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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트라는 대재앙을 겪은 중세 유럽은 인문주의에 근거한 새로운 지적 풍토를 일구어냈다. 다름 아닌 ‘근대’의 탄생이었다. 그 풍토에서 배양되었던 인간 중심의 합리주의와 과학·기술의 발전은, 여전히 21세기 현대 사회를 이루는 주요한 축으로 기능하고 있다. 우리의 삶과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모든 질서와 제도, 관습들이, 사실은 500년이 채 되지 않는 근대의 발명품인 것이다.
지난 몇 년간, 인류는 기존의 사회, 경제, 문화 구조에 대한 또 다른 도전과 변화를 경험했다. 코로나 바이러스라는 이름의 공포가 온 지구를 덮쳤다. 그 시기 동안 주목받았던 디지털 세계에서의 존재와 상호작용, 질서들은 근대 문명이 이룩해낸 그것과는 전혀 다른 존재론과 가치 체계를 요구했다. 그렇게 도전과 변화의 소용돌이에서 잉태된 메타버스와 인공지능(AI)은 지난 500년간 견고했던 근대의 아성에 커다란 균열을 예고하는 것만 같다.
인터넷 대중화 30년 이래, 인류는 현실 세계와 디지털 세계의 극명한 구분을 당연하게 여겨왔다. 물리적 현실만이 진실이고, 디지털에 기반한 ‘만들어진 세계’는 거짓이나 허상의 영역이어야만 했다. 대중은 혹여라도 디지털 세계가 현실의 고유한 영역을 침범하거나 대체할까 염려했다. 수많은 규제와, 혹은 (역설적인) 규제의 공백, 그리고 사회적 인식이 이를 잘 대변해 준다.
하지만, 메타버스와 AI의 발전과 확산은 두 세계 사이의 경계를 더욱 흐리게 만들고 있다. 또 다른 페르소나(아바타)와의 공존, 가상화폐로 대변되는 탈중앙화 경제 시스템, 우리의 판단과 의사 결정은 물론, 창작마저 대체하는 강력한 기술(생성 AI)의 등장. 이는 우리가 ‘유일한 진실’로 믿어 왔던 근대적인 경제, 학문 체계, 세계관에 대한 해체에 다름 아니며, 더불어, ‘인간 고유의 합리성에 근거한 가치와 원칙’이라는 오랜 믿음의 붕괴에 다름 아니다. 두 세계를 경계 없이 넘나드는 잘파 세대(Z+Alpha 세대)의 등장은, 이러한 빅 블러(Big Blur) 시대의 도약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하지만, 그 도약의 향방과 성격은 여전히 불확실하다. AI와 메타버스를 혁명적이라 규정할 수 있다고 해도, 그것이 그리도 쉽게 ‘근대의 완전한 해체’를 불러올 것인지는 아무도 단언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미래를 속단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대표되는 기존의 탈근대 담론이 얼마나 공허하고, 또 맹목적이었는지를 상기해 본다면, 눈앞으로 다가온 메타버스와 AI의 혁명적 성과와, 그 사상사적 가능성은 반드시 검토되어야 마땅하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더 이상 이러한 흐름을 무시하거나, 그것에 저항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무턱대고 이 변화의 바람을 두려워하기보다는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기를 주문한다. 혹여 메타버스와 AI의 발전이, 인류가 지난 500년간 신봉해 왔던 근대적 체제와 제도를 모두 해체해 버린다고 하더라도 놀랄 것은 없다. 그것이 마치 인류 문명의 붕괴를 의미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해체의 동의어는 ‘새로운 시작’이다. 지난 수천 년간의 인류의 역사가 그러하였듯, 인류는 메타버스와 AI를 기반으로 또 다른 질서와 제도를 창조하며, 새로운 문명의 성과들을 구축해 나갈 것이다.
[서승완 대표] 서승완은 유메타랩 대표이자 전국 대학 메타버스 연합회의 회장이다. 청년의 눈높이에서 전공인 철학과 메타버스 세상을 재해석하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다수의 대학 및 공공기관에서 메타버스 관련 프로젝트 및 자문에 참여하고 있다. 저서로는 ‘나는 메타버스에 살기로 했다’, ‘인스타로 보는 동양고전’ 등이 있으며 최근 메타버스 전문 뉴스 미디어 ‘메타리즘’에서 전문가 칼럼을 집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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