 디테일한 서사를 그리는 작품 자체가요. 어찌 보면 소소한 이야기일 수 있는데, 그래서 더 귀하다고 생각한 지점도 있는 것 같아요."
Q. 스스로 '재희'라는 캐릭터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궁금하다.
"저는 재희라는 인물을 처음 접했을 때, 안타까운 마음이 많이 들었어요. 진짜 친한 언니처럼 '저렇게 행동하니까, 오해받지'라는 생각도 들었고요. 영화를 보시는 관객분들이 '재희를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라는 마음으로 잘 표현하고 싶었어요. 재희가 저렇게 표현하게 되기까지 어떤 성장 과정에서 갖고 있는 아픔이나, 표현적으로 서툴고, 날 서 있고, 이런 부분들이 짠해 보이면 좋겠다는 생각이 컸고요. '사실 재희는 그렇지 않아'라고 대변하는 마음으로 연기했습니다." -
Q. 재희라는 캐릭터에 대한 애정 때문인지, '대도시의 사랑법'에서 배우 김고은은 정말 말 그대로 반짝반짝 빛난다.
"재희와 흥수가 20대에서 30대로 넘어가는 시기가 사실 우리네 삶인 것 같았어요. 저도 겪었고, 제 친구들도 겪었고. 방식은 각자 다르겠지만, 아마도 그 시기를 겪지 않고 나이를 먹은 사람은 없을 거로 생각해요. 스스로의 갈등과 생각들이 충돌하고, 사회가 원하는 것과 내 자신의 생각이 달라서 충돌하고요. 20대에 사회에 처음 던져졌을 때,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무지한 상태에서 실전에 투입되는 느낌이잖아요. 그런 것들이 재희와 흥수를 통해서 잘 담겨져있다는 생각이 들었고요. 공감이 갔던 포인트이기도 했어요."
Q. 재희의 20대에는 과감한 스타일링을 보는 재미도 있다. 어디 있든 눈에 딱 보일 것 같은 모습이었다.
"재희가 '자유분방하다', '튄다'라는 단어로 묘사가 될 때, 그것을 '노출이 심한 옷을 입는다', '패션을 좋아한다'라는 식으로 표현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스타일적으로 '저 상의에 저 하의가 맞아?'라는 매치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자세히 보시면, 재희가 신발도 거의 꺾어 신거든요. 그런 식으로 자기 방식대로 입고 사는 것을 통해 재희가 가진 태도를 보여주고 싶었어요. 앉을 때도 그냥 앉는 게 아니고, 한쪽 다리를 의자 위에 올려둔다던가, 이런 태도를 통해 '과감하다', '자유분방하다'라고 느껴지길 바란 것 같아요." -
Q. 영화 초반, 강의실 앞에서 재희가 자신의 신체 사이즈에 대한 말도 안 되는 소문에 당당하게 응수하는 장면은 정말 사이다였고, 충격적이었다.
"그냥 그때는 '어떻게 하면 좀 더 맛깔나게, 뒤에 이어지는 욕설까지 잘 이어서 할 수 있을까?' 그런 고민을 했던 것 같아요. (웃음)"
Q. 또한, 재희가 병원에서 뛰쳐나가 눈물을 흘리는 장면에서, 처음 보는 듯한 김고은의 표정을 본 것 같았다.
"저는 비로소 재희가 자기 속 응어리를 토해낸다고 생각했어요. 재희는 흥수에게 '솔직해라'라고 그러면서도 사실 재희도 솔직하지 않다고 생각했거든요. 다 감추고, 그러면서 센 척하고. 자유분방해서 남을 의식하지 않는 것 같지만 사실 '남들이 나보고 뻔하대, 진짜 그래?'라는 대사 속에 다 들어가 있잖아요. 다 듣고 있고, 다 상처받고 있는 거죠. 그렇게 쌓인 응어리를 그 장면에서 터트려버리는 거죠. 그동안 가진 응어리, 설움이 확 폭발해 버리는 장면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
Q. 수많은 장면 중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 있을까.
"많은데요. 그래도 흥수랑 머리끄덩이 잡고 싸우는 장면이 아닐까. (웃음) 흥수와의 관계성을 잘 보여주는 장면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그렇게 울분을 토해내며, 피 터지게 싸우다가도, 내가 그러는 건 괜찮지만, 남에게 얻어터지는 건 못 봐주는, 그게 흥수와 재희의 사이가 아닐까. 그 장면이 그걸 보여주는 것 같아요."
Q. 영화는 재희와 흥수의 스무 살부터 서른셋까지를 담는다. 함께 그 시간을 보낸 흥수에 대한 생각도 궁금하다.
"재희가 흥수에게 하는 이야기, 흥수가 재희에게 하는 이야기, 서로 싸우면서 하는 이야기들이 곧 '자기 자신에게 하는 이야기'라고 생각하거든요. 자기 자신에게 제일 답답하고 싫은걸, 상대방에게 이야기하는 거로 생각해요. 왜냐하면, 재희랑 흥수는 너무 닮아있다고 생각하거든요. 둘이 가까워질 수 있었던 것도, 흥수가 처음 고슴도치같이 날 선 모습에서 재희를 통해 스스로를 봤다고 '나랑 같은 사람이네'라는 걸 느껴서 다가갈 수 있었던 거로 생각하고요. 재희가 흥수에게 한 '네가 너인 게 어떻게 약점이 될 수 있어'라는 말도, 사실 스스로에게 수없이 많이 했던 이야기였을 거로 생각했어요. 아무도 해주지 않았지만, 사실 제일 듣고 싶었던 말을 진짜 비로소 흥수에게 해줄 수 있게 된 거죠. 그렇기에 제일 진실되고 큰 위로의 말일 거로 생각했어요." -
Q. 초반에 '대도시의 사랑법' 예고편과 스틸컷이 공개됐을 때, 두 사람이 붙어있는 모습을 로맨스라고 생각했는데, 영화를 보면 정말 '우정'으로 느껴진다. 그건 분명 두 사람의 정말 친구가 되기까지의 노력을 기반으로 얻어진 결과물같이 느껴졌다.
"촬영 전부터 이언희 감독님이랑 몇 번이나 만났고, 시간을 가졌어요. 감독님께서 제작보고회 때 말씀하셨듯이 셋이 클럽도 같이 갔고요. 춤추는 모습도 보고하니 많이 허물어진 것도 있었죠. (웃음) 대화를 정말 많이 했던 것 같아요. 장면과 현실과 이런 게 거의 구분이 없을 정도로 많이 이야기하는 사이가 되어서요. 저는 재희와 흥수 사이에 스킨십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어요. 그 부분을 감독님과 (노)상현 배우에게도 이야기했었고요. 그 스킨십에 굉장히 자연스럽고, 남녀의 느낌이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요. 그래서 좀 더 의도적으로 더 그렇게 넣은 것도 있었던 것 같아요."
Q. 실제로도 흥수 같은 친구들이 있을까.
"고등학교 때부터 친구들도 있고, 그런데 저는 힘든 이야기를 잘 못하는 편이라서요. 재희와 흥수의 사이가 부러우면서도, '저렇게 말할 수 있는 것도 복이다'라는 생각도 들어요. 그건 성격일 수도 있는 거잖아요. 어디서부터 뭐가 힘들다는 걸 말할지 모르겠고. 저는 사실 그렇거든요." -
Q. 결국 '대도시의 사랑법'에서 재희는 재희만의 성장을 발견한다. 더 이상 누군가의 1순위가 아니라도 말이다. 그런 식으로 '김고은다운 것'에 대한 성장을 발견할 때가 있을까.
"저는 성장이라는 건, 당장은 모르는 것 같아요. 진짜 한 몇 년 지난 후에 '나 성장했네'라는 포인트가 있고, 그런 순간이 오는 것 같은데요. 그냥 한 작품, 한 작품 끝날 때마다 자기반성하고, 개선할 점을 생각하고요. 그런 반성의 시간이 일주일도 될 수 있고요. 뭔가 운동선수들이 매일 같은 훈련을 반복하다 보면 확 성장해 있듯, 저도 그렇지 않을까 생각하는 것 같아요."
Q. 그런 덕분인지, 배우 김고은의 행보에는 늘 자신감이 넘친다. 주저하지 않고, 믿고, 한다. 지금 (쇼트커트) 헤어스타일처럼 말이다. 연기를 정말 '행복하게 한다'라는 느낌을 받게 한다.
"저는 정말 행복하게 사는 게 제일 중요한 사람이에요. 그리고 '오늘을 잘 살자'라는 주의이기 때문에요. 저는 제가 대본을 엄청나게 잘 보는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그래서 회사에서 많은 의견을 부탁하고, 듣고 상의합니다. 그런 분들과 이야기할 수 있어서 좋은 것 같고요. 대본이 재밌다고 하는데, 다른 부수적인 게 걱정이 되면, 그건 고려 안 해도 될 것 같다고 의견을 내는 편이에요."
- 조명현 기자 midol13@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