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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이라는 단어는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를 관통하는 단어이다. 사전적 의미로 '인연'은 사람들 사이에 맺어지는 관계, 어떤 사물과 관계되는 연줄, 그리고 일의 내력 또는 이유를 뜻한다. '패스트 라이브즈'에서는 12살에 한국 서울에서 만난 나영(그레타리)과 해성(유태오)가 24년 만에 미국 뉴욕에서 재회하게 되는 이야기를 담은 영화다. 나영의 공간은 한국이었고, 그가 이민가며 갖게 되는 이름 노라의 공간은 미국이었다.
해성은 나영의 시간에 속해있는 인물이었다. 그를 배우 유태오가 맡았기에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는 더 풍성한 서사를 갖게 되었다. 유태오는 독일에서 태어나 고등학교까지 졸업한 후, 미국에서 연기 공부를 시작했다. 그리고 미국에서 11살 연상의 한국인 아티스트 니키리를 만나 결혼했다. 이후 두 사람은 한국에서 자리를 잡았다. 유태오는 독일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한국인의 정체성을 가진 한국인이라고 이야기해 왔다. 그런 그가 한국, 나영의 시간 속에 담긴 해성 역을 맡아, 미국, 로라의 공간으로 향하며 더 다양한 서사를 관객에게 심어준다. 유태오의 아내 니키리에 대한 이야기가 인터뷰에서 빠질 수 없던 이유이기도 하다. -
Q. '패스트 라이브즈'는 '제96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아쉽게 수상의 영예를 안지는 못했지만, 전 세계 영화제 77관왕 218개 노미네이트에 올랐다. 그 시간을 지나 한국에서 개봉한 소감도 궁금하다.
"제가 다국적인 문화 배경 출신이라, 언어와 어휘력에 대한 걱정은 늘 있다. 셀린 송 감독님은 '해성'에 대해 '평범한 한국 남자를 표현해야 한다'라고 하셨다. 저를 캐스팅한 이유가 궁금했지만, 묻지는 않았다. 해외에서 처음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 인연이라는 철학과 마지막 장면의 여운, 그 두 가지 요소 때문에 눈물이 났다. 그 느낌만 잘 전달되면, 누구라도 영화를 잘 볼 수 있겠다는 믿음이 있었다. 설레기도 하고, 기대되기도 한다."
Q. '평범한 한국 남자' 해성에게 어떻게 다가갔나.
"캐릭터를 접근할 때, 저와의 차이점과 공통점을 모두 탐구한다. 그리고 간극을 줄이기보다, 저와 비슷한 포인트에 더 집중하려고 하는 편이다. 저와 해성의 비슷한 면은 우리 문화에서 변함없이 살아야 하는 한이었다. 다국적인 배경 안에서 소속감의 결핍을 채우려는 저만의 노력이 있었다. 그 한이 제 안에서 아름다운 슬픔으로 남아있다. 제 삶에서 크게 차지하는 감성이다. 그 감성을 멜랑콜리의 표현으로 치환해 해성을 잘 표현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그걸 믿고 갔다." -
Q. 극 중 영어를 못하는 연기도 해야 했다.
"제 연기 코치님이 계신다. 한국어 스피치 강사, 언어 치료도 하시고 배우의 업도 가진 분이시다. 그분은 어떤 어휘를 보면, 그 안에 담겨있는 배경까지 설명해 주신다. '패스트 라이브즈'에서 저는 우리나라 시장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고, 외국 사람에게 이 어휘가 어떻게 들릴지도 같이 고민했다. 할리우드에서는 동양인 남자를 무(無)인간화 시키는 요소들이 많다. 여성 캐릭터는 한 오브제가 되었는데, 남성 캐릭터는 너드, 코미디, 무술 스테레오 타이프 등으로 소비되곤 한다. 하지만, 해성을 통해 남자 주인공으로 로맨틱한 리드를 해야 했다. 어릴 때, 외국 영화를 보면 시처럼 느껴지지 않나. 한국어의 억양에서 그런 지점을 발견해 각 시장에 감수성을 찾아서 밀고 나갔다."
Q. '인연'이라는 의미를 스스로 소화하는 과정이 필요했을 것 같다. 어떻게 받아들였나.
"'인연'이라는 단어에서 팔자, 운명, 그리고 여한 없는 슬픔, 아름다운 아픔 등의 감정이 있다고 생각했다. '패스트 라이브즈'의 결말을 아름답게 해소하기 위해 완전히 이해하고 소화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런 면에서 이 작품 자체가 제 배우로서의 커리어를 변화시키기도 했다. 연기를 기술적으로 접근하는 방식이 달라졌다. 제가 했던 캐릭터들을 '인연'이라는 관점으로 바라보면, 제가 살았던 영혼이 되어버린다. 그 안에서는 기술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더 철학적인 고민으로 깊이 빠지기도 한다. 연기에 접근하는 방식이 완전히 달라졌다." -
Q. 해성과 노라의 만남은 단 이틀뿐이었다. '패스트 라이브즈'에서 꼽는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 있을까.
"제가 포함된 장면은 아직 객관화시키지 못했다. 그래서 제가 나온 장면을 제외하고 꼽아보자면, 노라와 아서가 침대에서 같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 좋았다. 아서가 노라에게 '잠꼬대 할 때 한국어로만 하는 거 알고 있냐'라고, '그래서 한국말을 배우고 싶다'라고 하는데 그때 울컥하게 되더라. 정체성이라는 것이 참 재미있는 것 같다. 한 나라에서 줌을 당겨서 가까이 다가가면 한 집에도 각자의 방이 있고, 사람마다 품고 있는 각자의 언어가 있지 않나. 서로 소통하고 싶어 하고, 그 안에서 오해가 생기기도 하고, 싸움이 생기기도 하고. 그 과정이 재미있는 것 같다."
Q. '패스트 라이브즈' 속 재회한 노라와의 장면들도 인상깊었지만, 아서 역의 존 마가로와의 침묵 역시 많은 의미를 암시했다. 현장 분위기도 궁금하다.
"셀린 송 감독님께서 메소드 연기가 가능한 환경을 만들어주셨다. 극 중 해성과 아서(존 마가로)가 아파트에서 처음 만나는 장면이, 실제 저와 존 마가로 배우의 첫 만남이었다. 일부러 못 만나게 하셨다. 게임을 하듯 연출을 하셨다. 캐스팅 소식을 듣고 존 마가로 배우에 대한 조사했다. 어떤 영화에 출연했고, 인터뷰도 찾아봤다. 그 분도 한국인과 결혼을 하셨더라. 취향도 감수성도 잘 맞을 것 같다는 느낌이 왔다. 보이지 않는 형제 같은 동질감이 느껴졌다. 섬세한 호흡을 맞추는 연기를 할 수 있어서 좋았다." -
Q. '패스트 라이브즈'의 오디션 등 제작 과정에서 곁에 있던 아내 니키리의 반응도 궁금하다.
"니키리가 이번 작품도 읽었다. 제 커리어에 어떤 제안이 오고, 오디션을 보고, 이런 모든 과정에서 함께 고민해 주는 사람이다. 저보다 한 발 더 단단하게 세상에 있고, 저는 여기 붕 떠 있는 사람이다. 저는 있는 그대로 드러내서 보여주고, 모든 소통을 한다. 니키리는 그걸 잘 정리해 주는 사람이고, 시나리오의 장단점을 함께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많은 베드타임 토크를 갖는다. 그때가 가장 솔직한 시간인 것 같다."
Q. 한국 배우 최초 영국 아카데미(BAFTA)상 남우주연상에 세계적인 스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노미네이트 자체만으로도 유의미한 성과를 보여줬다. 시상식에 참석한 소감이 궁금하다.
"저는 미래에 살지도, 과거에 살지도 않고, 현재에 있다. 런던에서 시상식 당일 아침에 매니저가 '스피치 준비했냐?'라고 묻더라. 1/6의 가능성이 있으니 해야 한다고. 그래서 2시간 동안 머릿속에서 스피치 리허설만 했다. 정말 긴장을 많이 했다. 그러면서도 '킬리언 머피'가 상을 받았으면 했다. 동양적인 감수성이긴 하지만, 저는 20년 전부터 킬리언 머피를 공부하는 사람이고, 선후배 관계에서 선배가 타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시상식이 끝나고 이어진 디너에서 용기를 내서 킬리언 머피에게 '옛날부터 좋아했다, 당신이 수상자라 좋았다'라는 이야기를 했다. 저를 안아주며 고맙다고 하시더라. 끝난 줄 알았는데,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을 만난 적 있냐고 물으시며, 소개해 주셨다. 저는 20년 동안 연기를 해왔지만, 아직 해외에서는 신인 배우라고 생각한다. 저에게 5년이라는 시간을 주고, 연기로 실력을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 커뮤니티 안에서 일원이 되길 바라고 있다."
Q. 영화 '로그 인 벨지움'의 각본, 각본, 촬영, 프로듀서, 음악, 편집 등을 맡지 않았냐. 또 다른 창작 계획이 있다면.
"연출은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는 일이라 욕심을 버렸다. 대신 제가 기획하고 작가님께 작업을 맡겨서 타이밍이 맞을 때, 제가 연기할 기회를 가지려 한다. 몇 가지 기획들이 있다. 조금 더 먼 자리에서 창작하지만, 제 갈증을 충족시키는 팀워크로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가려 한다. 각자 분야의 사람들이 모여 재미있게 만들자고 하고 있다."
- 조명현 기자 midol13@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