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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멜로, 휴먼, 코믹, 하물며 슬랩스틱까지. 일전한 톤 앤드 매너 안에서 한 번에 소화하는데도 캐릭터가 널뛰지 않게 하는 몇 안 되는 배우."
신혜선에 대해 '웰컴투 삼달리', '동백꽃 필 무렵' 등을 연출한 차영훈 감독이 이야기했다. 그 이야기가 극찬으로 들렸다면, 영화 '그녀가 죽었다'를 본 후 자연스럽게 고개가 끄덕여질 거다. '그녀가 죽었다' 속에서 신혜선은 과거 보여준 적 없는 자기 모습을 꺼낸다. '검사외전' 속 한치원(강동원)의 키스녀로 강렬한 인상을 남긴 신혜선은 영화 '결백', '타겟', '용감한 시민'에 이어 '그녀가 죽었다'까지 않는 용감한 도전을 이어오고 있다.
'그녀가 죽었다' 속에서 신혜선은 SNS 인플루언서 한소라 역을 맡았다. 초반에 한소라는 훔쳐보기가 취미인 공인중개사 구정태(변요한)의 시선을 통해 등장한다. 예쁘고, 사랑스러운 모습이다. 하지만 그 속에는 그렇지 못한 것들이 담겨있다. 한소라가 사랑스럽게 찍어 올린 명품 가방을 든 사진은 사실 카페에서 잠깐 화장실을 간 옆자리 사람의 가방을 잠깐 훔쳐 찍은 것이 그의 본심을 요약한다. -
남에게 보이는 것에만 마음을 기울이는 인플루언서 한소라를 연기한 신혜선은 사실 인스타그램에 관심이 없다. 그의 인스타그램은 452만 명의 팔로워가 있지만, 신혜선은 게시물을 올려야 할 때가 아니면 인스타그램을 잘 켜보지도 않는다. "누군가는 제 인스타그램을 보는 걸 좋아하실 수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올리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게시할 때 뭐라고 적어야 할지 모르겠어요"라고 이야기하는 그다. 그렇기에 한소라를 이해하지도, 공감하지도 못했다.
"시나리오에 나와 있는 대로라도 잘 표현해 보고 싶었어요. 사실 시나리오 속 대사를 그냥 읊기만 해도 가증스럽게 보이도록 잘 써놓으셨거든요. 그 지도를 잘 따라가야겠다 싶었어요. 제가 가진 것들 속에서 가증스러운 걸 찾아보기도 했는데요. 저는 제가 되게 들으면 '으, 싫어'라고 하는 제 목소리가 있거든요. 그 목소리로 '그녀가 죽었다'를 연기했던 것 같아요. 평상시 목소리와 말투가 아닌, 가식적일 때 쓰는 그 목소리를 낸 거예요. 그래서 촬영을 마친 뒤, 얼마 후에 내레이션 녹음을 할 때 힘들었어요. 제가 목 컨디션이 예민한 편인데, 오랜만에 하려니 그 목소리가 잘 안 나오더라고요. 진짜 제가 제일 싫어하는 목소리에요. 그래서 관객들에게도 죄송하게 생각해요." -
그래서 '그녀가 죽었다' 속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이 신혜선에게도 힘들었다.
"약간 저도 낯설었고, 징그러웠어요. 제 연기를 스스로 평가하기는 어렵지만, 편집이나 음악 등 영화 속 다양한 편집이 정말 가증스럽게 잘 표현된 것 같아요. 제가 가지고 있는 최대한의 조건 안에서 꺼낸 가증스러운 부분 때문인지, 제가 저를 못 보겠더라고요."
옆자리 사람의 명품 가방을 잠깐 훔쳐서 셀카를 찍는 카페 장면이나, 구정태(변요한)과 한소라(신혜선)가 처음 만나는 부동산 장면을 찍을 때도 현실을 깨닫게 됐다. 특히 신혜선은 커피를 못 마시는 자신을 그대로 투영해 부동산에서 커피믹스가 아닌 녹차를 마시는 소라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
"부동산 장면은 한 마디 한 마디가 어려웠어요. 나중에 발악하는 장면 찍을 때보다 그 장면 촬영이 더 어렵더라고요. 소라의 본모습을습을 많이 찍은 상황도 아니었거든요. 정태가 보는 소라의 예쁘고 착한 듯한 모습이 담겨야 하는데, 그게 부담스럽더라고요. 소라로서 가식적인 연기를 하는 게 아니라 신혜선이 가식적으로 연기하는 것 같아서 힘들었어요."
그동안 한국 영화에서 '악녀'는 정면승부보다는 독극물 등을 이용한 복수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한소라는 그렇지 않다. 구정태와 직접 부딪힌다.
"제가 운동 신경이 좋은 사람은 아닌데요. 소라랑 정태가 부딪히는 장면은 어려운 합은 아니었어요. 안전하게만 찍으면 되는 거라, 안전 수칙을 지키며 찍었고요. 굳이 말하자면, 그냥 막 싸우는 '개싸움'이라서요. 그 느낌을 잘 담아내고 싶었어요. 진짜 힘으로하면 당연히 안 될 텐데,, 미친 듯이달려든다고 느끼게 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 같아요. 그러면 정태가 소라의 힘보다는 그 기세에 눌리는 느낌이 들 것 같았어요. 연출, 음악, 분위기 등의 도움을 많이 받은 것 같아요." -
'그녀가 죽었다'에서 재회한 변요한과 신혜선은 다양한 공식 석상에서 서로에 대한 극찬을 이어가며 훈훈한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정작 자신의 칭찬을 듣는 것을 힘들어하는 이들의 모습은 '칭찬 지옥에 갇힌' 듯 보였다. 촬영 현장에서도 변요한은 좋은 오빠였고, 선배였다.
"(변요한) 오빠는 나이 차이는 얼마 안 나지만, 선배님이고, 저보다 훨씬 경험도 많고, 노련하세요. 안전하게 찍을 수 있게 도와주시고요. 완성된 작품을 보면서 '오빠가 나 없을 때도 많이 고생하셨구나'' 싶었어요. 거기에 되게 아이러니하게 정태가 귀여워 보이는데 싫고, 이런 걸 잘 표현해 주셔서 소라가 더 극적으로 보인 것 같아요. 너무 믿고 의지할 수 있을 만한 사람이었고, 같이 만날 때도 리허설을 심하게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호흡이 잘 맞고, 에너지가 공간을 잘 채우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
'그녀가 죽었다'를 보면서 앞서 말한 차영훈 감독의 표현이 떠올랐다. 거기에 '스릴러', '빌런'이라는 단어를 추가해야 할 것 같지만 말이다. 신혜선은 작품에 임할 때, 어디에 가장 중심을 두고 있기에 이런 결과를 이어올 수 있었을까.
"저는 글에 나와 있는 게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사실 제가 아이디어가 샘솟는 사람도 아니고, 그렇다고 글재주가 있어서 첨언할 수 있는 사람도 아니고, 애드리브가 뛰어난 배우도 아니거든요. 그래서 저는 글을 읽었을 때 제 느낌과 글을 쓰신 분의 의도가 맞다면, 그걸 보시는 분들에게 잘 전달해 주고 싶어요. 글을 계속 보다 보면, 캐릭터를 관통하는 성격적인 지점이 있거든요. 그 지점을 조금 더 부각해서 보는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게 해주려고 한 것 같아요. 쉽게 예를 들면, 소심한 사람이라면 같은 말을 해도 큰 소리를 못 낼 거잖아요. 성격에 따른 그 차이를 가져가려고 했어요."
신혜선은 드라마 '나의 해리에게'로 올해 활약을 이어갈 예정이다. 그는 "해리성 인격 장애를 가진 인물이에요. 제가 하고 싶었어요. 대본을 너무 재미있게 봤거든요. 아직 촬영 전입니다"라며 웃음 지었다. '그녀가 죽었다'에서 시선에 따라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여줬던, 신혜선이 보여줄 해리성 인격장애라니, 기대가 더해진다. 되새기고 되새기며 글을 보고 떠올릴 신혜선의 노력을 깊이 신뢰하면서 말이다.
- 조명현 기자 midol13@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