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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관계에 대해, 시간과 운명에 관해 이야기하는 작품 같아요. 그런데 결국 그 모든 지난한 과정을 통과한 사람이 '그런 사랑이 당신에게도 있을 거예요'라는 말을 전해주는 것 같았어요. 다소 판타지일 수도 있지만, 떠올리면 기분 좋고, 나를 안아주는 것 같은 기분이 들잖아요."
전여빈은 대만 드라마 '상견니'의 팬을 자처했다. '상견니'를 뜨겁게 좋아하는 팬들을 이른바 '상친자('상견니'에 미친 자)'라고 부르는데, 그만큼은 아니지만 한 시청자로 작품을 애정했다. 그리고 "행운처럼" '너의 시간 속으로'가 전여빈을 찾아왔다. 앞에서 이야기한 이유로 전여빈은 "다가와 준 행운을 거머쥐겠다"라며 출연을 결정했다. 그에게 어렵지 않은 결정이었다.
"저는 좋아하는 게 생기면 이유가 단순해져요. 이유 하나 건네는 작품이면, 그 이유에 제가 뒤돌아보지 않게 되면, 선택하게 되는 것 같아요. 엄청나게 명쾌해져요. 작품을 고를 때 재고 따지기보다 마땅히 '하고 싶다' 싶으면 무한한 의지가 생성되며 하게 되는 것 같아요." (웃음) -
'너의 시간 속으로'는 2023년의 한준희가 1998년 권민주의 몸을 오가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았다. 2023년의 한준희(전여빈)는 갑작스러운 사고로 세상을 떠난 오랜 연인 연준(안효섭)을 잊지 못해 힘들어하는 인물로, 우연히 받은 카세트 플레이어에 테이프를 넣고 재생하는 순간 1998년 권민주의 몸에서 깨어난다. 그리고 그곳에서 연준의 모습과 같은 시헌(안효섭)과 그의 절친한 친구 인규(강훈)을 만나며 미스터리한 로맨스의 중심에 서게 된다.
"준희도 연준이와 사랑하는 20대의 준희와 연준이를 잃은 30대의 준희가 있잖아요. 특히, 30대의 준희는 겉으로 봐서는 아무 일도 없어 보이지만 연준이의 죽음을 절대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애매모호한 상태의 준희가 필요했거든요. 그리고 민주도 원래의 민주가 있고, 준희가 민주의 몸으로 들어왔을 때의 민주, 모든 과정을 거친 후 준희인 척하는 민주, 그리고 자신을 부정하는 극한의 상태의 민주까지 있었고요. 그 결이 나이테처럼 너무 섬세했어요. 제가 원했던, 배우로서 반가운 과제였기 때문에 그 결을 세세하게 잘 찢어가며 표현하려고 한 것 같아요. 그 기회를 만나 어렵고, 스트레스받고, 히스테릭해질 때도 있었지만, 기꺼이 원했던 과정들이었어요. 현장에서 사람들에게 잘 받아들여지는 순간 큰 기쁨을 느끼기도 했고, 어떤 날은 한없이 절망을 느끼기도 했어요." -
1인 2역 이상의 감정이었다. 그런데 '너의 시간 속으로'를 끝까지 몰입해서 볼 수 있는 것은 그 모든 민주와 준희의 차이가 전여빈을 통해 느껴지기 때문이었다. 눈빛, 표정, 말투에도 차이를 주었다. 이에 '너의 시간 속으로'를 연출한 김진원 감독은 "전여빈의 많은 준비 덕분에 걱정이 사라졌다"라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아마도 저뿐만 아니라, 배우들은 자기가 맡은 캐릭터를 다 열심히 할 거예요. 그 '준비'라는 것은 텍스트로만 그려진 인물과 상황을 배우로 어떻게 표현할지에 대한 예의 같아요. 제가 해석한 상황이나 감독님을 비롯한 현장의 스태프, 동료 배우들의 생각이 모두 다를 수 있으니, 저도 마음을 열고 준비해 가요. 변수가 있을 수 있지만, 제가 유사하게 믿고 있고 그려내고 싶은 캐릭터의 농도는 이런 모양이라고 우선순위를 만들어 두어요. 그런데도 언제든 현장에서의 피드백을 반영해 바꿀 수 있는 용기도 준비해가요. 그게 어떻게 보면 유연함 같고요. 현장에 절대로 대책 없는 상태로 당도하지 않는 것 같아요. 제가 가지고 간 선택이 정답이 아닐지라도, 선택지를 다양하게 만들어 가는 것 같아요. 자신 있게 보여드릴 수 있도록. 그 시간을 사는 건 저니까요." -
전여빈이 표현하는 중심에는 '시나리오'가 있었다. 전여빈은 "저는 텍스트에 굉장히 충실한 배우 중 한 명"이라고 자신을 표현했다.
"대본을 받아들임과 동시에 대본에서 느껴지는 음성이나, 동선이나, 표정이나, 리듬이나, 에너지 등이 느껴질 때가 있어요. 저는 그걸 느끼며 상상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에요. '너의 시간 속으로'의 준희와 민주는 극명하게 다른 느낌이었어요. 배우라는 사람은 자기 안에 어떤 감정들, 자신이 느낀 소회를 밖으로 꺼내 표현하고 싶어 하는 존재들이니까요. 준희에 맞게, 민주에 맞게 모든 감각을 열어두면서 표현하고자 한 것 같아요." -
'너의 시간 속으로'에서 전여빈이 가장 도드라진 장면을 꼽자면, 민주가 자기 머릿속에 갇혀있는 준희와 이야기하게 되는 장면이다. 두 사람을 모두 전여빈이 연기했고, 두 사람의 대화로 전개되는 장면은 전여빈이 교대로 연기했다. 전여빈 한 사람이 보여준 연기지만, 미묘하게 다른 말투, 외모, 그리고 눈빛까지 더해져 민주와 준희, 그 두 사람으로 보였다.
"정말 어려웠습니다. 처음에는 제 영상을 틀어놓고 연기했어요. 제가 연기를 하는데 틀어놓은 영상에서 다음 대사로 넘어가 버리면 사운드 때문에 그대로 NG가 나더라고요. 벽에 소리치는 연기를 하고 있구나 싶었어요. '그린, 블루 스크린 앞에서 연기하는 배우들 정말 대단하다' 싶어요. 나중에는 호흡이 도저히 맞지 않아서 감독님께 스태프 중 건조하게 대사를 받아쳐 줄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고 말씀드렸어요. 다른 스태프께서 대사를 던져주신 덕분에 마주 보는 장면들을 잘 촬영할 수 있었습니다."
"쉽지 않았어요. 주고받는 감정이 깊은 장면이라서요. 하루 종일 혼자서 연기를 해야 했는데요. 체력적으로도 지치더라고요. 혼자 바닥에 주저앉아 한숨을 쉬기도 했어요. 너무 감사한 게 촬영팀, 조명팀, 연출부 등 스태프 모두가 저를 도와주셨어요. 혼자 주저앉아 있고, 공허하게 응시하고 있으면, 스태프들이 다가와 주셨어요. 쉽게 '힘내'라고 말씀도 못 하세요. 그런데 눈빛으로 '당신을 응원하고 있어요'라는 말이 느껴졌어요. 같이 만들고 있다고 얘기해주는 것 같았어요. 여전히 그때 생각하면 고마운 마음이 들어요." -
스태프들을 이야기하면서 울컥하는 여배우를 눈앞에서 처음 봤다. 그만큼 '인연'에 대한 애정이 큰 반증이다. 그렇기에 전여빈은 당신에게도 '너의 시간 속으로' 같은 사랑이 있을 거라는 이야기를 해주기 위해 그렇게 고민하고, 힘들어하면서도 다시 일어섰다. 그랬던 작품은 전여빈에게 어떻게 남게 될까.
"모르겠어요. 지금 딱 단언하지는 못하겠어요. 좀 더 시간이 지난 후에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저는 더 성장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긴 호흡으로 배우 생활을 이어가고 싶어요. 오늘날의 '너의 시간 속으로'의 기억과 느낌을 가지고 그다음 발걸을 잘 걸어가고 싶어요. 저는 현재가 제일 중요한 사람이거든요. 지금을 잘 내딛고 싶어요. 연기라는 게 제가 느낄 때는 무기 같은 게 없는 것 같아요. 만나는 캐릭터가 한 명도 같지 않잖아요. 함부로 비슷하다고 생각해서도 안 되는 것 같아요. 제가 만나는, 만나게 될 인물들 각각을 지켜주고 존중해 주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
넷플릭스 시리즈 '너의 시간 속으로'를 통해 전 세계 시청자와 만난 전여빈은 오는 27일 개봉하는 영화 '거미집'을 통해 관객과의 만남을 앞두고 있다. 특히 '거미집'은 올해 칸국제영화제에 공식 초청돼 가장 긴 기립박수를 받은 작품으로 기록됐다.
"저는 제가 실체 없이 둥둥 떠다니는 기분이 싫어요. 땅에 발을 붙여놓고 싶어 하는 사람입니다. 저에게 다가오는 모든 일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려고 해요. 차분한 기쁨으로 받아들이려고 하고요. 지금 누릴 감사함은 감사함대로 누리면서, 조금 담담하고 굳건하게 마음을 잡으려고 합니다. 제가 가진 마음이 부푼 꿈처럼 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한 사람으로 중심을 가지고 잘 걸어보자는 마음을 자꾸 먹고 있습니다. (웃음)"
- 조명현 기자 midol13@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