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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당 인터뷰에는 '탈주'의 스포일러가 될 수 있는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영화 ‘탈주’를 보며 온몸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내일을 향해 북한에서 남한으로 탈주하는 규남(이제훈)을 응원하면서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 난 후, 지금을 지키기 위해 규남을 쫓는 북한 장교 현상(구교환)이 뇌리에 남았다. 영화가 끝나도 둘은 머릿속에 남아서 맴돌았다.
그래서 ‘탈주’를 연출한 이종필 감독을 만났다. 쉽게 궁금증은 풀렸다. 이종필 감독은 ‘탈주’ 속 규남과 현상을 ‘인사이드 아웃’ 속 기쁨이와 슬픔이 같은 한 사람 속마음들로 생각했다. 그가 ‘탈주’를 만들게 된 것은 아프리카 청년들이 다른 세상으로 가기 위해 비행기 바퀴에 매달렸다는 것을 접함과 동시에 술자리에서 회사 다니기가 힘들어 우는 친구의 모습을 보고서였다. 매일을 살아가고 있다. 어느 때는 꿈을 좇으며 규남같이 질주했고, 또 다른 어느 때는 현실과 타협하며 현상처럼 꿈을 기억하며 살아간다. 이종필 감독은 자신의 앞에 연습장을 펼쳐놓고 때로는 그림을 그리며 답변을 이어갔다. 그렇게 나눈 ‘탈주’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봤다. -
Q. ‘탈주’는 북한에서 남한으로 탈주하는 규남(이제훈)과 그를 쫓는 현상(구교환)의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꿈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굳이 장소를 ‘북한’으로 설정한 이유가 있을까.
“제가 설정한 건 아니고, 제가 받은 권성휘 작가님 시나리오에 그렇게 쓰여 있었다. 저에게 중요했던 것은 해외 토픽 같은 온라인 기사에서 남아프리카 공화국 청년 둘이 영국으로 밀입국하려고 공항 활주로에 잠입해서 비행기 바퀴에 매달렸다는 것을 접했다. 실제 비행기가 떴다고 하는데, 거기 매달린 사람의 마음이 궁금했다. 그리고 며칠 후에 직장인이 된 친구를 만났다. 술에 취해서 찾아와서 막 울면서 ‘회사 때려치우고 싶어’라고 하더라. 회사 부장 이야기를 하며 울부짖더라. 작게는 다른 회사부터 크게는 다른 나라까지 ‘여기가 아닌 다른 곳을 가고 싶어’하는 마음들은 뭘까 궁금했다. 철학책을 잘 보지는 않지만, 질 들뢰즈의 ‘천개의 고원’이라는 책에서 ‘탈주’라는 것에 대해 굉장히 인상적인 말이 있다. 그 책에서 탈주는 단순히 도망, 도피, 회피가 아니라 기존의 체제를 전복하고 새로운 질서를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이야기하더라. 그 말이 멋있었다. 그래서 ‘탈주’라는 영화가 북한 이야기로 보이지 않더라. 동시에 북한 배경에 대한 고민도 했다. 그런데 배경이 우리나라가 되면 ‘탈주’가 아닌 ‘탈영’이 될 것 같더라. (웃음) 그리고 탈영에는 꼭 만나야 할 사람이 있다거나, 한 사람의 구체적인 이야기가 들어가야 하지 않나. 하지만 저는 보편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래서 우리나라만 아니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지 관객에게 ‘이것은 당신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또 연출을 결심했을 때, 한 번에 쫙 빠르게 질주하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질주할 때 흔들리지 않기 위해 큰 줄기가 필요했는데, 저에게 중요한 건 ‘악몽’이었다. 음산한 악몽에서 빛과 찬란한 짜릿한 꿈을 맞이하는 것이 중요했다. 거기에 맞춰서 설정한 것 같다. 저는 사춘기 시절에 잠이 안 올 때 부모가 먹여주고 재워주는 공간에서 창문을 열고 몰래 나가면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를 생각한 적이 많았다. 그런 무의식 같은 걸 펼쳐보고 싶었다. 그래서 규남이 첫 등장에 눈을 번쩍 뜨고 무엇을 했냐면, 달렸다.” -
Q. ‘탈주’는 표현하자면 직선 같은 영화다. 그렇기에 관객들이 보는 재미와 긴장감을 더하기 위한 고민도 있었을 것 같다.
“저에게 중요한 건 ‘직진한다’는 것이었다. ‘규남(이제훈)은 왜 남한으로 갈까?’라는 생각을 두고 사실적인 고민을 이어갔다. 어떤 시나리오 버전에서는 다 왔는데 돌아가는 버전도 있었다. 그 버전을 본 사람들이 다 너무 싫어하더라. 고민은 맨날 하는 거니, 영화 속에서는 쭉쭉 가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그래서 ‘직진’을 가장 중요한 개념으로 두었다. 규남이 장애물이나 방해하는 사람이 나타났을 때도 당황하지 않고 그냥 직진하지 않냐. ‘너 누구야?’라는 질문에도 ‘나야’라고 답하면서. (웃음)”
Q. 그런 질주에서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 있었기에 끝까지 규남의 ‘탈주’를 응원하게 된 것 같다.
“저 혼자 생각한 거지만, 저는 ‘탈주’를 ‘뺄셈의 영화’라고 생각했다. 보통 영화 속에 다 넣지 않나. 이 캐릭터는 이런 사연이 있고, 전사가 있고. 그런데 그런 것을 일단 다 채워보고 다시 뺐다. 뺀 이유도 명확하다. 짧고 명확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보는 관객들에 따라서 다양한 무언가를 제가 밴 만큼 채워줄 거라고 믿었다. 그걸 좀 의도하기도 했다.” -
Q. 뺄셈의 영화라고 이야기했는데, 이제훈은 인터뷰에서 ‘이종필 감독이 거의 소설책 한 권 분량의 캐릭터에 대한 설명을 준비해 줬다’고 했다. 덕분에 완벽하게 규남을 이해할 수 있었다고.
“뺄셈을 하기 위해, 꽉 채워야 했다. 그래서 규남이 ‘탈주’가 시작되기 전까지 어떤 생각을 했는지를 다 적어 내려갔다. 일단 제가 알아야 했다. 거의 중편소설 분량으로 썼다. 그러고 나니 되게 고생했으니, 나 혼자 보기 아쉬워서 이제훈 배우에게 한 번 보여줬다. 그런 느낌이었다. 그 속에서 마지막 문장이 이거였다. ‘고민은 끝났다. 죽어도 좋다. 나는 간다. 누군가가 나를 보고 있다면, 나의 ‘탈주’를 응원해다오.’ 반면, 구교환과는 서로 혼란 주기의 연속이었다. 구교환 배우는 전형적으로 연기를 안 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이렇게 할까요?’라고 제안하면, 한술 더 뜬다. 서로 한술 더 뜨기 대결하듯 촬영했다. ‘탈주’에서 현상이 멀리 있는 규남을 망원경으로 보는 장면이 있다. 그런데 구교환이 찍기 전에 오페라를 보는 안경으로 보면 어떻겠냐고 하더라. 규남은 엇나가는 것에 항상 본질이 있는 캐릭터였다. 그래서 소품팀에서 실제로 준비해 줬다. 되게 열심히 찍기는 했지만, 그 소품을 사용한 장면을 쓰지는 않았다.”
Q. 그러면서 동시에 규남(이제훈)과 현상(구교환)의 균형감이 중요했을 것 같다.
“’탈주’ 속 두 캐릭터는 상반된 인물이다. 저도 영화를 연출하며 두 사람에게 모두 이입해 봤다. 그런데 저에게도 규남과 현상 같은 상반된 마음이 있더라. 현재가 만족스럽지 않고,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해보고 싶어서 탈피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는가 하면, ‘야 행복한 줄 알아’라고 스스로 안주하는 마음도 있다. 그런 내적 고민이 두 사람 같다. 규남과 현상을 애니메이션 ‘인사이드 아웃’처럼 내 안에 있는 마음들이라고 생각했다. 제 안에는 규남도 있고, 현상도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식으로든 이 둘은 공존한다고도 생각한다.” -
Q. 결말에 대한 해석도 궁금하다. 남한에서 살아가는 규남의 모습을 넣은 이유가 있을까.
“엄청나게 고민하긴 했다. 공모전을 생각하기도 했고, 개인 사업자 등록을 떠올리기도 했다. 그런데 다 별로더라. 보는 사람에 따라 ‘벌써 규남이 자본주의에 물들었냐?’라고도 하더라. (웃음) 배경이 북한에서 남한으로 되는 순간 너무 현실이 되더라. 그렇다고 북한 배경으로만 끝낼 수도 없었다. 그래도 이건 여기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결말을 넣게 됐다. 정말 사람은 다양한 것 같다. 저도 완벽하게 마음에 드는 건 아니지만, 그게 최선이었다.”
Q. ‘탈주’를 보면 자이언티의 곡 ‘양화대교’를 흥얼거리지 않을 수가 없게 된다. 중요한 기둥이 되는 곡으로 넣은 이유가 있을까.
“저는 많이 덜어냈는데, 권세휘 작가님 시나리오 속에는 DMZ에 근접한 북한 병사에게 남한의 노래가 많이 들려온다는 설정이 있었다. 그런데 저는 실용주의 연출가이기도 하고, ‘이 곡을 다 들려주는 게 맞나?’라는 생각에서 덜어냈다. ‘양화대교’는 항상 들으면 노스텔지어를 자극하는 게 있다. 자이언티가 실제로 강서구 출신으로 알고 있는데 저도 그렇다. 부모님께서 일하고 돌아오실 때마다 양화대교를 지나야 했다. 그 곡을 처음 들었을 때 몽글몽글한 마음이 있었다. 잊고 있던 걸 떠오르게 하는 촉매제의 역할을 해줄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저만 알고 있지만, 규남의 전사가 ‘양화대교’의 곡에 실릴 때, 형식은 뮤직비디오 같지만, 허우 샤오시엔의 영화 ‘비정성시’(1990) 같은 느낌을 가져가 보자고 생각했다. 온갖 무국적성을 담아보고 싶었다.” -
Q. 현상(구교환)과 선우민(송강)의 관계 설정도 궁금하다.
“’사람들이 극장에서 갖게 되는 만족감과 재미를 고민했다. 그래서 현상(구교환)은 단순한 추격자가 아니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현상에 빙의할 때 처음 시작은 단순했다. 열심히 추격하는 게 너무 싫어서 아내에게 전화하며 총을 쏠까 하는 생각도 했다. 그런데 대사가 너무 뻔하더라. ‘오늘은 너무 늦지는 않을 것 같아’라고. 그렇게 고민하던 중 독립영화를 하던 시절 친구를 만나게 됐다. 헤어지는데 제 어깨를 툭 치며 ‘난 진짜 너 영화 보고 싶어’라며 가더라. ‘무슨 말이지?’라고 생각하면서도 알 것 같았다. 그래서 ‘너 괜찮니? 만족하니?’라는 말을 현상에게 해줄 인물이 필요했다. 그런데 구교환이 다른 분장을 하고 나올 수는 없지 않나. 관객들이 보는 시점에 따라 재미있게 봐줄 수 있는 인물이 필요했다.”
Q. 이솜을 비롯한 난민들이 등장한 이유도 궁금하다.
“조사하다 보니, 실제로 북한에 유랑민이 있더라. 남한이나 중국으로 이동한 사람들도 아니고, 북한 체제에 벗어나 산속에서 자급자족하며 살아가는 무리였다. 시나리오에도 표현돼 있어서 ‘어떻게 구현할까?’ 고민했다. 저에겐 이들의 개념도 중요했다. 이들 역시 ‘탈주’한 사람들인데, 배회하는 자, 유랑하는 자들 아닌가. 잠깐이라도 나와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작품에 ‘너무 남자들만 나오나?’라는 생각을 하며 여자들이 무리 지어 멋있게 나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짧은 순간이라도 관객들이 ‘뭐지? 하지만 멋있네’라고 생각할 수 있기를 바랐다.”
Q. 지난 5월 8일 차기작 영화 ‘파반느’가 크랭크인해서 촬영 진행 중이다. 어떤 작품인지 말해줄 수 있을까.
“어제도 찍고 내일도 찍는다. ‘파반느’는 ‘탈주’와 완전히 다른 작품이다. ‘탈주’가 꽉 채운 뺄셈의 영화라면, ‘파반느’는 20대 시절의 꿈과 사랑을 담은 작품이라 복합적인 마음이다. ‘탈주’ 속 유랑민과 선우민의 장면은 사실 계산된 정확한 장면만을 촬영했다. 거의 촬영 컷을 다 섰다. 이만큼의 러닝타임에 공력을 집중해서 해야겠다는 계산 속에서 진행된 작품이다. 반면 ‘파반느’는 ‘그런 계산은 모르겠고, 그냥 찍을래’라는 식이라서 어떻게 될지 저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열심히 찍고 있다.”
- 조명현 기자 midol13@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