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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은 조연을 빛나게 해주는 게 주인공이지, 자기가 빛나려는 게 아니거든요. 저도 소외감을 많이 느껴봐서 알아요. 그런 것 때문에 꿈을 포기할까 고민하기도 해요. 그런데, 제가 경력이 되어서 극을 끌어갈 수 있다면, 같이 가면 좋겠어요. 이 이야기에, 사회에 일원으로 꼭 필요한 사람이라고. 그러면 좋은게 아닐까 싶습니다."
배우 김남길이 말했다. 오후 1시가 조금 지난 맑은 날씨의 삼청동이었다. 그렇게 말하는 김남길에게 빛이 났다. 김남길과 만난 건 넷플릭스 시리즈 '도적: 칼의 소리' 때문이었다. 1920년, 일제 강점기에 간도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 나라도, 손에 쥔 것도 없는 사람들이, 가족을 지키기 위해 칼을 쓰겠다고 뭉치게 된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김남길은 그 도적단에서 수장 '이윤' 역을 맡았다. 어떤 면에서 이윤과 김남길은 닮아있었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 칼을 든 수장, 조연을 빛내기 위한 주연으로 말이다. -
처음부터 이윤(김남길)이 가족을 지키기 위해 칼을 들었던 것은 아니다. 어렸을 때 이윤은 이광일(이현욱)의 몸종이었다. 일제 강점기가 되어 광일로부터 면천된 후, 그의 친구이자 부하가 되어 일본에 공을 세었다. 하지만 그의 칼이 무고한 우리나라 사람을 향했던 일을 계기로 모든 걸 버리고 간도로 향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 땅과 사람들을 지키는 도적(刀嚁)단을 꾸리게 된다. 무언가를 빼앗는 것이 아닌, 가족을 지키는 '칼의 소리'라는 뜻의 집단이다.
"조선 독립에 대한 이야기라면, 주권을 되찾아 독립을 이루려는 열망이 큰 인물들이 있잖아요. 반면, 그 시대를 어쩔 수 없이 통과하며 살아가는 사람도 있고, 마적처럼 하루하루 사는 것에만 관심이 있을 수도 있고요. '동포를 팔아먹어야지만 살 수 있는 그런 시대에 살게 해서 미안하다'라는 최충수(유재명)의 대사가 딱 그 시대를 잘 설명해주는 것 같아요. 일본군인 오오카(정무성)도 일본의 승리보다 '내 고향에 가고 싶다'고 이야기하고 있고요. 지금도 그런 상황이 되면 마찬가지일 거로 생각해요. 앞장서서 나라를 지키고 싶은 사람도 있겠지만, 그냥 내 가족을 지키고 싶어 하는 사람도 있겠죠."
"만약에 독립군이 되는 이야기였다면, 이 작품을 안 했을 수도 있어요. 우리가 일제 강점기 때를 담는 건 대부분 독립군과 일본군을 양분화해서 이야기하잖아요. 그런데 '도적: 칼의 소리'는 그렇지 않았어요. 나라와 시대보다 자신에게 소중한 사람을 위해 가족과 삶의 터전을 뺏으려는 사람에 맞서는 이야기를 담고 있잖아요. 그게 이데올로기적인 부분에 맞닿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
김남길이 합류한 시기는 명확하지 않다. '도적: 칼의 소리'의 초고부터 제안을 받았다. '도적: 칼의 소리'를 집필한 한정훈 작가는 고규필 배우와 친분이 있었고, 그렇게 김남길에게까지 이야기가 닿았다. 처음에는 코믹 장르라고 들었다. 그리고 이야기가 구체화되며 웨스턴 장르의 성격이 강해졌다. 김남길은 "웨스턴 영화가 영어권에서 제작되는 것이 오리지널리티가 더 강할 수 있지만, 일본과 조선이 어우러진 응집된 만주라는 도시에서 벌어지는 웨스턴 장르가 재미있겠다 싶었어요. 현대로 넘어가는 이야기일 수 있겠다 싶었고요"라고 자신의 생각을 전했다.
웨스턴 장르의 묘미 중 하나는 바로 '총'이 아닐까. 그리고 김남길은 그 묘미를 '도적'에서 가장 잘 살렸다. 마치 손에 붙어있는 듯 돌아가는 총기에 불이 붙는 순간, 그 순간을 더욱 짜릿하게 만든 이유였다. 그리고 이를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은 '도적' 전에 촬영한 '아일랜드' 현장에서도 그가 총을 돌렸기 때문이었다.
"'아일랜드'에게는 미안하지만, 눈뜨면 촬영장 가기 전에 총을 몇 번 돌려보곤 했어요. 시간이 지나니 익숙해지더라고요. 이윤이 유쾌하거나 능동적으로 무언가를 더하는 것이 아닌, 정적인 캐릭터라고 생각했어요. 촬영하면서 힘들었던 건 '그냥 지금 장기룡을 죽이면 안 되나', '감옥 안에서 먼저 죽이면 안 되나' 등 문제가 있는 요소를 보고 돌아서는 마음이었달까요? 한편으로 그런 것에 대한 답답함이 있었어요. 당장 눈앞에 보이는 불안 요소이지만, 지금 당장 중요한 내 가족이 먹고사는 걸 들여다보기 위해 감내하는 지점이요. 아이러니했죠. 어찌 보면 기다린다고 생각했거든요. 차분함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
'도적: 칼의 소리'의 마지막은 대규모의 싸움을 예고하는 듯 마무리됐다. 이광일(이현욱)이 희신(서현)의 정체를 알게 됐고, 도적단은 가족의 삶을 위협하는 존재를 향한 싸움에 나섰다. 희신을 만나기 위해 잠깐 서울에 온 이윤은 독립군에게 만주의 상황을 듣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예고하듯 마무리된 시즌 1에 시즌 2를 향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도적'을 촬영하며 "차분함에 대한 고민"을 했던 김남길 역시 같은 마음이었다.
"배우가 대본에 쓰여있는 대로 연기한다고 하지만, 메인들에 대한 서사를 풀다 보니 다른 인물들에 대한 서사가 다 풀어지지 않았잖아요. 왜 '도적단'에 모여있는지에 대해 풀여주면 좋겠다는 마음이 있었어요. 그런데 시즌 2에 들어가지 못하면 어쩔 거냐고요. 저는 시즌 1에서 끝날 수 있으니, 모든 재미를 다 넣자고 했어요. 다 때리고 부수자고요. 사실 뒷부분에 일본 전쟁 영웅이라고 칭송받는 메인 빌런이 나오거든요."
"빨리 제작되지 않으면, 잊혀져요. 사람들이 시즌 2에 관심이 없어져요. 지금 만들어진 것의 아쉬움을 완성도 있는 보여주려면 빨리 만들어져야 하지 않을까라는 바람을 가지고 넷플릭스를 압박하고 있어요. 그런데 저만 하고 싶다고 해서 되는 건 아니니까요." -
김남길은 뉴스 프로그램에 나와서 철이 들지 않은 자신을 이야기한 바 있다. 그는 "저는 철든다는 것이 좀 더 무겁게 만든다고 생각하거든요. 단순히 철부지, 천진난만하게 사는 게 아니라요. 캐릭터나 작품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확고한 내 기준을 가지고 더 깊이 생각하는 것만큼 유연성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라고 설명을 이어갔다.
"제가 고정되어 있지 않아야, 받아들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7, 8살이 천진난만하지만, 좋은 이야기를 듣고 그 방향대로 성장해 가는 과정이 있잖아요. 저도 예전에는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작품으로 인해서 보여주고자 하는 것들을 제가 이해하지 못하거나, 납득이 안 되면 그것을 하기가 참 쉽지 않더라고요. '삶에 대해서 이렇게 접근하는 건 말이 안 돼'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고, 심지어 악역을 할 때는 진짜 힘들었거든요. 그런데 악역이 사실 특별한 이유가 없어요. 권일용 교수님께서도 그런 말씀을 하셨거든요. 악인들은 나름의 논리가 있어서 상대방이 얼마나 반응하는지를 궁금해한다고하더라고요. 그렇지만 그들은 아무 이유 없이 본능적인 것에 많이 치우쳐져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런 말을 듣고, 저도 도움을 많이 받게 되는 것 같아요." -
김남길의 사려 깊은 마음은 이윤으로 오른 말에게도 전해졌다. 사실 김남길은 NGO 단체 '길스토리'를 통해 동물권 보호를 위한 움직임을 이어가고 있다. 그는 "낙마한 경험 이후, 말이 겁이 많은 동물이라는 걸 알게 됐어요. 공격적인 걸 당할 때 피하고자 뛰는 거죠. 원래 말이 평상시에 잘 뛰지 않는대요. 말의 성향에 대해 많이 배우게 됐고요. 되게 아이같이 다뤄야 하더라고요"라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많은 배움은 행동으로 이어졌다.
"말이 무리 생활을 좋아해요. 여러 무리의 말 중 한 마리를 빼 와서 촬영하려고 하면, 그 말이 자꾸 그 무리가 있는 쪽으로 가려고 해요. 그걸 채찍질하고, 아프게 하면 안 되거든요. 친구들 무리를 말이 가야 하는 방향에 두면 되는 거예요. 그리고 말도 처음 가는 길을 두려워하고 불안해해요. 계속 '괜찮다'라고 안심하게 해주고, 여러 번 왔다 갔다 하면 돼요. 촬영하면서 말이나 소 등 동물들은 더 예민하게 다뤄야 하는데, 사람의 잣대로 촬영하게 되잖아요. 그런 지점에서 동물권에 대한 인식을 갖게 되는 것 같아요. 제가 경험에서 오지 않는 건 잘 모르거든요." -
최근 김남길은 MBC 4부작 다큐멘터리 '뭐라도 남기리'에 출연하기도 했다. 해당 프로그램은 대한민국 구석구석 아름다운 길을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며 다양한 삶의 모습과 우리 시대의 멘토와의 만남을 담고 있다. 김남길은 "저는 그게 다 연기와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해요"라며 "개인적으로 그런 게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분들은 스스로 엄청 대단한 삶을 살아왔다고 생각하지 않으시거든요.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해 살아온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나와 다르지 않구나' 위로를 받고, 힘을 얻게 되거든요. 그런 것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라고 함께하게 된 이유를 전했다.
"배우가 유명인으로 대중에게 사랑을 돌려드리는 것이 꼭 당연한 건 아니에요. 안 돌려준다고 나쁜 건 아닌데, 배우는 좀 더 삶에 맞닿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어르신들께서 '나이를 먹으면,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라고 하시잖아요. 세상에 어느 정도 관심을 가지고 들여다볼 때, 연기에도 고민이 담기는 것 같아요. 어떻게 표현할지에 대한 고민이 든,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에 대한 고민이든. 사실 깊지는 않고 얕습니다."
"더불어 사는 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바라는 것들이 시대적으로 다르고, 추구하는 것들도 다 다르잖아요. 우리가 살아가며 행복감을 조금이라도 나눌 수 있는게 더불어서 잘 사는 게 아닐까 싶어요. 소외감이 들지 않게, 빛날 수 있게. 같이 살아가는 사회의 일원으로 모두 필요한 존재들이라는 걸 서로 느끼면서 살면 참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조명현 기자 midol13@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